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9월 2007-09-01   1637

참여연대의 새 보금자리, 통인동 132번지

참여연대가 새롭게 보금자리를 마련한 통인동 132번지는 인왕산이 한 눈에 들어오며, 경복궁과 청와대가 엎어지면 코 닿을 정도의 가까운 거리에 있다. 그러므로 자신이 거처하는 집을 여유당(與猶堂)이라고 이름 붙인 정약용 선생처럼 매사에 조심하고 신중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與)’는 겨울 냇물을 건너 듯 의심이 많은 동물이고, ‘유(猶)’란 사방을 두려워하는 듯 겁이 많은 동물이다.

선인들의 발자취가 남아있는 곳

통인동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자. 통인동은 일제 식민지시대에 신설되었다. 조선시대에 이 일대는 서촌(西村) 또는 웃대(上村)라고 불렸는데, 서촌(西村)이라는 이름은 인왕산이 경복궁의 서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태조~세조 때에는 인왕산을 서봉(西峰) 또는 서산(西山)으로 불렀다. 한편 인왕산에서 누상동으로 흘러내리던 물과 인왕산에서 옥인동과 청운동 골짜기로 흘러내리던 물은 지금의 통인동 우리은행 앞 삼거리에서 합류하여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을 지나 황토마루(동아일보사 근처)에서 청계천으로 흘러들었다. 따라서 이곳은 청계천의 상류지역에 해당한다. 웃대라는 말은 바로 이러한 연유로 생겼는데, 옥인동, 누상동, 사직동, 효자동, 창성동, 통인동, 신교동 등이 웃대에 속했다. 웃대에는 서리(경아전), 내시, 시전상인, 군교 등 중인들이 많이 살았다. 그래서 청계천 지역의 웃대와 아랫대는 소위 ‘여항(閭巷)’으로 불리었으며, 중하층 민중들이 신분제약의 울분을 술과 시로 달래며 옥계시사, 송석원시사, 칠송정시사, 직하사, 비연시사, 서원(일섭원)시사, 육교시사 등의 모임을 결성하여 조선후기 평민문학을 꽃피우기도 했다. 물론 경치가 좋은 곳은 권력층들이 차지하였다. 권율과 백사 이항복의 필운대, 친일파 윤덕영 별장, 안동 김 씨와 여흥 민 씨, 세종과 선조의 탄생지 등이 이 근처에 있었다.

특히 세종대왕은 통인동 137번지 일대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 태종이 왕으로 등극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궁궐 밖에서 태어났다. 또한 요절한 천재작가 이상(李箱)도 통인동 154번지에 있던 백부의 집에서 23살까지 살았다. 이상은 경성 고등공업학교를 졸업한 후, 조선총독부 내무국 건축과 기수로 근무했다. 그는 통인동 백부의 집에서 조선총독부가 있는 광화문까지 매일 걸어서 출근했으며, 시 ‘오감도’와 소설 ‘날개’를 통인동에서 집필했다.

현재 이상의 옛집은 한 지붕 아래 한복가게와 한문 서원이 나란히 붙어있는데, 몇 년 전 김수근 문화재단에서 매입하여 복원을 계획하고 있다. 한편 누상동 9번지에는 시인 윤동주의 하숙집이 있었으며, 겸재 정선은 현재 경복고 자리인 청운동 89번지에서 태어나 살다가 옥인동 20번지 일대로 이사했다. 청운초등학교 정문 근처에는 송강 정철의 옛집이 있었으며, 경복 고등학교 내에는 조원의 운강대가 있었고, 경기상고에는 우계 성혼의 옛집이 자리 잡았으며, 통의동 35-5번지에는 추사 김정희 생가가 있었다. 이 일대는 궁궐에서 가깝고 경치가 빼어난 곳이다 보니 많은 화가들이 그림으로 즐겨 그렸으며, 시인묵객들이 즐겨 찾아 풍경과 감정을 글로 남기기도 했다. 겸재 정선은 ‘인왕제색도, 장동팔경첩, 풍계유택, 청풍계도, 인곡유거’ 등을 남겼고, 강희언은 ‘인왕산도’를 남겼다. 단원 김홍도는 ‘송석원시사야연도’를 남겼고, 이인문은 ‘송석원시회도’를 남겼다. 인왕산을 노래한 문인들의 작품은 청음 김상헌의 ‘유서산기’(‘청음집’권38), 김동인의 단편소설‘광화사’, 박완서의 ‘내가 잃어버린 동산’(「한 길 사람 속」, 작가정신, 1999), 김광규의 시 ‘인왕산’, 황지우의 시 ‘산경(山經)’등이 있다.

