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2월 2001-02-01   1195

폭력적인 사회, 무언의 저항, 그리고 희망 찾기

르포|대구 쪽방 사람들

구타와 학대, 폭력과 사고, 이런 일들이 일상이 되어버린 비인간화된 세상에서 렌즈에 의한 대상화쯤이야 무슨 대수이겠는가? 그가 손짓으로 거부하고,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에겐 이런 폭력이 그다지 대단하진 않을 것이다. 재빠르게 초점을 맞추어 셔터를 누를 참인데 렌즈 안에 있던 얼굴이 금세 렌즈 밖으로 사라진다. 그가 벌떡 일어나 몸짓으로 항의했고, 밀어버릴 기세다.

‘당신도 이게 있어야 해요.’

사진기를 내려놓고 상반신을 일으켜 주민등록증을 들고 격렬하게 다그쳤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최소한 당신이 살아있고, 이 좁은 방안에서 세상 밖으로 나와야 될 것 아니오?’

항의하는 기세로 완강하게 대처했다. 강압적인 몸짓으로 앉으라고 명령했다. 아까와는 전혀 다른 인상으로 돌변한 사람의 기에 주눅이 들었는지 금세 수그러들었다. 아연실색한 건지, 포기했는지, 경계심을 풀었는지 자세를 낮추고 렌즈를 쳐다본다.

이 격렬한 항의와 다소 폭력적인 대처는 말 한마디 없이 이루어졌다. 서로의 목소리는 마음 속에서만 울릴 뿐이었다. 그는 벙어리이고 귀머거리였다. 입을 꼭 다물고 항의를 했고, 역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대처했다.

보호는커녕 약자를 학대하는 사회

서울과 마찬가지로 대구 지역의 쪽방 역시 대구역과 동대구역 주변에 분포되어 있었다. 그러나 쪽방이 밀집되어 게토화되어 있는 서울 지역과 달리 대구는 집들이 산포되어 있다는 것이 특색이다. 대구역에서 도보로 10여 분 거리. 여느 골목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몇 개의 여인숙 간판이 보인다. 이 지역 쪽방 건물은 여인숙이 우세하고, 그 다음이 일반 가정집의 형태이다. 대구노숙자상담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북구로 분류되는 이 지역에 여인숙을 포함한 쪽방 건물은 64개, 방의 수는 333개, 거주자는 300여 명으로 추정되고 있다. 대구지역 전체의 쪽방 건물은 1,000여 개 소에 약 740여 명이 거주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거주자 수로 보았을 때는 북구지역에 가장 많이 거주하고 있다. 거주자들을 성별로 따지면 남성이 86%, 여성이 14%이다.

위에서 언급된 장애인은 대구시 북구 지역, 여인숙에, 거주하는 여성이다. 대부분 쪽방에서 생활하는 여성은 비교적 연령대가 높고 혼자서 생활하고 있다. 이 사람의 경우는 대략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으로 보였는데, 정확하진 않다. 아무도 그가 어디에서 왔는지, 고향이 어디인지, 결혼은 했었는지, 심지어 이름조차 아는 이가 없다. 쪽방 거주자들의 이동이 잦아 그럴 수 있다지만 그는 한 방에서 13년을 살았다.

“예전에 결혼도 했었나봐. 아기도 있었는데 죽었다고 하는 것 같애. 자기가 막 울었다는 시늉을 합디다.”

여인숙 주인인 양복순 씨(58세)가 말했다. 13년 동안 그를 봐온 양씨의 추측이었다. 의사소통이 힘든 그가 유일하게 마음을 터놓는 이도 양씨이다. 그는 지금 방안에 있지만 항상 방문을 꼭 걸어두고 있다. 이미 한두 시간 전에 대구노숙자종합지원상담소 실장인 현시웅 씨와 함께 이 여인숙에 왔었지만 그냥 돌아갔던 터였다. 주인 양복순 씨가 집을 잠시 비운 상태였는데 양씨를 통하진 않고는 그의 방으로 절대 못 들어간다. 문을 열지 않기 때문이다. 왜 그토록 폐쇄적으로 살아갈까?

“저것도 여자라고 지나가면 남자들이 그렇게 못 살게 굴어요. 지나가면 쥐어박기도 하고, 강제로 끌어안기도 하고. 내가 보면 막 뭐라카지. 몇 번이나 그랬는지 몰라예. 그래서 저렇게 항시 문을 꽁꽁 닫아걸고 있어요. 남자들이면 나랑 같이 가는데도 기겁을 해요. 그래서 상담소 직원도 몇 번 왔다가 그냥 갔어요.”

