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11월 2002-10-30   1316

명동 “밝은동네”를 찾아서

숭례문은 서울의 대문이었다. 숭례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은 지금의 남대문로를 따라 소공동 쪽으로 가고, 거기서 다시 북쪽으로 휘어진 길을 통해 종로로 들어가게 되었다. 광통교로 청계천을 건너면 바로 서울의 한복판에 이르게 되었던 것이다.

일제가 조선을 집어삼키면서 숭례문은 그냥 남대문으로 불리게 되었다. 일제는 이 문의 의미를 깎아 내리기 위해 숭례문을 남대문으로 불렀던 것이다. 그러므로 남대문은 우리의 이름이 아니다. 우리는 이 문을 숭례문이라고 불러야 옳다. 그것은 지난 100년 간 온갖 수난을 다 겪으며 그 자리에 서 있는 이 문에 대해 우리가 마땅히 갖춰야 할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숭례문이 당한 수난은 남대문으로 이름이 바뀐 것에 그치지 않았다. 서울의 성곽 중에서 가장 먼저 부서진 것이 바로 숭례문 옆의 성곽이었다. 성곽을 부수고 일제는 찻길을 놓았다. 이렇게 해서 숭례문은 서울의 대문이라는 지위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멀리서 지켜보아야 하는 ‘문화재’가 되었고, 심지어 교통의 장애물이 되어 버렸다. 이렇듯 서울의 근대적 개발사는 숭례문의 수난사와 뒤엉켜 있다.

본래 숭례문 밖은 서울의 3대 시장의 하나였던 ‘칠패시장’이 섰던 곳이다. 성곽이 헐리고 숭례문이 본래의 구실을 못하게 되면서, 숭례문 안쪽에 사람들이 모여들고 시장이 서게 되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의 ‘남대문시장’이 만들어지게 되었다. 지금 이곳은 동대문시장과 함께 서울을 대표하는 시장이다. 전국 각지에서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들 뿐만 아니라 이제는 세계 각지에서도 수많은 상인들이 모여들게 되었다. 사람들은 이곳에서 물건만 사는 것이 아니다. 손과 발로 장단을 맞추며 손님을 불러모으는 모습은 이곳을 대표하는 하나의 풍물이 되기도 했거니와, 사람들은 이곳에서 이런 풍물을 즐기기도 하고 고단하지만 쉬지 않고 이어지는 삶의 모습을 살펴보기도 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곳은 우리의 삶이 그 속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삶의 자리’이다.

네오-바로크 양식건물 제일은행 옛 본점

남대문로를 따라 조금 더 나아가면, 좁은 길이 갑자기 확 넓어진다. 이 넓은 길의 한쪽에는 커다란 분수대가 자리잡고 있고, 그 둘레에는 다른 곳에서 볼 수 없는 유럽풍 건물들이 자리잡고 있다. 남대문시장 쪽 길 곁에 나란히 서 있는 제일은행 옛 본점과 신세계백화점 본점, 그리고 그 맞은편에 서 있는 한국은행 옛 본관 건물이다. 이 건물들과 신세계 백화점 앞의 분수대가 어울려 상당히 이국적인, 아니 서울에서 가장 이국적이라고 해도 좋을 경관을 자아내는 것이다.

이곳에서 가장 유명한 건물은 물론 한국은행 옛 본관일 것이다. 이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가 설계하여 1908년부터 짓기 시작해서 1912년에 다 지은 르네상스 양식의 돌건물이다. 이 건물과 비교될만한 것은 아마 경운궁의 석조전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높은 담장 안에 있고, 이것은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는 길가에 있다. 이 점에서 한국은행 옛 본관은 서울의 경관을 이루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은 이 건물을 보며 서울의 또 다른 모습을 즐기게 된다.

신세계백화점은 한국은행 옛 본관만큼 화려하지는 않지만, 역시 유럽풍으로 지어진 독특한 모습의 돌건물이다. 이 건물은 본래 1930년에 미쓰코시 백화점의 경성지점으로 문을 열었다. 해방 뒤에는 한국인이 운영하는 동화백화점으로 사용되었으며, 1963년에 삼성그룹이 인수해서 고객공모로 신세계백화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이름은 거듭 바뀌었지만, 그 모습은 바뀌지 않았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이제는 고풍스럽다고 해야 할 이 건물의 독특한 모습은 신세계백화점의 훌륭한 자산이기도 하다.

