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775

내 주변의 작은 일부터 참여하자

나는 지난달부터 뜻밖의 새로운 직함을 하나 더 갖게 되었다. 그것은 내가 살고 있는 아파트단지의 주민대표라는 직함이다. 내가 아파트 주민대표직을 맡았다고 하니까 주변 사람들은 모두 의아해한다. 집사람은, 남들은 국회의원이다 시장이다, 하다못해 극장장이다 하면서 한 자리씩 하고 있는데 아닌 밤중에 무슨 월급도 없는 아파트 주민대표냐면서 어처구니없어한다. 하지만 나는 내가 맡은 이 직책을 당분간 열심히 수행해 볼 작정이다.

자초지종은 이렇다. 2년 전부터 내가 살고 있는 12층짜리 아파트단지에 재건축 바람이 일기 시작했다. 건축된 지 15년 남짓밖에 되지 않은 아파트에서 이렇듯 갑자기 재건축 바람이 분 것은 이웃에 있는 5층 아파트의 재건축이 완료되면서였다. 5층 짜리 무명 아파트였던 이웃 아파트가 국내 굴지의 H산업에 의해 27층짜리 고층 아파트로 변신하면서 주민들이 동요하기 시작한 것이다. 바로 그 동요를 부추긴 사람들이 재건축 추진위원회(이하 추진위)를 결성하고 주민들을 재건축 바람으로 몰아가기 시작했다.

나는 당시 우리 아파트의 재건축 추진과정에 몇 가지 문제점이 있다고 느꼈다. 하나는 재건축 비용면에서 주민의 자기 부담률이 너무 높게 책정되어 있다는 점, 또 하나는 건설업체 선정 등에서 뭔가 담합이 있다는 의혹 그리고 다른 하나는 재건축사업의 방향과 관련해 주민들의 의사수렴이 올바르게 진행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 등이었다. 이런 생각을 하면서도 나는 부당한 재건축 추진에 대해 뭐라고 문제제기하기가 어려웠고, 공식적으로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주민총회에서 추진위측이 교묘한 위계로 주민들을 현혹하고 있음을 감지하면서도 이미 설득당한 주민들의 마음을 돌리기란 참으로 어려웠다.

그런데 뜻밖에도 기회는 왔다. 재건축 아파트의 용적률을 대폭 낮추겠다는 서울시의 조례가 통과된 것이다. 용적률이 낮아지면 주민의 자기 부담률이 엄청 높아지는 법. 그럼에도 추진위는 이러한 사실을 숨기고 추진을 강행하려 하였고, 이를 눈치챈 일부 주민들이 비상대책위원회를 결성해 필사적으로 추진을 저지하고 나섰다. 주민들은 구청에 제출된 재건축 관련 인감증명서를 되찾아왔고, 이로 인해 재건축 조합 설립이 무산됨으로써 재건축 자체도 무산되었다.

나는 이 과정을 지켜보면서 여러모로 착잡한 심정이 들었다. 명색이 재야 문화운동가 출신인 내가, 재건축 추진저지 과정에서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방관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자기가 살고 있는 아파트 현안에 대해서조차 이처럼 무력하다면, 우리 사회를 위해 내가 맡아야 할 일이 어디 따로 있을 것인가 하는 자괴감이었다. 그러던 중 몇몇 이웃주민들이 현재의 피폐한 아파트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서는 대표를 제대로 뽑아야 한다면서 나에게 주민대표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던 것이다.

잠깐 돌이켜 생각해 본다. 우리 사회의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역할을 너무 큰 영역과 너무 높은 위상에서만 기대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참된 사회 참여는 작은 일에서부터, 낮은 곳에서부터, 자기 주변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리고 이 지면을 통해 권유하고 싶다. 내년에 있을 지방자치선거에 시민운동가들이 되도록 많이 출마해서 당선되었으면 좋겠다. 또 존경받고 있는 명망가들까지도 명예와 체면을 생각지 말고 낮은 곳에서부터 자신의 역할을 거리낌없이 받아들이길 바란다. 그런 풍토가 형성된다면, 우리의 풀뿌리 민주주의는 한층 더 견고하게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이다.

임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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