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9월 2007-09-01   894

“돌아갈 고향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요”

억세게도 더운 여름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나른한 오후에 낙성대 ‘만남의 집’에 있는 사무실로 강담 선생님이 찾아오셨다. 누군가 선생님께 세탁기를 선물하여, 그동안 쓰시던 세탁기를 이곳으로 옮겨올 수 있는지 손수 보러 오셨다. 파나마모자 쓰고, 손가방 단정하게 들고, 얼굴에는 지친 기색도 없으시다.

제2차 남북정상회담 개최 발표에 잠 이루지 못하시더니, 며칠 전 북녘에 큰 물난리가 났다는 소식과 함께 염려한 대로 정상회담이 미루어져 또 잠 못 이루셨을 것이다. 선생님은 일흔을 훌쩍 넘긴 연세에도 불구하고 야간노동을 하여 번 돈으로 수해지원금을 내놓으시겠단다.

남북·북남 간 2차정상회담은 선생님에게는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지도 모른다. 작년에서 올해에 걸쳐 노환을 견디지 못하고 여러 선생님들이 통한의 삶을 마감하셨다. 그러나 30여 년 세월 동안 감옥에 갇힌 채 차마 인간으로서 할 수 없는 온갖 극악한 고문에도 포기하지 않았던 생명의, 부모형제의, 신념의 고향으로 돌아가시려고 선생님은 몸과 정신을 한시도 흩뜨리지 않으신다.

선생님은 일제 강점기인 1933년 함경남도 홍원군 산양리라는 곳에서 빈농의 아들로 태어나 열두 살이 되도록 학교에 가지 못하고 소 먹이러 다녔다. 소작농인 아버진 농한기인 겨울부터 봄까지는 서울에 가서 목수노릇을 하셨다. 선생님이 9살 무렵 아버지가 병으로 돌아가시고 집안 형편은 어려워져서 한 두 끼 건너뛰기가 다반사였다. 선생님은 제법 부자였던 친구 집에서 놀다가 배를 채우기도 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멀리서 자기 집 굴뚝을 올려다보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굴뚝에 연기가 피어오르면 다행히 이웃에서 쌀을 얻어 멀건 죽이라도 끓여 먹을 수 있는 것이고,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는 날에는 영락없이 굶는 날이기 때문이었다. 먹을 것이라곤 떫고 쓴 맛이 나는 쌀겨를 시루에 찐 것이나 기름을 짜내고 난 콩 찌꺼기를 물에 불려 삶은 것뿐이었으며 그야말로 초근목피로 연명했을 만큼 어려운 시절이었다.

선생님에게는 일제강점기의 혹독한 가난, 전쟁기에 미제국의 가공할 폭격으로 폐허가 된 땅에서 이룬 자주건설의 그 영웅적 노력들과 다시 누리게 된 인간 중심의 평등한 삶, 영예로운 당원이 된 것, 돌아오는 재일동포들을 환영하기 위해 몇 천 명이나 되는 환영인파로 북적이던 청진항, 서른 넘어 말 타고 장가가던 일, 결혼하여 두 아이를 낳고 통일 사업을 하러 내려온 일, 돌아가지 못하고 그리움만 차곡차곡 쌓아온 그 모든 세월이 바로 고향에 대한 기억으로 아로새겨져 있다. 그 고향으로 선생님은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고향을 버리기를 강요하는 국가권력의 폭력으로 상처 입은 채…….

그러나 선생님은 결코 희망만은 버리지 않고 계신다. 어느 시인의 시구처럼 지금은 결코 꽃이 아니라도 좋을 것이며, 온갖 역경 속에서도 저리 강건하게 버텨주고 있는 그곳은 선생님에게 순결하고 영원한 고향인 것이다.

임미영 민가협 양심수후원회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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