제일은행 옛 본점은 1913년에 국내 건물들 중에서 최초로 국제현상을 통해 설계되어 1933∼1935년에 지어졌다. ‘전면의 석조기둥은 건물외관에 웅장한 멋’을 주고 있으며, ‘영업장 천정의 꽃모양 석고부조는 근대 건축 양식의 걸작이라는 평’을 받고 있고, ‘전체적으로 화려하고 단아한 모양의 비례감을 보여주고 있는 국내 유수의 전형적인 네오-바로크 양식건물’이고, ‘6·25 동란 때에도 피해가 없어 원형이 그대로 보존’된 ‘기념비적 건물’이라고 한다. 한 마디로 말해 멋진 건물이다. 이런 건물을 나는 오랫동안 그저 무심히 지나쳐 다녔다.

신세계백화점 앞 분수대는 꽤나 공을 들여서 만든 것으로 보이지만, 그곳에는 아무런 안내판도 없다. 인터넷에서도 이에 관한 정보를 찾을 수가 없다. 아마도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시절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제 시대에 이곳을 찍은 어떤 사진으로 미루어 보건대, 그곳에 분수대가 들어선 것은 일제 때인 것 같다. 가운데로 큰물줄기가 뿜어 나오도록 하고 그 둘레의 세 방향에 여러 모습의 사람들을 빚어서 세워놓았다. 세종문화회관 뒤의 분수대나 시청 앞의 분수대에 비해 이 분수대는 한껏 모양을 냈다. 동상의 모습은 국회의 그것과 비슷하지만, 그것만큼 선동적이지는 않고 좀더 계몽적으로 보인다. 학생은 열심히 공부하고, 주부는 아이를 잘 기르고, 노동자는 열심히 일하는 모습이다. 각자 자기의 ‘본분’에 맞게 애써서 ‘조국근대화’를 이루자는 뜻을 전하는 것으로 보인다. 둘레의 멋진 건물들에 비해서는 턱없이 볼 품 없는 분수대이지만, 나름대로 이곳의 독특한 경관을 이루는 한 요소이며, 이제는 박정희 시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유물임에 틀림없다.

이곳에 이처럼 여러 볼거리들이 들어서게 된 것은 일제의 유산이다. 일제는 숭례문에서 명동을 지나 충무로로 이어지는 곳을 일본인의 중심적인 주거지이자 유흥지이자 산업지로 만들었던 것이다. 한국은행 옛 본관은 조선은행, 신세계백화점은 미쓰코시 백화점 경성지점, 제일은행 옛 본점은 조선저축은행 본점, 미도파백화점은 조지아백화점이었다. 종로에는 조선 제일의 부자였던 박흥식이 세운 화신백화점이 있었으나, 식민지 시대의 중심지는 종로가 아니라 명동 일대였으며, 그 중에서도 한국은행 둘레는 중핵이었던 곳이다. 그러므로 이곳은 이를테면 ‘식민지 근대화’의 상징거리라고 할만하다.

우리로서는 참으로 불행한 일이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시기와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다. 서구에 비해 분명히 여러모로 불충분하고 심지어 기형적이기는 했지만, 한국의 근대화는 식민지 시기부터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소공동 네거리의 이 독특한 경관은 ‘식민지 근대화’의 직접적인 산물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건물들은 없애버려야만 하는 ‘부정적인 유산’일까? 물론 그렇지 않다. 이 건물들은 두 가지 점에서 우리가 소중하게 지켜야만 하는 역사적 유산이다. 먼저 이 건물들은 그 자체로 식민지 시대를 증거하는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이 건물들을 통해 우리는 일제 시대를 더욱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다. 다음에 이 건물들은 그 자체로 서울의 경관에 특색을 더하는 대단히 중요한 건축적 요소들이다. 이 건물들이 있기에 이곳의 경관은 서울의 다른 어떤 곳보다 독특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곳을 식민지 시대의 모습대로 지킬 수 있었다면, 지금 이곳의 가치는 더욱 더 도드라질 것이다. 그렇게 해서 우리는 식민지 시대를 더욱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고, 서울의 경관을 더욱 다채롭게 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되지 않은 것은 분명히 또 하나의 역사적 불행이다.

