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0월 2002-10-24   1445

이인열전- 박재천 주민운동정보교육원장 ‘가난과 싸우며 가난하게 살다’

“가난을 선택했다고 들었어요. 평생 도시빈민운동만 한 사람. 언젠가 박기홍 신부님이 말하기를, 사회운동이 보람 있다고 생각될 때는 ‘진짜 사람’을 만났을 때인데 오늘 그를 만났다면서 박재천 씨를 소개하더군요. 나도 몇 번 만났는데, 사람 참 좋습디다.”

이금연 안양전진상복지관장의 소개를 들으니 가슴이 뛰었다. 온갖 짝퉁이 판치는 세상에 ‘진짜 사람’을 만난다면 얼마나 향기로울까. 가는 발걸음마다 가을볕이 따라와 온기를 불어 넣어준다. 아마 그도 훈훈한 사람일 게다.

#길음역에서 8번 마을버스를 기다리다.

그가 알려준 대로 사진기자와 낮은 꽃집 앞에서 8번 마을버스를 기다렸다. 낮은 꽃집이라…. 처음엔 꽃가게 이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꽃집은 정말 도로보다 낮은 위치에 있었다. 꽃집의 아가씨도 낮은 곳에, 길쭉한 꽃 해바라기도 낮은 곳에서 환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서울의 유명한 달동네 삼양동으로 진입하는 첫 번째 안내판은 바로 그 낮은 꽃집이다. 버스카드로 320원을 내고 버스에 오르니 곡예가 시작됐다. ‘포도 한바구니 천원’ ‘오뎅 떡볶이 튀김’ ‘닭 팝니다’ 팻말을 스쳐 지나는 풍경엔 80년대 모습이 고스란히 포개진다. 낮은 슬레이트 지붕들 그리고 시멘트벽을 장식한 조용한 낙서….

#보증금 3만 원에 월 5000원.

1973년 한신대에 입학한 박재천 씨는 유신반대 데모에 참가했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4년 그는 2학년 2학기 때 제적당했다. 시골에서 목회활동 하겠다는 청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입학했던 그는 2년 만에 대학에서 쫓겨난 것이다. 기숙사에서 나온 그는 갈 데가 없었다. 고향인 청주에서 농사짓는 아버지가 땅 팔아 대학 등록금 대주셨는데 낙향은 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같이 잘린 5명 중 두 명의 친구들과 함께 값싼 방을 구하러 청계천 마장동 등을 돌아다닐 때였다.

“깜짝! 놀랐어요. 청계천 따라 판잣집이 쭈욱 서 있었어요(그는 이 대목에서 코팅 된 1970년대 청계천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걸 보면서 아, 시골이 급한 게 아니구나 생각했어요. 1970년대 산업화되기 시작하면서 이농현상이 극심해지고 공장을 찾아 ‘서울로’ 돈 벌러 온 사람들의 삶이라는 게 얼마나 형편없던지 이들을 위한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었지요.”

보증금 3만 원에 월 5000원을 내고 마장동시외버스터미널 부근에 위치한 판자촌에 방을 얻었다. 그리곤 둑방교회에서 야학을 하며 판자촌 삶을 시작했다.

“70년대는 박정희 군사독재시절이잖아요. 반공이데올로기로 꽝꽝 뭉친 시대. 뭐만 하면 빨갱이래. 지금처럼 자유롭지 못했어요. 그때 판자집에 살러 오는 사람은 주로 어떤 이들이냐면 시골에서 농사지어봤자 얼마 안 되고, 공장에 취직하면 돈 많이 버는 줄 알고 올라온 시골 사람들이죠. 정작 취업할 공장은 없어 일일노동자로 전락한 산업예비군이라고 불렀어요. 그 사람들이 바로 70년대, 80년대 도시빈민의 모습이지요. 우리는 그때 마치 노동현장에 위장취업해 노동운동을 했던 것처럼 저는 판자촌으로 들어가 빈민운동을 벌인 거예요. 청계천8가, 답십리, 중랑천… 천변을 따라 판잣집에서 야학을 하며 같이 산 거죠. 더 솔직히 표현하면, 교회를 빙자해 운동을 한 거지. 하하. 주민조직화의 좋은 기반이 됐으니까요. 하여간 그때부터 우리는 ‘모든 주민의 모든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구호를 가지고 있었어요. 주민운동가가 끌고 나가는 게 아니라 ‘자치’와 ‘협동’을 강조한 셈이죠. 70년대 도시빈민운동의 특징은 의료봉사활동과 야학 두 축이었어요.”

#생활한복기술자와 살며 사랑하며.

1975년 청계천 철거가 끝나갈 즈음 그는 군에 입대했다. 제대를 앞두고는 이런 고민에 빠졌다. 가난하게 빈민으로 살 것이냐, 아니면 돈 많이 버는 목사가 될 것이냐. 신학을 전공한 그는 군대에서 신앙적으로 이렇게 정리한다.

