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 2018-12-01   2243

[여성] ‘메신저’와 ‘저격수’ 너머 혁명하는 여성의 자리

‘메신저’와 ‘저격수’ 너머
혁명하는 여성의 자리

 

벌써 ‘촛불혁명’ 2주년이 훌쩍 지났다. 작년 헌정사상 처음으로 5월 장미대선을 치른 후, 나는 11월이 되면 곧 다가올 크리스마스나 연말보다는, 100만 명이 처음 광화문 광장을 가득 메웠던 그 날이 먼저 떠오른다. 거대한 군중 속에서 영하의 날씨에 오들오들 떨며 혁명을 직감하고 소름이 오소소 돋았던 그 순간 말이다. 그 겨울 광장은 봄까지 계속되었고 하야에서 퇴진, 그리고 탄핵으로 이어지는 과정에서 지도자의 선의에 기댔던 시민들의 요구는 주권자의 정당한 주장으로 바뀌었다. 당시 우리 모두는 대의제 민주주의의 한계를 찢고 스스로를 대리대표 하겠다는 의지가 충만했다. 그러나 광장에서의 시간은 마법처럼 찰나에 불과했다. 이제 영원할 기억은 몇 줄 기록에 의존될 뿐이다.

 

영화, 드라마를 통해 재현되는 역동적인 여성의 초상

덕분에 작년 한 해, 아래로부터의 무혈혁명을 통해 명예롭게 재등장한 현現 민주정권을 기념하는 대중서사들이 곳곳에서 쏟아졌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구한말과 일제 말, 그리고 5·18과 6·10을 아우르며 거의 한 해 만에 한국사를 영화나 드라마로 죄다 쓸 기세였다. 그러나 여러 논자에 의해 지적됐지만, 이렇게 즉각적으로 생성되는 콘텐츠들은 노골적으로 남성 군주나 남성 대신, 그리고 남성 소시민이나 남성 군중으로 드러났다. 여기에 여성 인물은 똑같은 역사적 변혁기를 맞고도 자신의 사회·계급적 배경을 뛰어넘는 핵심적 역할을 자임하지 않는다. 또한 필연적으로 도래한 혁명의 모멘트를 화면 가득 여성의 얼굴로 채운 적도 없다.

 

그렇다고 했을 때 여성 인물이 담당할 수 있는 최대치의 역할로 ‘메신저’와 ‘저격수’가 도드라지는 것은 흥미로운 부분이다. 나는 지금 배우 김태리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영화 <1987>에서 혁명의 물결에 합류하는 여대생 ‘연희’로 분했다. 그리고 곧 시간을 역진해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는 식민전야의 조선의병 ‘고애신’ 역할을 맡는다. 이한열 열사의 가상의 맞짝인 연희는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고 항변하지만, 결국 결정적인 메시지를 전하는 인물로 등장한다. 또한 “나도 꽃으로 살고 있소. 다만 나는 불꽃이오.”라고 말하던 고매한 사대부가의 영애 고애신은 자신이 구하려는 조선에서 백정과 노비는 살아갈 수 있느냐는 정인(情人)의 질문에 크게 반성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이 두 인물의 역동적인 초상은 각각의 이야기에서 가장 빛난다. 아버지의 조국과 공화국의 형제를 위한 대사大事라는 큰 맥락에서, 그녀들은 이들 남성 네트워크를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 주체성을 발휘한다. 극 중에서 모든 남성들은 이 여성들을 필요로 하고, 또 모두들 그녀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전(前) 보수정권 말, 한차례 붐이었던 식민지 배경으로 한 영화중에서도 가장 인상적이었던 <밀정>의 연계순과 <암살>의 안옥윤 역시 반짝이는 ‘메신저’이자 ‘저격수’로서의 여성이었다. 물론 이처럼 여성 광복군과 여성 의열단원을 비롯해 역사에 존재했던 여성들을 복원하고 그를 둘러싼 대중의 상상을 두텁게 하는 작업은 필요하다. 이 과정에서 ‘안사람 의병가’를 만든 윤희순이나 총을 든 여성독립운동가 남자현이 이런 영화 속 캐릭터의 실제 모델로 재차 회자됐듯 말이다.

 

월간참여사회 2018년 12월호(통권 261호)

영화 <암살>의 한 장면. 극 중 한국 독립군 출신의 여성 저격수인 안옥윤(전지현 분)은 대표적인 여성 독립운동가 남자현 의사를 모티브로 한 것으로 알려졌다. ⓒ네이버 영화

 

광장을 가득 채웠던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한 발 더 나아가볼 것은 식민지와 더불어 도래한 근대성의 안팎에서 언제나 그 가능성과 한계를 질문하는 존재로서 여성의 자리에 대해서다. 식민지 남성들은 제국 남성과의 좁힐 수 없는 차이를 인식하면서 식민지 여성과의 비교를 통해 자신을 구성해왔다. 그럼에도 이러한 차이를 드러내는 여성들의 역사적 순간은 후경화(後景化, back-grounding)하고 종종 남성의 얼굴을 한 호전적 민족서사에서 여성은 최선(最善)으로, 혹은 최소(最少)로 가시화할 뿐이다. ‘메신저’와 ‘저격수’는 바로 그렇게 여성에게 허락된 몇몇 자리 중 하나일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혼종적 수행성을 보여준 <미스터 션샤인>의 쿠도 히나 같은 신여성들이 살아남았더라면, 아직 신분제의 관습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수많은 ‘함안댁’들이 죽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미국인 및 친일파 남성들과 또 모던보이들과 수많은 행랑아범들과 더불어 해방과 분단, 그리고 전쟁까지를 아우르는 근대를 어떻게 통과했는지, 더 다양한 이야기들이 조망될 수 있지 않을까.

 

무엇보다 1987, 그 광장을 가득 채웠던 여성들은 지금 어디에 있을까. 2000년대 이후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로 상찬되던 촛불소녀들은 이미 성인여성이 되었고, 촛불광장에는 사실 모든 연령대의 여성들이 있었다. 또한 그들 중 다수는 촛불정권이 세워졌다며 다른 이들이 모두 귀가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 거리를 지키고 있다. 아이와 여자를 묶어 부르는 ‘아기씨’로서 조선의 미래가 되기를 거부하는 대신 ‘지금-여기’를 맹렬하게 살아가는 여성들의 자리는 어디일까. 메신저나 저격수라는 형상만으로는 부족한, 민주주의의 완성을 위해 함께 ‘#미투’를 외치는 여성들, 집단적으로 ‘성 적폐’를 정조준하는 이들이 어떻게 그려질지, 그녀들의 혁명이 어떻게 기록될지 앞으로 더 지켜볼 일이다. 

 


글. 류진희 성균관대 강사

동아시아학과에서 한국문학을 전공했다. 탈/식민 서사, 장르, 매체를 횡단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와 매체/장르/언어를 횡단하는 여성들의 목소리에 관심 있다. 『양성평등에 반대한다』,『소녀들』,『그런 남자는 없다』를 같이 썼다.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