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1월 2002-01-01   1113

그 힘겨운 이중부정

중국계 미국인인 샤오메이 천은 『옥시덴탈리즘』의 서문에서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이 고백한다. “현대 중국에서의 옥시덴탈리즘 담론은 스스로를 이데올로기적으로 식민지화하기 위해 서양으로부터 도입한 산물도 아니며, 자본주의 체제의 더 불행한 측면들이 자신들의 나라에 수입되기를 바라는 중국인들의 마조히즘적인 소망의 표출도 아니다.”

이런 주장도 있다. “즉, 나는 동양이나 서양에 의해 구성된 동양에 근거를 두고 있는 이항대립적이고 보편주의적인 주장을 거부한다.” 그래서? 옥시덴탈리즘 담론이 기획되고 전유되는 양상, 즉 특정한 담론이 하나의 전략적 ‘전유’의 결과임을 밝혀 보겠다는 것이다.

옥시덴탈리즘을 범박하게 정의하자면, ‘동양에 의해 왜곡된 서양의 표상체계’라고 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이것의 중국적 ‘변형태’를 논의하고 있는데, 이러한 논의는 다른 지역에서도 독특한 방식으로 변용될 수 있을 것 같다. 저자는 중국에서의 옥시덴탈리즘의 형식을 다음과 같이 이분한다.

첫째, ‘관변 옥시덴탈리즘’인데 이는 중국 정부가 자국민을 억압하는 민족주의를 지탱하기 위한 수단으로 서양을 본질주의화하는 것이다. 과연 어떻게? <서양=제국주의=(자본주의)=악>이라는 등식을 만듦으로써. 왜 자본주의에는 괄호를 쳤는가? 기술, 과학으로서의 자본주의는 수용하지만, 가치와 이념으로서의 자본주의는 배격하는 중국적 현실을 표상하기 위해서.

둘째, ‘반(反)관변 옥시덴탈리즘’. 이것은 지식과 교양을 갖춘 중국의 지식인 집단이 강력한 정권에 대항하기 위해 자신들의 권력을 이용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그러나 저자는 이 상이한 옥시덴탈리즘 담론이 칼로 무 자르듯 그렇게 독립적이고 대립적으로 존재한다고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적 상황과 맥락에 따라 제휴하기도 하고 반목하기도 한다는 것이다.

동양에 의해 왜곡된 서양의 표상체계, 옥시덴탈리즘

그렇다면, 관변 옥시덴탈리즘 담론과 반관변 옥시덴탈리즘 담론이 현실 속에서 충돌한 사례로서 우리는 무엇을 들 수 있을까? 아마도 ‘천안문 사태’를 들 수 있을 것이다. 1989년 북경의 천안문 광장에서 벌어진 대학생과 지식인들의 민주화 시위는 결국 인민해방군의 무력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된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때 중국의 대학생들이 미국의 ‘자유의 여신상’ 조각을 들고 시위에 나섰다는 사실. 이들에게 ‘자유의 여신상=미국=반독재=민주주의=선’으로 표상되었다. 정권에 대한 저항담론으로서 반관변 옥시덴탈리즘이 작동되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시 등소평 정권은 어떤 방식으로 이 시위를 제압했을까? 아마도 ‘자유의 여신상=미국=반민족주의=반공산주의=악’이라는 표상체계를 작동시켰을 것이다.

결국 옥시덴탈리즘은 중국 지식인들의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상이한 개념으로 ‘전유’되었다는 것이 저자의 주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중요한 것은 한 담론에 깃들어 있는 정치적 ‘정당성’의 문제가 아니라, 담론의 전략적 ‘전유’가 아닌가. 가령, 위에서 ‘자유의 여신상’을 들고 시위에 참여했던 대학생들의 경우, 그들이 ‘자유의 여신상’을 통해서 보여주려 했던 진정한 의도는 미국적 가치에 대한 승인이기보다는, 등소평 정권에 대한 반발이었다는 식의 저자의 해석도 그래서 가능해진다.