“사람은 노동의 대가로 먹고사는 것이다. 내 몸을 써서 얻어진 것으로 삶을 유지해 나가는 게 본질이다. 물론 공부를 더 해서 큰 교회의 목사도 되고, 외국 유학도 갈 수 있지만 나는 노동을 해야겠다.”

그는 군 제대 후 자신의 삶의 방향을 다시 확인하고자 1년간 공사판에서 철근을 지고, 질통을 지면서 노가다 생활을 했다. 그리고나서 곧바로 안양천변을 따라 간 청계천 동지들을 찾아 양평동으로 갔다.

당시 청계천 철거가 끝난 뒤 천변에 살다 쫓겨난 사람들은 두 부류로 흩어졌었다. 안양천변을 따라 양평동 문래동에 둥지를 틀거나 삼양동 봉천동 금오·행당동 등 산동네로 들어갔다. 천변을 따라 간 사람들은 광주군 중부면에 자리잡아 나중에 성남시를 탄생시켰으며, 산동네로 간 사람들은 산 속에 ‘불량주택’을 짓고 80년대까지 재개발투쟁을 벌였다.

양평동으로 간 그는 고 제정구 의원 가족, 김영준 자활후견기관협회장, 신명호 도시연구소 연구원 등과 함께 7∼8년간 공동체 생활을 했다. 한솥밥을 같이 먹으며 가난한 사람들의 공동체 만들기를 실현했던 것이다. 물론 불협화음도 많았다. 같이 사는 게 쉬운 문제는 아니니까.

1982년 그는 공동체생활 가운데 결혼했다. 부인은 수녀가 되려던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다. 수녀가 되려던 사람과 목사가 되려던 사람이 만나 운동 속에서 두 딸을 두게 된 것도 양평동에서 집단이주한 시흥시 은행동 ‘보금자리’ 마을에서 집단생활을 할 때였다.

“그때 고민은 이런 거였어요. 모이는 공동체를 할 것이냐, 흩어지는 공동체를 할 것이냐. 모여 사는 완전한 공동체를 지향하는 사람들도 필요하고, 그 정신을 가지고 다른 지역으로 흩어져 사는 공동체도 필요하다는 결론이 난 거죠. 그래서 저는 흩어지는 공동체에 뜻을 두고 행당동으로 갔지요.”

1987년 그는 행당동으로 들어가 주민들과 함께 재개발투쟁을 벌였다. 죽을 수는 있어도 생존권을 빼앗길 수는 없었다. 과격한 투쟁의 과정엔 언제나 용역깡패가 등장했다.

박정희가 70년대 ‘한강의 기적’을 거론하며 도시정비 및 미화를 추진했다면 80년대 전두환은 자본을 대동해 가장 폭력적인 방법으로 산동네 철거를 강행했던 것. 돈 많은 건설회사가 지역개발의 첨병으로 나섰고, 권력과 자본은 한 패가 되어 철거민을 벼랑 끝으로 몰았다. 그때 동원된 용역폭력깡패들의 실상은 지금 나오는 영화처럼 절대로 미화된 ‘조폭’이 아니다. 끔찍한 싹쓸이로 철거투쟁 중 20여 명이 죽었다.

“담벼락에 깔려 죽고, 용역깡패에게 맞아 죽고, 싸우다 실신하고…. 구속자만도 기백 명이 넘었어요. 강제철거는 무수한 사상자를 냈고 가난하지만 따뜻한 삶터는 피비린내 나는 전쟁터로 변했지요. 그래도 우리는 희망을 잃지 않았어요. 삶은 지속되는 거니까. 60년대 만들었던 서민은행처럼 지역운동의 일환으로 ‘경제공동체’와 ‘생활공동체’를 조직했지요. 그래서 탄생한 게 생협과 신협이에요.”

그는 15년간 행당동에서 살고 있다. 13평 임대아파트도 하나 얻었다. 이곳에서 대학 2학년생과 고등학교 2학년생인 두 딸과 함께 살고 있다. ‘보금자리’를 나와 행당동으로 이사 올 때 부부는 약속했다. 반드시 똑같이 노동해서 먹고살기로.

“그런데 난 운동만 했어요. 아내는 지금 논골생산협동조합(논골생협)의 공장장이에요. 요꼬짜는 기술과 미싱도 배웠어요. 지금은 생활한복 기술자지요. 나는 전빈련, 투쟁의 현장만 쫓아다니다가 결국 약속도 못 지키고 이렇게 사네요.”

부부는 처음부터 가난하게 살기로 마음먹었기 때문에 이성적으로 불편을 감내할 수 있겠지만 아이들의 문제는 달랐다. 사춘기의 나이에 가난은 어쩌면 상처일 수 있으리라.

