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7년 06월 2007-06-01   93

87년과 나

아찔했던 그 날들, 10여 일 간의 진압 훈련

조룡상 참여연대 회원 galmaegi999@naver.com

1987년 6월, 나는 내 의지와는 무관하게 민주화의 열망을 거스르는 위치에 있었다. 6월 19일, 통상적인 야외훈련 도중 갑자기 부대 복귀 명령이 떨어져 대부분의 부대원들은 의아해했다. 훈련 중 사상자가 발생하지 않는 한 부대로 복귀하는 일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 후 TV 시청도 전면 금지된 상태에서 부대원들 사이에서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제2의 광주사태(당시 명칭)가 서울에서 발생해 진압부대로 출동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주간에는 이한열 열사를 사망케 한 SY44 최루탄 등을 직접 터트리며 시위진압훈련과 진압 도중 발생할 여러 경우에 대한 대처방안 및 생존능력에 대한 교육으로 녹초가 되었고, 야간에는 전쟁, 폭력, 에로 영화 등을 시청하며 정신교육에 숨 쉴 틈도 없었다. 강도 높은 훈련에 처음엔 시위대(부대에서는 폭도라고 부름) 진압군의 역할에 부담을 느끼던 부대원들도 점차 시위대를 향한 극도의 증오심을 나타내기 시작하였다. 한 번은 어느 소속인지는 모르지만 전경들이 우리의 훈련 과정을 참관한 적이 있었는데, 살기어린 우리들의 진압훈련을 보고는 무척 놀라 돌아갔다고 했다.

외국어대와 경희대를 접수하라는 작전계획 하에 훈련이 점점 구체화하면서 출동 디데이가 멀지 않았음을 직감했다.

점점 시간이 흐르면서 거대한 흐름을 멈출 수 없는 일개 사병임에 무기력함을 느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직접 총을 들지 않는 일. 중대장에게 출동에서 제외해 잔류병으로 남게 해달라고 부탁했지만 일언지하에 거절당했다. 시위대와 마주쳐 나와 같은 대학생(시위대에 시민이 참여한 사실은 몰랐다)들을 향해 총을 겨눠야 하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허공에 총을 쏘리라 다짐했다.

29일 새벽, 드디어 선발대가 출동하였다. 본대에 속한 나는 초조함과 불안함 속에서 출동 대기를 하고 있던 중, 갑자기 무장해제 명령이 떨어져 어리둥절하였다. 그리고 그날 저녁 모처럼의 TV 뉴스를 통해 비로소 6.29 소식을 들었다. 더 이상 진압군이 되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감과 함께 불안감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그러나 계속되는 언론의 통제 때문에 6월 항쟁의 진정한 의미를 깨달은 것은 부대를 제대한 뒤였다.

만일 출동명령이 26일에 떨어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지금 생각해도 아찔한 순간이다. 광주항쟁의 진압군처럼 정치군인들의 소모품이 되어 가해자이자 동시에 피해자로 평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 일로부터 20년이 지난 지금 돌이켜보면, 87년 당시 시위대(국민)들의 민주주의 열망과 용기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대척점에 있었던 내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부끄러운지 어찌 말로 다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철부지의 1987년

장동엽 참여연대 신입간사 taijist@pspd.org

한 아이가 있습니다. ‘현대’라는 로고가 선명한 굴착기들을 선두로 온갖 자동차와 오토바이를 탄 아저씨들이 경적을 울리며 도로를 뒤덮고도 모자라 인도까지 가득 매운 모습을 바라보고 있습니다. 결의에 찬 눈빛을 한 아저씨들은 ‘노동3권’, ‘노동해방’이라는 외침과 함께 힘찬 발걸음을 이어갔습니다.

울산에서 자란 제게 1987년은 정말이지 정신없던 한해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물론 1987년이 갖고 있는 역사적 의미는 대학에 들어가면서 제대로 알 수 있었지만, 박정희, 전두환 같은 이들을 대단한 영웅으로 믿었던 초등학생으로서는 당시는 겁을 먹었던 게 사실입니다. 그렇게 많은 중장비들이며 자동차, 오토바이를 한꺼번에 볼 수 있던 것도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던 것 같습니다.

