월간참여사회 2019년 06월 2019-05-30   2706

[통인] 5·18 잘 안다는 당신이 봐야 할 영화 – 강상우 영화 <김군> 감독

5·18 잘 안다는 당신이 봐야 할 영화

강상우 영화 〈김군〉 감독

글. 김도연 참여사회 편집위원, <미디어오늘> 기자 / 사진. 박영록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봉준호 감독의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 소식에 조금 걱정됐다. 거장의 명작으로 인해 또 다른 수작이 묻히지 않을까 하는 우려였다. 5·18을 다룬 다큐멘터리 영화 <김군>이야기다. 이 영화는 지난 5월 23일 개봉했다. 스크린 수는 73개에 불과했다. 24일 67개로 줄었다. 25일에는 69개, 26일에는 66개로 아슬아슬하게 개봉관을 유지하고 있다. “봉 감독의 <기생충>이 나오기 전에 최대한 많은 이들이 ‘김군’을 찾아야 하는데….” 조바심에 극장을 찾았다. 1시간 25분의 러닝타임. 스크린에서 눈을 떼기 어려웠다. 

 

영화는 극우 논객 지만원이 ‘광주에서 활동한 북한 특수군’이라고 주장하는 첫 번째 인물인 ‘제1광수’를 추적한다. 당시 ‘김군’으로 불렸던 그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민군이었을까, 아니면 지만원 말대로 북한군이었나. 

 

개봉을 하루 앞두고 있던 지난 5월 22일, 서울 종로구 참여연대에서 강상우 감독(36)을 만났다. 그는 1980년 5월 광주 시민군과 북한 인사들 사진에서 유사성을 찾은 지만원의 작업을 “21세기 레드 콤플렉스로서의 시각화 작업”이라고 말했다. 광주와 인연이 없는 서울 출신 감독의 ‘제1광수 찾기’는 성공이었을까.

 

 

개봉에 앞서 광주 등에서 특별 상영이 있었다. 광주 현장 반응은 어땠나? 

 

광주 시사회는 영화에 도움을 주거나 인터뷰에 응해주신 분들이 참석하셨다. 기억나는 반응이라면 1985년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저자이신 이재의 선생님께서 새벽에 장문의 문자를 보내신 일이다. 광주 사람이 아닌 외부자 시선에서 객관적으로 사건에 접근한 것에 좋은 평가를 주셨다. 전주에서의 상영도 기억에 남는다. 영화가 끝나고 눈물을 흘리시면서 질문한 분이 있었는데 80년 5월 17일 광주에서 도망가셨던 분이었다.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영화 <김군> 제작을 결심하게 된 계기는 무엇인가?

 

원래 알고 지냈던, 광주에서 세탁소를 하시는 주옥 선생님이 2015년 5월 문을 연 5·18민주화운동 기록관 초대를 받고 방문하셨다. 선생님께서 5·18 항쟁 당시 주먹밥을 나르셨던 양은 대야가 그곳에 전시됐다. 기록관을 방문하시고 저희에게 ‘같은 동네 살던 청년 사진이 크게 걸려 있더라. 그 청년을 김군이라 불렀다’고 하셨다. 비슷한 시기 지만원 씨와 커뮤니티 일간베스트(이하 ‘일베’)가 그 사진 속 인물이 2010년 평양에서 촬영된 인물과 동일인이라고 주장했다. 다들 아시는, 80년 5월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에 침투했다는 주장이었다. 시민군 가운데 ‘김군’을 ‘1번 광수’로 특정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영화 <김군>의 한 장면. 영화는 극우논객 지만원이 '북한군'이라고 주장하는 인물, '제1광수'를 추적한다 

 

 

사진만 보고 찾기로 제작을 결심한 건가? 조금 더 구체적으로 ‘스위치’를 딱 켜게 된 계기는? 

 

동일한 사진 속 인물에 상반된 주장이 있다는 사실에 흥미를 느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지만원 씨가 당시 촬영된 수백 명의 광주 시민 사진에 빨간 점과 화살표를 조악하게 찍으면서 북한 사람들 사진과의 매칭 작업을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작업이 ‘1번 광수’에 대한 화살표 작업이었다. 어떤 의미에서 21세기 레드 콤플렉스로서 시각화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5·18에 관해선 ‘집단’을 이야기했다면, 지만원의 화살표는 개개인을 가리키고 있었다. 이 화살표를 이용해 오히려 항쟁에 참여했던 개개인의 삶을 조명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지만원 씨에게 감사하다.