“걔들이 어릴 때부터 집단생활에 익숙했잖아요. 아이들에겐 공동체생활의 추억이 있어요. 꼬마 때 용역깡패가 들이닥치고 철거투쟁 때 싸우는 것 다 보고 자라 그런지 다른 집 애들과 좀 달라요. 엄마가 아이들에게 잘 설명해줬기 때문에 그럴 지도 모르죠. 세상과 삶, 그리고 민중의 이야기를 숨김없이 다 해주는 편이었거든요. 마음속으로야 아빠가 돈 좀 쾅쾅 벌어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겉으로는 운동하는 아빠를 불만스럽게 생각하진 않아요. 후훗. 물론 공부를 잘 한다거나 절대 그렇지 않아. 하하. 생전 과외 같은 건 생각도 못했고, 행당동 공부방만 다녔으니까.”

#빈민운동은 풀뿌리지역운동의 원조.

70년대, 80년대의 빈민운동을 거쳐 90년대와 2000년대 주민운동으로 발전하는 빈민운동의 역사는 90년대 들어 급속히 변화한다. 지역사회의 관심이 고용과 교육, 환경, 건강 문제로 집중되면서 공부방, 탁아소, 유치원 등을 통한 운동의 역량이 배가되고 있고, 국민기초생활보장법 제정 이후로는 자활후견기관 제도가 생겨서 법 혜택도 보게 됐다. 운동의 성과로 자활공동체는 경제적 자립을 위한 방편이 되기도 했다.

90년대에는 지방자치단체의 활성화로 지역 차원의 ‘생활정치운동’이 주요하게 논의됐고, 철거문제도 서울의 경우 ‘구’ 단위로 주민과 함께 풀어가고 있다. 구의회에 주민운동가를 진출시키고 지역주민들이 참여민주주의에 기반한 세력화에 성공하도록 노력하고 있다. 풀뿌리지역운동, 소공동체운동은 70년대 빈민운동의 다른 이름이 된 것이다.

#지천명의 나이.

올해 마흔아홉. 내년이면 지천명의 나이다. 그래서일까. 그는 요즘 주민운동가 양성에 정신없이 바쁘다. 지역주민운동이 활성화되려면 무수한 지역주민운동가가 나와야 하고, 그를 위해서는 끊임없는 교육과 훈련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민운동정보교육원을 만들고 후배양성에 전력투구하고 있다.

30년간 빈민운동의 외길을 걸어온 사람. 그에게 가난은 무엇일까. “poor와 poverty의 차이가 있다고 생각해요. poverty(빈곤)는 신자유주의와 독점재벌에 저항하고 투쟁하는 의미로서의 가난이고, poor(가난)는 정신적 차원에서의 심오한 철학적 가치로 가난하게 사는 삶의 의미를 지닌다고 봐요. 우리는 지금 신자유주의라는 구조적 가난의 문제와 싸워야 하지만, 정말 가난하게 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00평짜리 아파트 살면서 빈곤문제를 외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만일 그 논리에 역행 당하면 결국 자본에게 지배당한다고 봐요. 생각과 삶을 일치시키는 게 중요하지요. 가난한 사람들이 갖는 삶의 운동양식이 있어요. poor들의 community라고나 할까. 혼자서는 할 수 없지만 함께 있으면 많이 할 수 있는 일. 우린 그걸 생활협동조합에서 찾지요. 그러나 생명이 없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에너지가 살아 있어야 기계화되지 않을 수 있죠. 가난과 공동체를 관통하는 개념이 바로 생명입니다. 그래서 저는 21세기 빈민운동(주민운동)의 화두는 가난, 공동체, 생명 이 세 가지라고 생각해요.”

가난하게 사는 건 불편한 것이다. 그러나 그건 편한 게 기준일 때 그렇다. 역으로 편한 건 죽은 것이다. 비생명적이다. 돈만 있으면 움직이지 않아도 되니까. 그러나 가난은 끊임없이 움직여야 한다. 노동하지 않으면 살 수 없다. 그것이 곧 사람을 건강하게 한다. 가난은 늘 깨어 있어야 실천할 수 있는 덕목이다. 또한 매순간 선택해야 한다. 지하철을 탈 것인가, 걸을 것인가…. 내년에 지천명의 나이를 맞이하는 그는 요즘 스스로 화두를 던지고 운동적으로 현실화하려고 한다.

30년 세월동안 도도한 물줄기로 민중의 변화를 가슴으로 깨달았다는 박재천 원장. 그는 언제나 초심을 잃지 않는다. 군대 제대할 때와 똑같은 심정으로 쉰이 다 된 나이에도 최소 일주일 두 번은 육체노동을 한다. 매주 수요일과 토요일 새벽 첫차를 타고 아침 8시부터는 ‘보금자리’마을 소유인 제부도 밭에서 땅을 파고, 포도나무를 심고, 고추 대도 박으며 가지도 심는다. 그러면서 마음 속으로 화두를 던진다. 가난과 싸우며 더욱 가난하게 살려면 어떻게 할 것인가.

장윤선(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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