이곳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은 중앙우체국이다. 그것은 이곳의 경관을 망치는 주범이다. 그것은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과 전혀 어울리지 못한다. 아니 애초 비교하는 것 자체가 잘못일 정도로 그것은 볼 품 없이 지어진 건물이다. 일제가 그렇게 건물에 공을 들인 까닭은 물론 자신의 권력을 내보이고 천년만년 이 땅을 지배하겠다는 뜻을 밝히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정작 천년만년 이 땅에서 살아갈 우리는 왜 저 정도의 건물밖에 짓지 못했을까? 식민지 시대에 지어진 건물들과 어울리지 못하는 문제를 떠나서 한 나라의 중앙우체국이 저렇게 거칠고 못 생겼다는 것은 그 자체로 문제가 아닐까? 아무리 가난했다고 해도 중앙우체국은 그 상징성을 고려해서 나름대로 멋을 내서 지어야 하지 않았을까? 더 나아가 이미 자리잡고 있는 다른 건물들과 어울리는 것을 고려해야 하지 않았을까?

한국은행 새 본관도 눈에 거슬리기는 마찬가지다. 중앙우체국보다는 훨씬 돈을 많이 들여서 고급스럽게 지은 건물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옛 본관의 뒤에 자리잡은 그 하얀 돌건물은 옛 본관과 잘 어울리지 않는다. 돌로 멋을 내서 짓기는 했지만, 커다란 상자 꼴을 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화려하게 멋을 낸 한국은행 옛 본관 뒤에 우뚝 솟은 흰빛의 커다란 돌상자는 그저 우람해 보일 뿐이다. 공들여 멋을 낸 건물은 아니다. 그것이 들어서면서 한국은행의 멋은 줄어들었고, 이곳의 전체적인 경관도 다소 망가져 버렸다. 그 건물은 이 나라가 잘 살게 되었다는 것을 금방 알게 해 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잘 살게 되었다고 해서 문화적으로도 그렇게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도 그 건물은 금방 알게 해 준다. 이 점에서 한국은행 새 본관은 대단히 교훈적이다.

중앙우체국의 옆으로 난 골목길 끝에는 중국대사관이 자리잡고 있다. 예전에는 중화민국대사관이었다. 이 골목길에는 중국집들이 있는 데, 그 중에는 중국빵을 파는 곳도 있다. 험상궂은 모습으로 들어선 높다란 중앙우체국 건물과 중국집들이 나란히 들어서서 자아내는 모습은 별로 좋지 않다. 중국대사관 옆에는 학교가 자리잡고 있다. ‘한국한성화교소학’과 ‘부속 유치원’이다. 대사관은 중국대사관으로 바뀌었지만, 학교는 여전히 화교들의 것이다. 그 담장에 기대어 중국차를 파는 노점이 들어서 있다. 너비가 한 뼘 남짓한 쇠로 만든 진열장 비슷한 것을 놓고 장사를 한다. 그 모습이 이채롭게 보여 사진을 찍으려니 주인 아줌마가 거칠게 항의한다. 막무가내로 사진을 찍지 말라며 찍은 필름을 내놓으라고까지 한다. 무엇이 이 분의 신경을 이렇듯 날카롭게 했을까?

중국대사관의 담장을 따라 명동의 입구로 가는 골목길이 이어진다. 여기에도 중화민국대사관 시절을 떠올리게 하는 건물이 있다. 소박한 모습의 이 이층 건물에는 ‘삼민주의대동맹 한국지구’, ‘한화교민복무위원회’라는 문패가 달려 있다. 그 맞은편의 높다란 중국대사관의 담장에는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게 자라서 담장을 뒤덮다시피 하고 있다. 그런데 그 곁에는 커다란 전기 시설물 상자들이 여럿 늘어서 있고, 또 그 곁에는 차들을 줄줄이 세워 놓았다. 물론 쓰레기들도 곳곳에 널려 있다. 아마도 대사관의 담장 풍경으로 이보다 더 혼잡하고 지저분한 곳도 없을 것이다.

사라진 코스모스

1970년대에 명동의 입구에는 검은색 건물의 코스모스백화점이 있었다. 이 백화점은 고급화의 흐름을 따라잡지 못하고 망했다. 분명히 명동의 한 상징이었던 검은색 건물도 사라졌고, 최근에는 10∼20대를 겨냥한 ‘아바타’라는 이름의 상가가 들어섰다. 이 상가는 아마도 이곳에서 가장 화려한 건물일 것이다. 그러나 이곳의 분위기와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다. 밖으로 내놓은 큰 확성기에서는 시끄러운 음악이 귀를 때린다. 이정현의 ‘바꿔 바꿔’라는 노래다. 정말이지 이렇게 멋대로 휘두르는 소음폭력이야말로 하루빨리 바꿨으면 좋겠다. 한창 짓고 있던 이 건물을 찍으려다가 건장한 청년들에게 거칠게 제지당했던 일이 예사롭지 않게 떠올랐다.