중1 학생이던 1990년 현대자동차 총파업 투쟁 때는 도로가 막혀 버스를 타지 못해 마치 소풍을 가듯 학교 아이들이 줄지어 걸으며 집으로 향하기도 했습니다. 백골단에게 맞아 피투성이로 끌려가던 노동자들이 눈에 들어오기도 했지요.

그날 결국 줄지어 걷던 아이들이 뿔뿔이 흩어지면서 친구와 함께 아저씨들 사이를 가로질러 귀가하다가 헬기에서 무차별적으로 내뿜던 최루탄 때문에 눈물, 콧물에 범벅이 되었던 기억도 나네요. 대학에 들어가서도 이른바 ‘학습’이라는 걸 받아보지는 않았지만, 저 스스로가 우리 사회가 가진 모순들에 둘러싸여 있음을 자각하면서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제가 가야 할 길도 자연스레 정해지게 되었습니다.

올해 민주노총 울산본부를 중심으로 ‘87년 노동자 대투쟁 20주년 기념사업’을 한다고 합니다. 부끄럽지만 1만 원을 내는 추진위원으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돈까스 한 접시에 함박웃음을 흘리던 철부지 어린 아이가 기억하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외치던 시민들과 사람답게 살고 싶다며 노동 3권을 부르짖던 노동자들에게 던져진 숙제가 아직도 산적한데 우리는 너무 쉽게 잊고 살아가는 건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내가 기억하는 1987년

정형기 참여연대 신입간사 hkj1020@pspd.org

87년 나는 초등학교 5학년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뛰어노는 것을 좋아하고 매일 친구들과 어울리길 좋아하는 평범한 그 나이 또래의 개구쟁이였다. 경찰관이셨던 아버지는 매일 바쁘셨던 걸로 기억한다. 나중에 알았지만, 당시 아버지는 대공과에 근무하셨는데, 그곳은 간첩 잡는 곳이었다고 한다.

한 번은 월요일 애국조회로 기억하는데, 영문도 모른 채 상을 받았던 일이다. 교장선생님의 끝날듯하면서도 계속 이어지는 훈시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는데, 한 가지 기분 좋은 일은 연단에 나가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을 받는 것, 시험 성적이 좋아 상을 받거나, 미술대회나 글쓰기 대회 혹은 웅변대회 등에 참가해서 좋은 성적을 거두면, 이름이 호명되고 전교생이 지켜보는 가운데 상을 주었다.

그런데 영문도 모른 채 상을 받은 것이다. ‘반공어린이상’. 그것도 강원도지사가 주는 상이었다. 나 말고도 몇 명이 더 받았던 걸로 기억하는데 군수가 주는 상도 있었다. 상을 받아서 기분은 좋았지만, 왜 내가 그 상을 받았는지 궁금해서 선생님께 물어봤었다. “네가 우리 반에서 목소리가 젤 크니까”라는 대답이었다. 너무도 간단한 선생님의 대답이 어리둥절하긴 했지만, 마냥 좋아서 집에 가서 자랑을 했었다.

지금 생각해 봐도 왜 나에게 그 상을 주었는지 잘 모르겠지만, 그다지 유쾌한 기억은 아닌 것 같다. 당시 민주화항쟁의 물결이 전국을 휩쓸고 있었지만 나는 아무것도 알지 못했고, 내가 사는 동네는 아무 일도 없었고, 우리 아버지는 매일 바빴었다는 것만 기억날 뿐이다.

비판과 투쟁을 넘어 대안 제시할 때

성승택 참여연대 회원 sst8027@hanafos.com

87년 6월, 입사 7년차 직장인(대우중공업 창원공장)이었다. 전두환 정권인 5공화국을 지나 노태우정권으로 이어지는 즉, 군사정권의 연장을 막고 민주화의 열망이 전 국민의 저항으로 나타났던 항쟁이었다.