이러한 방식의 담론 해석은 가령 1980년대 중국 지식인들에게 대단히 격렬한 논쟁을 야기한 다큐멘터리 <하상>에 대한 분석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드라마는 황하를 드라마의 중요한 배경으로 하면서, 이른바 반관변 옥시덴탈리즘 담론을 노골적으로 표현한 작품이다. 이 작품 속에서 황하는 유장한 중국문명의 변함없는 전개와 중화주의, 민족 저항의 혁명적 상징으로 묘사되어 온 상례에서 벗어나, “황폐한 모국 땅에서 외롭고 쓸쓸하고 완고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늙은이로 의인화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하상>은 전형적인 민족적 상징들 또한 해체시키는데, 가령 ‘용’과 ‘황토’는 중국 문화의 냉소주의, 편협주의, 보수주의, 폐쇄성, 조상숭배 등을 상징하는 것으로 해석되기도 하는 것이다. 이와 함께, 중국문명의 상징이라 할 ‘만리장성’은 중국을 다른 지역으로부터 철저하게 고립시킨 거대한 ‘비극의 기념비’로 규정되기도 하는 바, 이러한 이미지 연출을 통해서 이 드라마가 궁극적으로 던졌던 충격을 저자는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하상>은 죽어 가고 쇠락해가는 동양을 묘사함으로써 중국 시청자를 불안하게 만들면서, 아울러 젊음, 모험, 에너지, 힘, 기술, 그리고 현대로 대표되는 서양 타자에 대한 열정적인 진술로 시청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다.”

이러한 표면적인 사실만을 염두에 두자면 <하상>은 마치 탈식민주의 중국이 유럽의 초기 문화제국주의를 찬양한 것처럼 보인다. 표면적으로 중국의 문화적 전통을 비하하고, 서구의 문명을 찬양하고 있는 이 작품이, 그런데 당시의 중국 시청자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얻었다.

이 역설의 의미는 무엇일까? 저자에 따르면, 그것은 당시의 지식인과 대중들이 이 드라마를 통해서, 당대 등소평 정권의 획일적인 일당지배 체제에 대한 무의식적 저항을 드러냈다는 것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이러한 옥시덴탈리즘의 반관변 담론을, 지배적인 관변 담론의 한 파벌, 더 정확히는 자오쯔양과 같은 개혁 지향적 당관료가 보수 반대 세력을 공략하기 위한 수단으로도 활용했다는 점이다. 그러니까, 서양이라는 타자의 이미지는 반체제적 지식인들과 정치인들에게 각각 상이한 목적 속에서 동일한 방식으로 전유되었던 셈이다.

서양이라는 타자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식

샤오메이 천은 이러한 방식으로 중국의 현대문학을 종횡무진 분석하면서 옥시덴탈리즘이 당대의 중국인들에게 어떻게 현상되었으며, 특정한 맥락 속에서 어떻게 다양한 방식으로 전유되었는가를 밝히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분석의 결과 샤오메이 천이 내린 결론이란 무엇인가? “그러므로 오리엔탈리즘이나 옥시덴탈리즘은 어떠한 항구적이거나 본질적인 내용도 가지지 않는 행위로 파악되어야만 한다.” 역사는 사라지고 담론만이 남는다. 중요한 것은 진리가 아니라, 그것을 구성해내는 해석적 전유일 뿐이다. 대략 이런 결론이 도출된다.

그래도 문제는 남는다. 첫째, 해석학적 ‘전유’는 누구나 가능하지만, 그것의 보편적 ‘승인’은 해석 외적인 영향력에 종속된다. 둘째, 오리엔탈리즘은 개념의 공격적 ‘전유’지만, 옥시덴탈리즘은 그것의 방어적 ‘전유’이다. 셋째, 개념의 전유는 사후적이지만, 역사는 현재진행형이다. 넷째, 담론은 순수하지만, 현실은 불결하다. 다섯째, 서양에게 동양은 타자지만, 동양에게 서양은 ‘타자화된 나’의 타자이다.

샤오메이 천의 『옥시덴탈리즘』을 읽으면서, 독자들이 겪게 될 정서의 실체는 두 가지일 것 같다. 하나는 아이러니며, 다른 하나는 딜레마다. 그리고 이런 상상이 문득 스칠지도 모르겠다. 이슬람을 ‘호전성’으로 코드화하는 미국의 ‘오리엔탈리즘’과 그 실천으로서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한편으로는 탈레반 원리주의에 저항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미국의 제국주의에 저항해야 될 아프가니스탄 지식인들의 두 겹의 옥시덴탈리즘. 그 힘겨운 이중부정 같은 것.

이명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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