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8월 2007-08-16   1004

고민 불안 희망, 삼십대의 흔적들

직장 생활만으로 장밋빛 인생을 꿈꾸는 건 사치가 되어 버린지 오래, 미래를 준비하는 것이 녹녹치 않다는 현실의 벽에 긁힌 상처만이 빨갛다. 벽. 높다. 파란 하늘이 걸려있는 벽 앞에 내가 있다. 난 사다리를 만들 시간이 필요하다.

내일을 알 수 없는 고용불안의 시대

내가 다니는 회사는 IT업종으로 코스닥에 상장되어 있었다. 과거형인 이유는 이제는 아니기 때문이다. 경제신문에서 자주 기사화되는, 비상장사의 우회상장을 위해 내가 다니는 회사가 자리를 내어준 것이다. 직원들 역시도 경제 논리로 이 사실을 받아 들여야 했고 자신들이 준비하는 서비스가 시장에서 자리를 잡지 못하자 ‘갑작스런’ 정리해고로 회사를 ‘말없이’ 떠났다. 우리들에게는 기회가 한번 뿐 이였던 것이다. 벤처기업에서의 정리해고는 남아 있는 직원들의 사기만 크게 꺾지 않는다면 경제적이고 자연스러운 선택이기 때문이다. 결국 우리는 대기업처럼 시장에 먹고 들어가는 이름값도 서로를 지켜 줄 노조도 없이 이제 한국 사회가 지양해야 한다는 ‘지식산업’에 지금도 퇴근시간을 담보로 잡아 놓고 있다. 사다리를 만들 시간이 줄어든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노동시장의 유연성’ 때문에 인력풀은 넘쳐나고 능력 있는 경력자만을 채용하려는 기업풍토 때문에 어디서든 끊임없이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할 수 있어야 한다. 이는 지금 회사에서 하고 있는 일이 내 이력에 도움이 되는지를 고민하게 만든다. 그래서 새로운 기술을 습득할 자기개발 없이 퇴근시간까지 내어주고 회사에 헌신하다가 언제 어떤 이유로 이 시장에서 ‘팽’ 당하게 될지 몰라 불안해 진다. 회사에서 차지하는 내 위치만큼 익숙한 현실과 언제 그 위치에서 자유낙하 할지 모를 미숙한 미래가 엉킨 하루하루가 한동안 시민운동에 열심힌 나조차(감히) 조바심이 나게 한다. 이 사실에 짐짓 놀라면서도 모른 척 해주는 내 나이 서른다섯이다. 현실에 안주하다 사다리를 만들지도 못하는 건 아닌지 불안해 진다.

경계의 벽 앞에 서서

서른 중반에 결혼을 준비한다. 좋은 사람과 함께 살 도심 지붕 아래 한 모퉁이가 우리들 인심만큼이나 후하지 못하다. 견뎌 내야만 하기에는 너무 큰 부담이다. 내가 은행 돈으로 집을 샀을 때보다 얼마가 올랐으니 얼마를 벌었다는 직장 동료의 말은 별천지의 말처럼 낯설기만 하다. 지금으로는 엄두가 나지 않는다. 그리고 인생 선배와 가정생활에 대한 얘기를 나누다보면 피해갈 수 없는 육아문제와 만나게 된다. 두껍지 않은 월급봉투 때문에 맞벌이를 해야만 하는 시대를 이해할리 없는 아이를 어떻게 달래가며 키워야 할지 너무 벅차다는 얘기를 듣노라면 사다리를 만든다는 것이 가능한 것일까 싶어진다.

높은 연봉을 마다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이직 시기를 놓쳐버린, 칼자루를 회사에 건네 준, 곧 두 아이의 아빠가 될 직장 상사가 저녁 늦게 김치찌개를 앞에 두고 내게 묻는다.

“한 과장, 주위에 행복해 하는 사람이 있어?”

“행복한 사람이요, 저 많이 알죠. 박봉에 기꺼이 원하는 일을 하는 참여연대 일꾼들도 그렇고, 욕심 없이 환경 운동 하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말끝을 흐린다. 내가 행복하다고 느끼는 삶을 난 누구보다도 곁에 두고서는 일터에서의 불안과 고민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경계에서 서성대는 방황은 내 것만은 또한 아닐 것이다. 노동자의 날에 근로자의 날의 의미보다는 노동자의 날이 모두에게 공평한 어감을 주지 않느냐는 말에 ‘노동자’보다는 ‘근로자‘가 더 세련되어 보인다는 직장 동료도 또한 경계에서 방황하고 있을 것이다.

벽. 높다. 서성거리다 바라 본 하늘에는 파란 하늘이 걸려있다.

하지만 난 오늘도 아침 출근길에 책을 읽는다. 행복을 찾아서다. 일과 관련된 전문서적만을 고집하지 않는다. 나를 살찌우는 일, 세상사 지혜를 배우는 일 또한 내 여유를 더불어 나누는 일, 그곳에 내 마음이 걸려있다. 당장은 파란 하늘이 아닐지라도 내 나이 사십은 그곳으로 향할 것이다. 21세기는 대명사 ‘삶’을 불안하게 만들었고 또한 많은 이들이 감염되어 버렸지만 그 경계에서 내 몸의 무게 중심을 내어준 적은 없다. 이 유혹을 이겨 내는 것, 불혹의 사십을 꿈꾼다. 직장에서의 불안, 공동체 생활에서의 불안, 가정에서의 불안은 나를 시험하는 리트머스일 뿐이고 난 내가 원하는 색으로 물들어 있을 것이다.

벽 너머로 들려오는 소리, 조금만 옆으로 돌아가면 커다란 문이 있고 문지기한테 돈을 쥐어주고 자신을 굽히면 얼마든지 건널 수 있다고. 그래도 모르쇠 해 볼 법 하지 않은가. 불안한 삼십대이기도 하지만 그래서 용감해진 삼십대이기 때문이다. 안다. 이래서 삼십대는 고민스럽다는 것을.

한규현 참여연대 회원, 직장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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