그는 호적도 없다. 아니 이것도 정확치는 않다. 양씨의 추측일 뿐이다. 13년 동안 살아도 친척들이 찾아온 것도, 명절이 되어 그가 어디를 찾아가는 것도 못 봤다. 그래서 어렸을 적 장애를 가진 걸 알게 된 부모가 아이를 버렸을 테고, 그 아이가 절로 컸을 거라는 추측이다. 그는 글씨도 숫자도 모른다. 물론 수화도 모른다. 어떤 누구와도 의사소통이 안 된다.

“몇 년 전에 교통사고를 당했지예. 귀도 안 들리고 하니까 사고를 당하기가 쉽죠. 치료도 보상도 못 받았어요. 한 달을 누워 있었어예. 얼마나 불쌍한지, 쟤 어떻게 좀 안 되겠습니꺼?”

트럭이 파출소 앞에서 그를 치었는데, 병원에는 데려가 주었다. 트럭 운전수는 말 못하는 벙어리인 걸 알게 되자 그냥 도망가 버렸다. 양씨가 한참 뒤에 병원에 당도해 그를 찾았는데, 병실도 아니고 이상한 창고 같은 곳에 그가 있더란 것이다. 침대도 있을 리 없고, 맨바닥에 누워 있는 그를 발견했다고 한다.

“13년을 살아도 하나도 몰라요. 어디 아프다 정도만 알아듣지, 밥 굶기도 예사로 하고, 저렇게 며칠을 방안에만 있기도 하고.”

그는 행상을 나간다. 이쑤시개, 수세미 등 잡화 장사를 하지만 얼마 전부터 어디가 아픈지 주인에게 주사를 맞고 왔다고 팔뚝을 걷어 보이더란다.

주인 양씨와 그의 방으로 가보았다. 잠긴 문을 양씨가 열었고, 그를 마주 대했다. 양씨에게 30대 후반으로 보인다고 했더니 “한 40대는 넘는 줄 알았는데, 못 먹어서 피부가 푸석해서 더 늙어 보였나?”라고 중얼거린다.

주민등록을 내보였다. 그는 보더니 찢어버리는 행동을 취한다. 주민등록이 있었다는 말인가? 의외의 반응이다. 그렇다면 고향도 있고, 부모가 누군지도 안단 말인가?

“나도 잘 몰라요. 그런데 소문으로는 옛날에 창녀촌에서 봤다고들 하는 사람도 있고, 모르지요. 근데 사람들이 그럽디다. 여기선 벙어리 하면 다 알거든요.”

그가 그 당시 매매춘 여성이었다는 것을 확실치 않지만 그의 과거에 대한 유일한 정보이다. 그가 매매춘 지역에서 도망을 나와 이렇게 숨어살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을 것이다.

방안을 둘러보니, 거울에 세 개의 사진이 꽂혀 있다. 하나는 독사진이고, 하나는 어떤 남자와, 하나는 여자와 찍은 사진이다. 그걸 보고 있자니 그가 뭐라 한다.

“저 사진에 있는 저 아가씨도 벙어리였어요. 얘가 여기에 처음 왔을 때는 몇 번 놀러오곤 했는데 꽤 오래 전에 죽었어요.”

그는 그 사진 속의 친구를 가르키며, 엄지손가락을 내보인다. 그게 친구를 뜻한다는 것은 대충 알 수 있었다. 그러다가 양손으로 눈을 막 비비는 행동을 한다. 슬퍼서 울었다는 얘기이다. 그의 유일한 친구, 그와는 어떻게 의사소통을 했는지 알 수 없지만, 이제 없다.

정부의 직업훈련 실질적 도움 안 돼

“어휴, 지금은 앞니가 몽창 다 빠졌어. 밖에서 누가 괴롭혔나봐. 그래도 고집은 있어서 싫은 기색은 하거든. 그러니까 사람을 막 패서, 나중에 경찰이 와서 때린 사람을 데려갔다고 하더만.”

그는 일상적으로 폭력을 경험한다. 그는 이 사회를 거대한 폭력 집단으로 인식하고 있을 것이다. 그 폭력에 너무나 익숙할 것이다. 사회는 폭력을 휘두를 뿐 아니라 그의 존재조차 무시한다. 그는 살아있는 인간이 아니다. 그의 이름을 불러주는 이도, 어디서 왔는지 아는 이도 없다. 이 거대한 폭력 체계 속에서 그가 살아있음이 알려지는 게 순서일 것이다.

