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2년 09월 2002-09-24   1078

“걸레같은” 아이템을 고집한 까닭

중국 국경지대 탈북자 취재 그 후


웬 탈북자냐고 힐책의 어조로 맨 먼저 질문을 던진 사람은 나의 후배였다. 물론 딱 부러지는 대답을 못했다. 얼마 후 지금 웬 탈북자냐고 한심한 듯 또 질문을 던진 건 내 동기였다. 물론 대답을 잘 못했다. 그 후배는 자신이 이미 탈북자 문제를 방송으로 다뤘는데 더 이상 새로울 것이 없다는 이야기였고, 자타가 공인하는 ‘인권PD’인 내 동기는 그게 2부작이나 할 가치가 있느냐는 거였다. 이를테면 탈북자 문제는 마룻바닥을 훔치다 내버려진 걸레 같은 아이템이랄까? 나는 흔들리기 시작했다.

내 동기나 후배가 고개를 저은 데는 이유가 있다. 한때 각종 언론매체에서는 앞다투어 탈북자들에게 달려갔다. 불과 3~4년 전 북한의 식량난이 극심해지고 먹고 살기 위해 대량 탈북이 이뤄진 때이다. 우리 방송국에서도 목숨을 걸고 국경지대를 누비면서 강을 건너는 탈북자 모습을 소개했다. 그러나 그게 거의 끝이었다.

이후 탈북자 문제는 뉴스가치가 없는 진부한 문제가 되었다. 탈북 이후 그들이 중국 땅에서 어떻게 살아내는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구차하고 비루하겠지만 그냥 살겠구나. 관심을 끌기에 그들은 이미 미흡한 존재였다. 우리 한국인들의 삶도 도도한 뒷물결에 딴죽 걸리고 앞물결에 따귀 얻어맞고 아수라인데 그들이 전부 집단 자살하기 전까지는 감히 거기까지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과장이 있지만, 가끔 공항에서 한국행에 성공한 탈북자들이 웃으며 손 흔드는 모습만 보여주면 됐다. 국민들은 또 몇 명이 왔구나 하고 그저 무심하게 받아들이면 되었고 좀더 관심을 표명한다면 ‘정착금을 너무 많이 주는 것이 아니냐, 저것도 우리가 낸 세금인데 좀 아깝네’ 정도의 의사 표시면 족했다.

이걸 소강상태라 하나 무기력 상태라 하나. 아무튼 우리 전체가 무심한 방관자로 평화롭게 지냈다. 요컨대, 분위기가 이럴진대, 탈북자 문제는 인력과 돈을 투자해서 보여줄 만한 가치 있고 현실적인 소재가 아닌 거였다.

산다는 게 뭔가를 새삼 고민하다

쿵쿠르르 쿵. 약간 거칠게 비행기가 중국 요녕성 연태 공항에 내려앉았다. 곡절 끝에 탈북자 문제를 취재하기로 한 것이다. 이후 나는, 남쪽에서는 태극기로 치마를 두르고 대한민국을 외칠 때 탈북자들과 함께 했다. 안정환이 헤딩슛으로 대한민국을 울릴 때, 탈북자들과 술 한잔 하며 그들의 처지가 속상해 눈물을 찔끔찔끔했다.

붉은 악마가 강이 되고 숲을 이룰 때 목숨으로 강을 건너 제3국으로 오는 그들을 기다리며 가슴이 타들어갔다. ‘꿈은 이루어진다’라는 멋진 말이 남한 하늘을 구름처럼 수놓을 때 낯선 나라, 낯선 땅, 낯선 사람, 낯선 마을에서 짐승처럼 쫓겨다니는 이들의 절망적인 희망 얘기를 들었다.

그리곤 인간이 산다는 게 새삼 뭔가를 고민했다. 나도 산전수전 안다고 마루 훔치고 내버려진 걸레인생도 안다고 믿었는데 그들을 통해 인간 삶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울 수 있나를 고민했다. 한때 이 아이템을 포기할까 생각했던 내가 부끄러웠다.

내가 만난 20살 여자 : 홍화

길림성 연길이었다. 홍화는 숨어 지낸다고 했다. 애티를 못 벗은 홍화는 취재진도 두려워했다. 이미 그녀는 몸을 잃었고 영혼이 말라버렸다. 탈북하다 중국 공안에 잡혀 무려 열 번도 넘게 인신매매 당하고 6개월간 묶인 채 강간당했다. 너무 괴로워 죽으려고 칼로 제 머리를 내리쳤다며 짐승처럼 울었다. 가슴이 먹먹했다. 중국 땅에는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홍화’가 많다고 했다.

내가 만난 9개월 만삭의 아줌마 : 명길 씨

흑룡강성 칠대하였다. 명길 씨는 겁 많은 큰 눈을 가졌다. 그녀도 울었다. 숨어 지내기에 너무 지쳐 그 밤중에 취재진을 따라 중국을 탈출하겠다고 애원했다. 수천 킬로가 넘는 그 멀고 험한 길을 준비 하나 없이 가겠다고 했다. 가다 어느 길가 어느 수풀 속에서 애를 낳아도 좋다고 했다. 밤 10시 그녀를 떼어내고 돌아서며 유행가처럼 눈물이 났다. 그 큰 눈으로 애원하던 임산부 명길 씨에게 나는 해줄 게 없었다.

