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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01년 11월
  • 2001.11.29
  • 643
9·11 테러는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 본 초유의 경악이었다. 그 어떤 할리우드 블록버스터 영화도 보여주지 못한, 인간의 상상력과 첨단 문명이 만들 수 있는 대량학살의 절정을 극명히 보여준 한판이었다. 그 시각 매주 화요일 방송되는 문화방송의 <피디수첩>을 보려고 텔레비전을 켰던 나는 브레이킹 뉴스의 일보는 놓쳤으나, 위용을 자랑하던 세계무역센터의 쌍둥이 빌딩이 하염없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었다. 그 때 내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저 “이럴 수가…” 뿐이었다.

연전에 필자는 결혼 10주년 기념으로 미국 동부를 여행한 적이 있다. 문득 생각해 보니 세계무역센터 앞을 지나 뉴욕만의 부두로 가서 자유의 여신상이 있는 리버티섬을 일주하는 배를 탔던 것 같다. 사람일은 알 수 없는 것이니 만약 사고당일 나 또한 WTC의 언저리에서 얼쩡거렸다면 건물 붕괴후 폭풍에 어떻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때마침 뉴욕의 아침 출근길이었다는데 부지런하기로 유명한 한국 관광객들이 움직였을 시간이니 능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사건 직후의 경악에서 벗어난 지금, 여론은 일단 테러 그 자체는 ‘천인공노할 만행’이라고 규정하면서 그러나 미국의 왜곡된 대 아랍, 대 이슬람 정책이 누적되면서 자초한 자업자득이라는 것에 대체적인 의견이 모아지는 듯하다. 세계의 경찰을 자처하며 온갖 분쟁에 ‘빅브라더’로 개입한 미국이 드디어 상상을 초월하는 방법으로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는 시니컬한 비판이 적지 않았다. 유독 한국에서 그런 여론이 두드러졌던 것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미국과 한국의 숙명적인 관계 때문일 것이다.(38선 획정과 남북 분단, 이승만정권의 수립, 4·19 항쟁, 5·16 군사 쿠데타, 그리고 5·18 항쟁에다 노근리와 매향리에 이르는 한국의 현대사를 생각하면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어찌됐든 미국은 삼척동자라도 예상할 수 있는 보복공격에 나섰다. 26일만에 이루어진 공습은 아프가니스탄을 초토화시키기라도 할 듯 계속되고 있고 미국이 곧 지상군을 투입할 채비다. 하지만 이를 비웃기라도 하듯 탈레반이나 빈 라덴은 건재를 과시하고 있다. 미국은 벌써 빈 라덴을 포착하지 못하는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는 소식도 들린다. 이 공습의 와중에 다수의 아프간 민간인이 사망하는 일이 수시로 발생하고 있다. “들리는 것은 총소리에 울음뿐인 생지옥”이라는 참담한 상황, 스무살 엄마가 미사일 공격에 아들을 잃고 병원으로 실려 갔다는 보도는 심금을 울린다. ‘피에는 피’로 보복하는 미국의 대 테러 전쟁이 계획되고 시작되려 할 때 뜻 있는 사람들이 우려한 대로 사태가 전개되고 있다. 9·11 테러 결과 미국의 심장부에서 무고한 사람들이 7000여 명이나 죽어나갔는데 비하면 그 정도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해야 할 것인가. 하지만 지금까지 미국의 아랍과 이슬람에 대한 군사적, 외교적 공격으로 무수한 사람이 죽은 것은 또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초일류강대국 미국이 퍼붓는 공습 앞에 무력할 줄 알았던 탈레반과 빈 라덴측이 세균전 테러로 대항하는 모양이다(그러나 이 탄저병 테러가 탈레반이나 빈 라덴의 소행이라는 명백한 증거는 아직 발견되지 않았다). 점점 확대되고 있는 ‘백색가루의 테러’로 미국은 패닉(공황)상태에 빠졌다. 이 끝없는 대결은 어디까지 갈 것인가. 인류는 ‘만인에 대한 만인의투쟁’으로 뒤덮였던 그 시절로 돌아가는 것인가. 이 와중에 혹시 고래 싸움에 등터진 새우 신세가 될까 싶어 당분간 비행기도 못 타고 전전긍긍하는 우리네 신세는 대관절 무엇인가. CNN방송을 그대로 생중계하는 우리 방송의 업보라고 할 것인가. 혹은 미국의 눈치만 보아야 하는 한국현대사의 자승자박인가. 우리편이 아니면 적으로 간주하겠다던 부시의 엄포가 불현듯 생각난다.

정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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