양씨는 그가 주민등록증이라도 있으면 생계비와 의료보험 혜택을 받으니까 주민등록의 시급함을 호소했다. 보기가 딱해 동사무소에 직접 찾아가 문의한 적도 있었다. 그리고 수화를 하는 사람에게 데려간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몇 개 단어 정도를 나름대로 만든 손짓의 룰만 있지, 수화를 알아들리가 없었다. 주인 양씨는 조만간 여인숙을 그만 두고 이사를 할 모양이다.

“어이구, 내가 이사가면 저걸 어쩌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어떻게 좀 안되겠습니까?”

쪽방 거주자들 중엔 긴급하게 보호조치가 필요한 사람들이 있다. 이 사람의 경우도 이에 포함되지만 주민등록이 없다는 것 외에 의사소통의 한계로 적절한 조치가 전혀 취해지지 못하고 있다. 하루 방세가 8,000원이지만 그는 현재 그 방값도 제대로 지불하고 있지 못하다. 인심이 후한 주인 덕에 이제까지는 거리노숙을 모면하긴 했지만 언제 거리 노숙자로 전락할지는 알 수 없다.

대구노숙자상담소에서 쪽방 거주자들 100여 명을 무작위로 심층면접한 결과, 거주자들 중 12%가 장애인으로 등록된 상태였다. 미등록된 88% 중에도 실제로 장애를 가지고 있지만 등록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을 거로 예상돼 쪽방 거주자 중 장애인이 상당수 있을 거라 예상된다. 또한 면접조사의 결과를 보면 쪽방 거주자들의 학력 수준은 무학이 21%, 초등학교 졸업이 37%, 중졸이 19%로 무학과 초졸이 58%를 차지한다.

“예전엔 그나마 건설 현장에서 일일 노무자로 일했지만, 지금은 일자리가 없어요. 있더라도 아르바이트하는 젊은 사람들이 많아 이 사람들의 일자리가 창출이 안 되는 거죠.”

노숙자종합지원상담소 현기웅 실장의 말이다.

보고에 따르면 직업 유형도 일용노동 56%, 무직 20%, 노점 10%, 폐품수집 7%로 나타났다. 일용노동도 다수가 건설관련 인부이다. 이것은 전문적인 기술이 없는 저학력층이 할 수 있는 직업의 유형이기도 하다. 비교적 나이가 많은 경우에는 노점상인이나 폐품수집 등을 주로 한다. 이들도 과거에는 주로 일용노동에 종사한 사람들인데 근력이 약화되어 인력시장에서 일자리를 구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정부에서 직업훈련 시킨다고 보조금을 주지만 학원 좋은 일만 시킵니다. 제과제빵학원 같은 덴 정부보조를 받고 하는데, 그게 이런 사람들에게 도움이 안 되거든요. 실업에 대해서 장기적인 접근이 전혀 안 되고 있어요.”

쪽방 거주자들은 왜 이리로 흘러 들어와 빠져나갈 구멍을 찾지 못하고 있는가? 답은 위의 조사 결과를 보면 누구나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저학력층, 노인, 장애인들, 즉 사회적 약자에게 쪽방은 빈곤의 굴레에서 바람막이 역할을 하는 공간이다. 우리 사회처럼 사회안전망이 미비한 사회는 한 개인이나 가정의 몫이 절대적이다. 조사에서도 생활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 있다고 응답한 사람이 24%, 없다가 75%로 나타났다. 쪽방 거주자들 대다수가 가족 없이 혼자 생활하는 것을 감안하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전혀 도움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라고 할 수 있다.

전쟁과 개발독재로 인한 가난의 세습

여인숙이 아닌 일반 주택 형태의 쪽방 생활자를 찾아보았다. 내부구조는 서울 지역과 그리 다를 바 없었다. 어두운 건물에다 경사 90도에 가까운 계단, 다닥다닥 붙은 방들. 눈이 오고, 한파가 밀어닥친 때라 낮임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만나는 것이 가능했다.

한 명이 있기도 좁은 방안에 두 명이 생활하는 경우도 있었다.

“일세 7,000원 내기가 어렵지요. 그래서 좁긴 하지만 둘이 지내면 덜 힘드니까 여기서 둘이 지냅니다.”

그럼에도 이들은 방세가 밀려 있다. 방세를 못 내서 그런지 방바닥이 싸늘했다. 어디선가 구한 매트리스 덕에 바닥의 찬기운을 겨우 피할 수 있는 형편이었다.

“고아원에서 자랐습니다. 지금은 고아원도 많이 나아졌지만 그때는 밥도 제대로 못 먹었지요. 학교도 못 다녔고. 그래서 열 살 되던 해 고아원에서 나왔어요. 이리저리 구걸하러 다니고, 잠은 기차 안에서도 자고 뭐 그렇게 살다보니까 맨날 이렇죠.”