 

영화 초반 지만원 인터뷰가 나온다. 그가 인터뷰에 흔쾌히 응했나? 

 

친절하게 응해줬다. 무대 위 마이크를 쥐었을 때 느낌과 개인으로 대화할 때 느낌은 조금 다르다. 친절한 사람이었다.

 

그가 영화를 봤다는 이야기는 하던가?

 

못 보셨다고 한다. 대신 리뷰나 예고편을 보고 글을 쓰더라. 며칠 전 안 보겠다고 선언했다. 인터뷰 요청을 드릴 때 우리 제작 방식과 형식을 말씀드렸다. 이 사람(‘김군’)이 북한군이다, 광주시민이다, 결론을 내리지 않고 여러 목소리를 듣겠다는 게 제작 의도였다. 완성 뒤 인터뷰에 참여하신 분들에게는 연락을 다 드렸다. 지만원 씨에게 연락을 못 드린 건 죄송했다.

 

지만원은 지난해 10월 14일 ‘5·18은 빨강 신기루, 영화 <김군> 제1광수 못 찾아’라는 글에서 “이번 영화는 제1광수가 북한사람이라는 사실을 간접적으로나마 인정해주고 확인해준 매우 귀한 영화가 된 셈”이라며 영화가 자기주장을 뒷받침한다고 해석했으나 올해 5월 12일에는 “강상우 영화감독, 황당한 소설로 영상 찍느라 참 고생했다. 그대에게 갈 돈이 파란 돈일지 빨간 돈일지 이미 계산했을 것 아니겠는가”라며 강 감독을 비난했다. 

 

 

5·18을 소재로 한 기존 영화들과 <김군>의 차이점이 있다면?

 

‘제작진이 5.18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는 상황에서 출발했다. 역사적, 사회적 또는 정서적 짐이 없었다. 사실 개인적으로 그전까지 5·18에 약간의 거부감이 있었다. 앞세대에서 강요하는 느낌에 대한 거부감. 5·18 관련 재현물에도 크게 공감하진 못했던 것 같다. 다만 다큐는 몇 개 좋아한다. 김태일 감독의 <오월애>(2011)라는 다큐가 있다. 5·18에 참여했던 시민들을 조명한 작업이다. 영화를 위해 방송 다큐도 찾아서 봤다. 최승호 PD(현 MBC 사장)가 1999년에 연출한 MBC <사라진 사람들>은 광주항쟁의 실종자들을 다룬다. 그밖에 극영화들은 보지 않았지만 증언 기록, 특히 영화에서 중요했던 사진들은 샅샅이 찾았다. 신문 기사도 참고했다. 시나 소설, 극영화를 참고하진 않았다.

 

5·18을 재현한다기보다 당시 청년이었던 시민군의 현재를 보여주는 데 집중한 느낌이다

 

영화에서 중요한 레이어는 두 가지였다. 첫째, 생존자의 현재 삶과 목소리, 둘째, 1980년 5월 당시 그들의 10~20대 이미지였다. 이제는 50~60대가 된 생존자들이 젊은 누군가와 대화를 나눈다는 맥락 속에서 그들의 목소리와 사진 속 청년 이미지 결합이, 지금 젊은 관객 및 제작진과의 연결 매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터뷰이는 광주를 경험한 이들이었다. 트라우마를 갖고 있다. 증언을 어려워하진 않았나?

 

아무것도 모르는 애들이 무언가를 하려 한다는 생각에 예쁘게 봐주셨달까.(웃음) 전문 저널리스트나 리포터가 아니라, 왠지 어리숙해 보이는 애들이 와서 기본 2~3시간씩 이야기 나누듯이 하다 보니 더 그러셨을 것 같다. 그러다가 인터뷰 마지막에서야 80년 5월 당시 사진을 보여드리고 여쭤보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되도록 카메라는 있는 듯 없는 듯 멀리서 촬영했다. 대화를 한다는 차원에서 전문적이지 않은 평범한 질문을 던지려 했다. ‘당시 좋아했던 노래나 날씨’ 등 사소한 질문부터 시작했다. 그래서인지 수다 떨듯 응해주신 분들이 많았다. 피해 증언을 넘어 그들이 느끼는 정서와 감성 등을 담으려고 노력했다.

