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1월 2001-11-29   947

안티조선운동을 권해요

배우 권해효

한시간으론 부족했다. MBC 드라마 <사랑을 그대 품안에>에서 동료들에게 장난걸기 좋아하는 백화점 직원으로, 영화 <진짜 사나이>의 과격한 카레이서, 연극 <러브레터>의 모범생 같은 삶을 사는 앤디, SBS 드라마 <은실이>의 깡패, 그리고 최근 KBS 드라마 <동양극장>에서 맡았던 조선 최고의 시나리오 작가였다는 임선규 등으로 다양한 역할을 도맡았던 배우 권해효. 이런 각양각색의 인물들을 소화한 그가 세상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 조금이라도 더 메모하기에는 빠듯한 시간이었다.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꿈꾸며

지난 9월 12일, 그는 77명의 영화인들과 함께 ‘조선일보 반대 선언’에 참여했다. 제작자 겸 배우인 명계남 씨를 빼면 영화배우로는 그 혼자인 셈이다. 이 자리에서 그는 “3년 전 아빠가 된 뒤 이 땅에서 내 아이를 제대로 키울 수 있는가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됐다”며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 수 있는 게 뭘까 생각하다가 참여하게 됐다”고 선언에 나선 이유를 말했다. 그전까지 강준만 교수가 홀로 ‘안티 조선일보 운동’을 하는 것에 대해 공감을 하면서도 머리와 행동은 따로 놀았다는 그는, 이제 한 사회 구성원으로서 공적인 책임을 지고 싶은 마음이란다.

“사회 참여라…. 예전엔 개인적으로 조용히 참여했죠(그는 1997년 민가협이 주최한 ‘일일 감옥체험’ 후 그때부터 지금까지 딱 1번 빼고는 매년 ‘양심수를 위한 시와 노래의 밤’에 함께 하고 있다). 흔히들 우리 어머니들이 말씀하시잖아요. 사회정의나 참여, 이런 건 네가 커서 뭔가 큰 인물이 되면 다 할 수 있다고. 저도 동의했죠. 사실 좀더 나이가 들고 경륜 등이 쌓인 후, 우리 사회를 위해 뭔가 해야 한다고 여겼죠. 그런데 생각을 바꿨어요. ‘지금 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나중엔 여건이 더 어려워지면 영영 못 하고 만다’고 말이에요.”

그가 생각하는 ‘상식이 통하는 사회’란 남과 나를 동일하고 객관적인 잣대로 평가하는 정도다. 그 정도라면 우리 사회에서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합리적으로 판단할 수 있단다. 『조선일보』도 과연 이 잣대에 맞게 보도하고 있는지만 살펴보면 사회적 공기 역할을 제대로 하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들이 정말 자기 생각대로 쓰는 걸까 궁금하다”며 “만약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너무 비관적으로 보인다”며 허허 웃는다.

그는 세칭 386세대다. 1965년생, 한양대 연극영화과 85학번. 이에 대해 그는 “386세대란 시대와 사회에 대해 깊이 알지는 못하면서도 두루 알고 , 직접 겪지는 못했지만 눈으로 보고 들으면서 또 겪어본 세대로 정의하고 싶습니다. 79학번 이전세대와 88학번 이후의 새로운 세대 사이에 낀, 힘든 세대죠. 이런 표현이 어떨까요. 딥퍼플의 음악을 정확히는 몰라요. 그렇지만 형들의 어깨너머로 그들의 음악을 듣고 열광까지는 아니지만 좋아하던 세대…”

그는 최근 드라마 <동양극장> 이야기를 꺼내며 70년 전 조선의 연극을 위해 나름의 고뇌와 활동을 펼친 황철이나 임선규 등의 연극인들이 당시 20대 초반에 불과했던 것을 떠올린다. 오히려 일제시대, 이 땅의 지식인·예술인들은 일찍 어른이 되고 그만큼의 사회적 책임도 느꼈던 것 같다고….

“오늘의 우린 너무 늦게 어른이 됩니다. 지금 우리 사회가 어른보다는 아이로 살게 만드는 것 같아 걱정입니다.”