내가 만난 착한 움집 아저씨 : 범렬 씨

길림성 시골이었다. 단속을 피해 깊은 산 속에 움집을 틀고 사는 범렬 씨는 착했다. 산 속은 새, 뱀과 같은 짐승이 사는 곳이다. 사람이 사는 땅이 아니다. 범렬 씨는 짐승처럼 살고 있었다. 이유는 그가 탈북자라는 것, 잡히면 북한에 끌려가 죽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나와 헤어지며 범렬 씨는 TV도 보고 싶고, 사람들과 어울려 밥도 함께 먹어보고 싶다고 했다. 이것도 사람의 소원이 될 수 있는가? 헤어져 내려오는 산길에 그 착한 목소리와 보잘것없는 소원에 발부리가 채이고 뒷덜미가 잡혔다. 그리고 내리는 비를 몽땅 맞았다. 비를 피할 수도 없었지만 피하는 게 그에게 미안했다.

이들 이외에도 나는 몸을 팔아 사는 옥화, 잡히면 면도칼을 깨물어 죽겠다는 순임 엄마, 꽃제비 생활 끝에 부모 산소도 모른다는 20살 총각 광일이 등 오십여 명의 탈북자들을 만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인간이 아니었다. 인권이 있고, 자유가 있고, 미래가 있고, 희망이 있는 그런, 우리가 아는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

내가 요녕성 연태 공항에 착륙할 때 중국은 탈북자 특별 단속기간이었다. 공안뿐만 아니라 우리로 치면 국정원인 안전국까지 가세해 대대적으로 탈북자 검거에 나서고 있었다. 몇 달 사이 6000여 명이 잡혔다고 했다. 공항, 기차역, 버스터미널뿐만 아니라 탈북자들이 있을 만한 곳이면 시골벽지든 어디든 공안들이 깔려 있었다. 게다가 이른바 기획망명의 배후인 민간단체 도우미들을 잡아 뿌리를 뽑겠다고 혈안이었다.

나도 잡힐 뻔했다. 연길이었다. 밤 11시경 가이드가 잡혔으니 무조건 가장 먼 곳으로 도망치라는 거였다. 말도 못하는 중국 땅에서 밤새 700km를 달려 도망쳤다. 이후 검열을 피해 숙소로 호텔을 들지 못하고 우리식 여인숙과 사우나를 전전했다. 도망자의 삶에 너무 지쳐 나중에는 촬영이고 뭐고 그냥 잡히고 싶었다. 정신적인 공황상태까지 맛본 것이다.

나는 비록 열흘 간의 경험이었지만 또 비록 잡혀도 몇 달 고생하면 풀려나지만 탈북자들은 다르다. 그들은 중국 땅에 지금처럼 있는 한 죽을 때까지 자유 없는 몸으로 쫓겨야 하고, 잡히면 북송돼 대부분 죽음에 이른다. 쫓겨 보니까 이해가 더 됐다. 그들이 얼마나 비참하고 절망적인지.

우리라는 화두

대사관 기획망명의 공과, 난민지위 인정, 난민촌 건설… 이런 문제는 머리 아프면 뒤로 미루자. 그들이 우리 동포라는 것도 낯간지러우면 잠시 잊자. 북한 체제도 접어둬 보자. 하지만 그들도 인간이다. 내가 목격한 바로는 21세기 지구촌에서 가장 비참한 상황에 놓인 인간이다. 우리말에 ‘우리’라는 말이 있다. 그들은 함께 살아야 할 ‘우리’다. ‘우리 인간’이다. 그것만이라도 생각하면 안 될까?

글쓰기 며칠 전 가톨릭 신부인 친구를 만났다. 그날 나는 그 친구를 놀라게 했다. 우린 술을 제법 했다. 아니 주로 내가 마셨다.

친구 : 뭐하고 지냈니?

나 : 중국 다녀왔다.

친구 : 왜?

나 : 탈북자 취재하러.

친구 : 고생했겠구나.

나 : 그렇지 뭐. 그런데 고생보다 난 인생을 다시 보게 됐다. 인간, 어떻게 그렇게 열악한 상황에서 살 수 있는지 동포를 떠나 같은 인간으로 느낀 게 너무 많다. 아! 그 20살짜리 홍화가.

이러며 2명 정도 예를 들다 눈물을 비쳤다. 내가 감정이 여리다. 술탓이기도 하다. 그 친구가 놀랐다. 정말 그 정도냐고. 나는 그들은 인간도 아니라고 했고 그 친구는 더욱 심각해졌다. 꼭 그 프로그램을 보겠다고 했다. 조금만 관심을 갖고 보면 탈북자 문제는 정말 심각하다. 나는 그 친구가 관심을 갖길 바란다.

김철진 MBC스페셜 PD cjkk@imbc.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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