당시 6월 지방에서는 파업을 통한 시가지의 집회 자체를 경찰로서도 묵인하고 있었다. 난 두 번 정도 투쟁집회에 참여했던 기억이 난다. 무엇보다 당시의 항쟁에 반대를 하는 젊은이는 없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결과적으로 학생들과 지식인들이 함께한 6월 항쟁과 바로 이어졌던 노동자들의 투쟁은 민주화의 과제를 제기하고 군부독재의 종식과 경제성장의 주역들이 그 결실에 대한 정당한 분배를 요구하는 투쟁이었다. 한국사회운동의 큰 획을 긋는 분수령이 된 것 또한 사실이다.

87년에서 부터 20년이 지나는 동안 사회도 그 만큼 변했다. 국민의 권리의식이 높아졌고, 민주화의 완성을 이루기위해서 이제는 비판과 투쟁을 넘어서서 우리가 실현해야 할 각종 이슈에 대한 대안 제시가 요구되는 시점에 와 있는 것이다.

눈물 콧물 범벅의 6월

한재연 참여연대 회원 kitenine@hanmail.net

6월 항쟁이 있던 87년, 난 고등학교 1학년이었습니다. (그 당시에는 그게 6월 항쟁이었는지도 몰랐지만) 6월 항쟁을 이글거리는 저녁노을과 최루탄 가스로 기억하고 있습니다.

돈암동에 학교가 있던 관계로 고려대, 성균관대, 그리고 시내 곳곳에서 터진 최루탄 가스 때문에 수업시간에 교실에 앉아서도 재채기에 눈물범벅이 되기 일쑤였고, 하굣길엔 시위대로 인한 교통통제로 버스가 제 때 오지 않아 역시 매캐한 최루탄 섞인 공기를 호흡하며 바람이 잘 통하지 않는 교복을 입고 뙤약볕 아래서 몇 십 분씩 기다리는 일을 반복했습니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큰집이 명륜동 성균관대 근처, 우리 집은 우이동 4.19 국립묘지 근처여서 집에서도 학교에서도 제사 지내러 큰집 가는 길에서까지, 언제나 눈물, 콧물 범벅이었습니다. 그러니, 데모하는 학생들이 좋게 보일 리가 없죠. 어른들이 하는 말을 들으며 전 뭣도 모르면서 앵무새처럼 대학생들을 욕했습니다.

‘학생들이 말이야. 머리 터지게 공부해서 대학 갔으면 학생으로서, 대한민국의 산업역군으로서 열심히 공부해야지, 길바닥에 나와서 저게 뭐하는 짓이야’ 하면서. 사실은 무슨 일인지도 모르고 그저 이놈에 최루탄 연기 때문에 눈도 제대로 뜰 수가 없다는 투정이었지만요.

아버지는 뉴스나 신문을 뒤적이며 대학생 욕을 하셨지만 옆에 있는 저에게 언제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야, 너도 대학가면 데모 할 거냐? 근데, 절대로 맨 앞에 서면 안 된다. 학생은 공부를 열심히 해야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들으며 저는 대학생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대열에 함께 했습니다.

최루탄을 처음 알게 된 날

박진호 참여연대 회원

중학교 1학년, 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가는 중 이상한 냄새와 함께 눈이 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아저씨들과 머리에 투구를 쓴 사람들이 운동회때 힘겨루기를 하듯 서있었다. 아저씨들은 돌을 던지고 구호를 외쳤다. 주변에 구경하던 아저씨들은 얼른 집에 가라고 손짓을 하셨다. 아마, 20년 전 그날이 6월 항쟁이라 생각된다. 그날은 어린 나에게 콧물과 눈물범벅의 쓰라린 경험을 준 최루탄을 처음 알게 된 날이다.

6월 항쟁은 광장의 정치라 말하고 싶다. 학생과 일반 직장인이 거리로 나와

한 목소리를 낸 것이다. 87년 6월 항쟁 이후 한국사회는 변화에 변화를 거듭했다. 시민의 힘이 두려워 탄압하려 날리던 최루탄은 점차 없어졌지만 여전히 광장의 외침은 남아 있는 듯해 씁쓸하다.

참여사회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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