한성부 북부 준수방의 ‘통곡(通谷)’과 ‘인왕산(仁王山)’에서 이름을 따 온 ‘통인동’

다음으로 통인동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자. ‘통인동 일대’는 1396년 한성부의 행정구역을 5부 52방으로 나눌 때, 북부 준수방(俊秀坊)에 속했다. 당시 이 일대에는 통곡(通谷), 사포동(司圃洞), 옥동(玉洞) 등의 자연부락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751년(영조 27)에 제작된 『도성삼군문분계총록(都城三軍門分界總錄)』을 보면, 행정구역이 좀 더 세분화되어 이 일대는 한성부 북부 준수방(俊秀坊) 준수방계(俊秀坊契)에 속하였다.

그 당시의 상황을 1750년대 초에 제작된 회화식 군현지도집인《해동지도》(47.0×30.5cm, 8책, 서울대 규장각 소장)의 「도성도」를 통하여 살펴보자. 이 지도에서 준수방계는 표기되어 있지 않다. 다만 경복궁 옆에 영희전(永禧殿), 육상(毓祥), 효장묘(孝章廟)가 있고, 이웃 동네인 청풍계(淸風溪), 옥류동(玉流洞), 그리고 사직(社稷), 필운대(弼雲臺), 분선공허(分繕工墟)가 나타난다. 분선공허(分繕工墟)는 토목과 영선에 관한 일을 나누어 맡아보던 임시관청인 ‘분선공감(分繕工監)’의 옛터라는 뜻이다. 《해동지도》와 비슷한 시기에 그려진 것으로 추정되는《도성대지도(都城大地圖)》(1753~1764 추정, 188 x 213cm, 서울역사박물관 소장)에서는 준수방(俊秀坊)과 준수방계(俊秀坊契)를 확인할 수 있다. 지도에서 물줄기가 합쳐지는 곳이 바로 통인동 우리은행 앞 삼거리다. 통인동 우리은행 삼거리 조금 아래에서 금청교(禁淸橋)를 볼 수도 있다. 1894년 갑오개혁의 일환으로 5부를 5서로 고치고 계와 동을 늘려 47방 288계 775동으로 하였을 때, 이 일대는 북서 준수방에 속했다. 이듬해인 1895년(고종 32) 5월 26일 칙령 제98호로써 지방제도를 공포하여 8도 제도를 없애고 23부 336군으로 개혁했다. 이때 한성부가 한성군으로 되었으며, 북서 준수방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그 후 일제식민지 초기인 1914년 조선총독부의 행정구역 통폐합 정책에 따라 북부의 통곡(通谷), 사포동(司圃洞), 옥동(玉洞) 등의 각 일부가 통합되어 ‘통동(通洞)’이 처음으로 만들어졌다. ‘통동(通洞)’은 ‘통곡(通谷)’에서 유래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은『(신구대조)조선전도부군면리동명칭일람』(1917)에서 확인할 수 있다. 사포동(司圃洞)은 궁중의 채소전과 원포(園圃)를 관장하던 사포서(司圃署)에서 유래한 동명이었다. 사포서는 호조(戶曹)의 정6품 속아문(屬衙門)으로 그 책임자를 사포(司圃:정6품)라고 불렀다. 이 일대에 있었던 사포서는 중부 수진방(壽進坊, 현재의 수송동 116번지)으로 이전하였다가 1882년(고종 19)에 폐지되었다. 또한 통동에는 사포서 외에 내시부(內侍府)도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내시부는 이조(吏曹)의 속아문(屬衙門)으로 그 책임자는 종2품 관직의 상선(尙膳)이라 불렀다. 1936년 4월, 조선총독부는 동명을 일본식 지명으로 변경했다. 이에 따라 통인동은 통인정(通仁町)이 되었으며, 1943년 4월 구제(區制) 실시로 종로구 통인정이 되었다. ‘통인(通仁)’이란 지명은 한성부 북부 준수방의 ‘통곡(通谷)’과 ‘인왕산(仁王山)’의 이름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라 전한다. 1946년 일제 잔재 청산의 일환으로 정(町)이 동(洞)으로 바뀔 때 통인동이 된 이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난 8월 10일, 참여연대는 ‘통인동 132번지’로 이사했다. 이제 통인동 132번지는 한국사회의 미래를 밝혀줄 ‘희망 1번지’로서 새로운 역사를 써나갈 것이다. 지금 참여연대 앞에는 비정규직 차별 철폐, 사회양극화 해소,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한미 FTA 비준저지 및 신자유주의 반대, 토건국가의 폐해로 인한 부동산 폭등, 사교육의 폐해로 인한 공교육 붕괴 등 숱한 난제들이 놓여 있다. 회원들의 뜨거운 관심과 적극적인 참여를 통해 참여연대가 초심을 잃지 않고 시민의 지혜를 모아 이러한 문제들을 슬기롭게 풀어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박상표 국민건강을 위한 수의사연대 편집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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