 

100여 명이 넘는 광주 시민을 직접 만났다. 인터뷰이 가운데 인상적인 분이 있었다면?

영화에 등장하는 분은 20여분 정도다. 최대한 인상적인 분들을 넣으려고 했다. 영화의 주요 타임라인은 80년 5월 24일로 끝나지만, 보통 5·18 관련 작업들을 보면 5월 27일을 제일 중요한 날로 꼽는다. 21일 집단 발포가 있었고 27일은 계엄군의 도청 진압이다. 아무래도 27일 도청에 계셨던 분들 말씀들이 인상적이었다. 그날 죽을 걸 각오하고 전날 오후 잠깐 도청 밖에 나갔다 오셔서 목욕하고, 새 옷을 입고 다시 들어오셨다는 분도 있었다. 영화에 나오는 오기철 선생님 이야기다. 그는 도청 상무관에서 시신 관리를 하셨다. 그러다 보니 본인이 사망했을 때 가능하면 깨끗한 모습이길 원했다.

 

영화를 보면서 지금도 여전히 5·18 피해자들은 트라우마를 겪고 있다는 게 느껴졌다. 그날을 기억하기 힘겨워하는 분들도 있었다. 

 

제대로 된 직업을 갖거나 평범한 삶을 사신 분들이 거의 없었다. 고문 피해로 인해 몸이 성하지 않았지만 폭도라는 낙인 때문에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피해와 상처를 달래기 위해 술을 많이들 드셨다고 한다. 알코올 중독으로 건강을 잃거나 가족과 불화를 겪고 계신 분들도 적지 않았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영화 <김군> 포스터 Ⓒ필앤플랜  

 

제작 기간이 만 4년이었다. ‘김군 찾기’가 기약 없는 상황에 포기하고 싶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나?

 

그만둬야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생존하고 계시든, 사망하셨든 두 가지 모두 염두에 뒀다. 전혀 단서를 찾지 못한다고 해도 ‘잘 실패할 수 있는 방식’을 찾을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실패하는 과정에서 만나는 사람들 증언과 장면으로 좋은 영화를 만들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이 알고 싶다> 같은 시사 프로그램이었다면 실체규명이 가장 중요할 수 있겠지만 말이다. 우리 영화에 그런 고민은 없었다.

 

영화에 5·18 북한군 개입설을 주장하는 인사들이 개최한 행사 장면이 나온다. 아직도 사실이 왜곡되고 가짜뉴스가 난무하는 까닭은 어디에 있다고 보나?

 

6·25 혹은 그 이전 냉전 체제에서 비롯한 산물이라 본다. 내가 동의하지 않는 타인을 ‘빨갱이’라는 단어로 규정하고, 그 사람들을 죽여도 되는 존재로 보는 현상이 5·18에서 반복된 것이다. 영화 속 집회는 작년 5월 18일 국립현충원에서 열린 ‘5·18 북한군에 의해 돌아가신 군경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집회’였다. 지만원 씨 주장을 처음 접했을 때 빨간 화살표가 흥미롭다고 봤는데 그 집회는 어이가 없었다. 우리 사회가 이런 집회를 용납한다는 게 이해되지 않았다. 편집하면서 알게 된 사실은 5·18 당시 계엄군 지휘자들이 그 집회 현장의 무대에 서 있었다는 점이다. 퍼즐이 완성되는 느낌이었다. 지만원 씨가 스피커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뒤에 가해자들이 있었다. 가해자들이 ‘21세기 시각화 작업’을 통해 과거를 정당화하고 새 방식으로 역사를 쓰고 있다는 사실이 충격이었다.

 

영화의 홍보 카피는 “그대, 진실의 방아쇠를 당겨라”다.