오귀출 씨(52세). 며칠 전에 술을 잔뜩 마신 게 역력했다. 얼굴 한쪽이 완전 상처투성이다.

“이렇게 삽니다. 배운 것도, 가진 것도 없고, 또 돈 생기면 술도 한 잔하고.”

키가 150cm를 웃도는 정도의 체구로 그는 수레를 밀고 폐품수집을 하러 다닌다. 하루에 두 수레를 하면 7,000원. 그러나 이것도 요즘은 사람이 많아 두 수레를 채우기가 힘들다. 더군다나 다리가 불편해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되는 형편이니 하루 종일 걸어다니는 것도 무리라고. 좁은 방안에 그가 직접 쓴 글귀가 눈에 띈다. “하면 된다. 노력” 그가 붓글씨로 썼나본데 “마음을 못 잡고 해서 한 몇 개월 전에 써봤습니다”라며 쑥스러움을 감추지 못한다. 어깨 너머로 글을 배웠다는 그는 한없이 순박한 웃음으로 “열심히 살아야지요”라고 한다.

동거중인 최영식 씨(63세). 그는 시골에서 자랐다. 아버지는 한국전쟁 중 인민군이 내려왔을 때 보급대를 했다고 한다. 낙동강에 시체를 치우러 갔다가 포탄 파편을 맞아 치료도 제대로 못 받고 세상을 떴다. 어머니는 가난을 못 이겨 집을 나갔고, 그의 형제들은 친척집으로, 어디로 다 흩어졌다. 그도 14살의 나이에 대구로 와서 다방의 주방에서 심부름하며 끼니를 해결하고 살았다. 할 줄 아는 게 그것밖에 없어 12년 동안 그 일을 하다가 건설업 일용노동자로도 오랫동안 지냈다. 그러다가 남은 돈을 모아 장사를 하다가 3번이나 망해 현재는 오귀출 씨와 함께 폐품수집을 하고 있다. 오귀출 씨와 최영식 씨의 경우를 통해 “한국의 빈민문제가 전쟁 이후 가난한 결손 가정에서 태어나 정상적인 가족관계 형성과 근로에 의한 재산 형성의 모형을 본 적이 없는” 그래서 “가난과 가난의 형태가 세습된다”(김선민, 한국보건산업진흥원)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더욱이 개발독재는 불균형적인 개발을 지속시켰고, 다시 구조적으로 가난한 이들을 양산해냈다.

오귀출 씨는 쪽방과 노숙을 왔다갔다한다. 이처럼 쪽방 거주자들이 노숙의 경험이 있다고 답한 경우는 60%를 넘는다. 노숙 경험과 시기에 대한 질문에서 대부분이 3년 이내에 노숙을 경험했다고 응답했다.

한국도시연구소의 실태조사에 의하면 거주자들은 쪽방을 궁극적 거처로 생각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소득이 높아지고 일자리가 안정되는 등 경제적으로 나아지면 일반주거지로 옮기겠다고 응답한 비율이 67.3%로 높게 나타났다. 이 수치로 볼 때, 쪽방 거주자들이 쪽방에서 생활하는 것을 스스로 선택했다기보다 경제적인 조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택한 거라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쪽방 거주자 역시 쪽방에서 노숙으로 전락하는 건 가장 피하고 싶은 것 중 하나일 것이다. 또한 시민사회단체들에서도 “반드시 정책적인 개입을 통해서 더 이상의 계층하락을 방지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가장 큰 이유로 “며칠만 길거리에서 잠을 자고, 구걸을 하게 되면 희망을 잃게 돼있다”고 말한다. 즉 거리의 노숙자가 삶의 희망을 완전히 잃고 살아간다면 쪽방 거주민들은 대개 스스로의 생계를 책임지며 살아가려 노력하고 있기 때문이다.

오귀출 씨가 벽에 써놓은 글귀처럼 그들은 여전히 일말의 희망을 끈을 놓지 않고 있다. 전문가들은 쪽방의 문제를 해결 가능한 사안이라고 한다. 우선 다른 계층에 비해 거주민의 수가 그다지 많지 않기 때문이다. 또 대부분의 정책인 기반은 이미 마련되어 있어서 각종 자원을 연계하고 지원하면 우리 사회가 충분히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한다.

오귀출 씨가 벽에 ‘하면 된다’고 쓰고 노력하는 것처럼 우리 또한 사회 울타리 안에 다음과 같은 글귀를 쓰고 실천하면 어떨까?

“다른 사람에게서 희망을 빼앗지 마라. 희망은 그 사람이 가진 전부일지도 모른다.”

윤정은(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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