사회적 책임은 간과하고 생각하기 싫어하며 물질에 의존적인 세대를 가리키는 건 아닐까. 그런 고민을 하는 그에게 30대가 다음 세대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 것 같냐고 물어보았다. 그는 이 땅에서 만연하고 있는 ‘권위주의’문화만큼은 물려주지 않기를 소망한단다. 이것이 혈연, 지연, 학연으로 연결되고 따라서 수평적인 인간관계가 형성되기 어렵다는 걸 잘 알기 때문.

“김대중 대통령에게도 불만이에요. 예전에 독일의 헬무트 콜 수상은 외국에 나갈 때 일반 봉고를 타고 가기도 했답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면 꼭 근엄하고 격식을 차린 사열을 받잖아요. 그런 것이 다 권위주의라고 생각합니다. 인간관계에서도 권위주의는 주로 나이를 통해 나타나는데 그러다 보니까 호형호제하며 자유롭게 의견을 나눌 나이 어린 친구들이 없어요. 그래서 전 집이건 촬영장이건 권위적인 행동은 아예 하지 않으려고 노력하죠.”

한편, 취미가 스포츠 평론인 그는 우리 사회의 문제점으로 월드컵 개최를 지적했다. 한국이 월드컵을 개최하는 건 진정 최고의 축구축제를 먹칠하는 일이라고 한다. 분명 붉은악마나 네티즌에게는 비난받겠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사실 축구를 좋아하지 않고 노래방, 단란주점, 룸싸롱 출입을 더 좋아한다고 비판했다.

“월드컵 경기장 10곳을 건설할 돈이라면 차라리 지역주민들과 어린 학생들이 맘놓고 경기를 할 수 있는 체육관이나 잔디구장을 만드는 것이 더 낫습니다. 아니면 배드민턴 인구가 전국 200만 명을 넘는데 이들을 위한 생활체육시설을 만들면 오히려 지역문화가 건강해질 겁니다."

시민운동도 즐겁게!

그는 시민사회 영역에서 장애인의 인권과 야생동물 보호에 대해 관심이 많다. 특히 장애인 문제는 한국 사회의 비상식이 어느 정도인지 잴 수 있는 척도란다.

“길거리를 가봐요. 이 땅의 장애인들이 보이기나 합니까. 제 개인적으로도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날까 말까 해요. 그들을 위한 시설도 턱없이 부족하고 그들에게 보내는 시선에도 편견이 있기 때문에 장애인들이 거리를 자유롭게 다니지 못하는 겁니다.”

또한 그는 이제 4살 된 딸아이를 절대 동물원에 데리고 가지 않을 생각이다. 동물원이 문명사회에서 가장 야만적인 행위라고 여기는 그는 “가둬놓고 사육시킨 동물들을 아이가 보면 어떤 감동도 받지 않을 것 같다”며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그는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들에게서 용기가 느껴진단다. 시민활동가들의 용기, 그건 부정부패 등에 과감하게 부딪치는 용기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더 윤택할 수 있는 삶을 너무도 쉽게 놔버릴 줄 아는 용기가 바로 그것. 그런데 다른 사람들이 이들을 보고 어떤 정치적인 목적이 있어서 그렇다고 말할 때면 그는 씁쓸한 기분이 든다.

“저는 시민운동가들이 벌이는 활동이 우리의 더 나은 삶의 질을 위한 것이라고 여겨요. 사람들이 왜곡해서 보는 건, 이 땅에서 공익적인 목소리를 제대로 대변하는 운동을 겪어본 경험이 없기 때문이죠. 따라서 아직 신뢰가 쌓이지 않았죠. 외국은 지방 곳곳에 자원활동가들이 많고 변호사들도 무언가 사회에 기여하는 활동을 일상에서 하잖아요. 그런데 이 땅에서는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간혹 시민운동가 가운데 경제적 문제에 봉착해서 나름의 선택을 하면 변질했다고 하는데 이것도 너무 쉽게 손가락질하는 것 같아요.”

그는 연신 ‘이 땅에서’라는 표현을 썼다. 한국 사회가 하도 비관적이어서 그런지 답답한 심정에 그 말부터 먼저 나오는 건 아닐까.

권해효 씨를 붙잡고 이런저런 얘기를 더 하고 싶었지만 허락된 시간이 지났다. 오랜만에 짬을 내 연극 한 편을 보기 위해 떠나려는 그가 시민운동가들에게 들려준 한마디, “시민운동도 즐겁게!”

어느 새 그는 총총걸음으로 멀어지고 있었다.

최경석(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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