 

단일한 하나의 진실을 확실하고 명징하게 보여줄 수 있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다만 증언이나 자료 등 진실의 단편이라고 할 수 있는 것들을 솔직하고 윤리적 방식으로 배열하고 사람들이 이를 판단하면 된다고 봤다. 스스로 판단할 수 있도록 여지를 주는 것,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완벽한 진실을 총체적으로 볼 수 있는 시대는 지났다. 아니, 이전에 그런 시대가 있었는지도 솔직히 모르겠다. 우리 영화를 보고 지만원 씨 주장에 설득력을 느끼는 관객도 있을 수 있다고 본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관객들 몫이다. 감독으로서 최대한 솔직한 방식으로 자료와 증거를 제시했을 뿐이다. 영화를 보신 분들 사이에서도 ‘김군’이 누구인지에 대해 여러 의견이 나뉘더라.(웃음)

 

영화 <김군>은 지난해 12월 서울독립영화제 대상을 받았다. 본인 영화가 주목받는 이유는 무엇일까? 자기 자랑을 해본다면?(웃음)

 

이번 작업에 함께 한 PD가 제게 “전생에 덕이 많아 인복이 많다”고 하더라. 주변에 능력자들이 많았다. 개봉 단계까지 그랬다. 그분들과 좋은 협업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나는 말초적인 편이다. 감각적인 것에 이끌린다. 민중가요도 좋아하지 않는다.(웃음) 그런 감각을 갖고 5·18에 접근한다는 게 새로울 수 있을 것 같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언제 처음 감독이 돼야겠다고 생각했나? 또 언제까지 영화를 제작할 것인지?

 

회사에 다니면서 ‘내가 이렇게는 못 살겠구나’ 싶었다. 지겨운 상황을 잘 못 참는다. 회사를 그만두고 영화를 만들기 시작했다. 먹고 사는 게 힘들긴 하지만 영화를 만드는 건 지겹지 않았다. 그래서 계속하고 있다. 언제까지 ‘재미’를 동력으로 영화를 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감각이 쇠퇴하고 작업에 재미가 없어지면 그만둘지도 모르겠지만…. 원래 뒤를 생각하지 않는 편이다.

 

이번 영화 관객들의 호응이 크지 않으면 개봉관이 줄어들 수도 있는데?

 

개봉해도 관객들이 찾지 않으면 하루 이틀 안에 내려버리는 경우가 많다. 만 4년 동안 작업했으니 앞으로 4주 동안 많은 분들이 극장에서 찾을 수 있도록 충분한 상영 기회가 주어졌으면 한다. 같이 고생한 스태프들이 응당한 대가를 받을 수 있을 만큼 관객들이 오셨으면 좋겠다. 또 하나는 촬영을 도와주신 광주 생존자분들이 갖고 계신 바람이다. 영화를 통해 그동안 조명되지 않았던 ‘광주 송암동 양민 학살’ 사건이 주목받았으면 한다. 이슈가 돼 앞으로 출범할 5·18진상조사위 주요 조사 과제로 채택되길 바란다.

 

여러 인터뷰에서 ‘젊은 층’이 봐주면 좋겠다고 했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나?

 

기관총으로 무장한 시민군 사진에 의문을 제기한 건 ‘일베’였다. ‘민주화운동인데 왜 무장하고 있지. 왜 저렇게 과격한 모습이지’라는 의문. 이런 의문에서 북한군 개입설이 시작됐다. 그 물음은 내가 ‘김군’ 사진을 처음 보고 느꼈던 호기심과 맞닿아있다. 시민군의 무장을 이해하려면 많은 과정이 필요한데 어느 세대부터인가 그런 서사의 전승이 사라졌다. 도리어 서사를 강요받는 느낌이라 거부감을 갖곤 했다. 새 방식과 감각으로 맥락을 잇는 작업이 필요했다. 총을 들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추적의 방식으로 보다 재밌게 풀어나가려 한 이유다. ‘민주화운동’이라는 말로만 정리된 역사가 놓쳤던 것들을 알게 되지 않을까 싶다.

 

그밖에 이 영화를 꼭 봐야 할 분들이 있다면? 

 

광주는 상징 권력을 가진 386세대나 그들 정치인들의 도구로 활용되곤 한다. 지만원 씨를 비판하고 우습게 보는 사람들도 정작 5·18 생존자들에게 별 관심이 없더라. 5·18에 왜곡된 주장을 일삼는 사람들보다 5·18을 잘 알고 있다고 착각하는 분들이 많이 봤으면 좋겠다.

 

앞으로 어떤 영화 또는 감독으로 기억되고 싶나?

 

이 작업은 역사적 사명감으로 시작한 게 아니다. 사회·정치 이슈로만 소비되거나 특정 진영을 타게팅해 관객몰이를 하는 영화로 기억되고 싶지 않다. 새 자극과 감각을 주는 재밌는 영화로 받아들여지면 좋을 것 같다. 관객들이 지루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