오랫동안 명동은 이 나라의 상업적 중심지일 뿐만 아니라 문화적 중심지이기도 했다. 그러다가 대학로, 신촌, 홍대 앞, 압구정동 등이 새로운 젊은이의 거리로 떠오르면서 그 세가 많이 약해졌다. 명동의 상인들은 옛 명성을 되찾고자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그런 노력 덕분에 지금은 대한종합금융이 소유하고 있는 옛 국립극장을 극장으로 복원할 수 있게 되었다. 1934년에 바로크 양식의 영화관으로 지어진 이 건물을 다시금 극장으로 사용하게 된 것은 정말 축하할 일이다. 명동의 상인들은 사람들을 모으기 위해 ‘명동축제’를 열고 있기도 하다. 이 때문에 옛 국립극장 앞에는 가설무대를 설치해 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 무대는 보도를 차지하고 들어서 있다. 공연이 끝나도 바로 치우지 않는 것이다.

일제시대에 명동은 ‘명치정’으로 불렸다. 제국주의의 길을 닦은 일왕의 이름을 슬쩍 바꿔서 ‘밝은 동네’라는 뜻으로 고친 것이다. 그러나 지금 명동은 사실 언제나 어두운 곳이다. 높다란 건물들로 둘러싸여 햇빛이 제대로 들지 못하기 때문이다. 밤이 되어 수많은 옷가게들의 휘황한 전깃불이 밝혀져야 명동은 비로소 ‘밝은 동네’가 된다. 언덕 위의 명동성당만이 언제나 햇빛이 드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명동성당에 이르면 어두운 터널을 지나 빛의 땅에 이른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비단 종교의 차원에서만이 아니라 민주화라는 ‘세속’의 차원에서도 이곳은 빛의 땅이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에도 짙은 그늘이 드리워져 있다.

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지닌 명동

을지로입구 역의 명동쪽 출구에 자리잡고 있는 브리지증권의 20층에 오르니 명동이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그 모습은 도무지 문화적 향취를 느낄 수 있는 모습이 아니다. 그저 서울의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난개발의 모습일 뿐이다. 수많은 건물들이 들쭉날쭉 제멋대로 들어서 있다. 한때 이곳에서 가장 멋지고 높다란 건물이었던 유네스코건물은 보이지도 않는다. 그렇게 제멋대로 들어선 건물들 사이로 수많은 사람들이 오가며 물건을 사고 음식을 먹는다. 그 중에는 일본인 관광객을 비롯해 외국인들도 꽤 많다. 압구정동 같은 곳처럼 전깃줄에 휘감기지 않은 곳이고 간판도 상당히 정비되어 있어서 명동은 한결 깨끗하고 정돈된 모습을 보여준다. 그렇기는 하지만 명동은 ‘선진국’의 이름난 상가나 문화지구처럼 아름답거나 멋진 곳은 아니다. 편하고 즐겁게 구경할 수 있는 동네가 아닌 것이다. 지금의 명동은 그 이름처럼 ‘밝은 동네’가 아니다.

그러나 명동은 여전히 돌체다방, 셸부르, 떼아뜨르 추, 삼일로 창고극장 등을 떠올리게 한다. 195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 이어진 문화와 예술의 향취를 명동은 아직 가지고 있다. 어떤 장소의 성격은 생각보다 오랫동안 이어지는 듯하다. 이곳을 선교의 장소나 상업의 장소로 여기는 사람들이 물론 훨씬 더 많겠지만, 문화와 놀이의 장소로 여기는 사람들도 여전히 적지 않다. 최근에는 시읽기 모임이 다시금 열려서 성황을 이루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모임을 아끼고 즐기는 사람들의 노력이 모여서 이곳이 문화적으로 ‘밝은 동네’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한때 이곳에서 젊음의 낭만을 즐겼던 사람들이 이제는 중년의 낭만을 즐길 수 있는 ‘밝은 동네’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여기서 더 나아가 그윽한 중년의 낭만과 치열한 젊음의 낭만이 어우러지는 ‘밝은 동네’가 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렇게 될 수 있다면, 정말로 좋겠다.

홍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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