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1366

텅 비어 신성한, 사직단

지난 11월 11일은 노동자대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그리고 그 날은 문화연대 공간환경위원회가 2000년 11월에 시작해 만 1년 간 펼친 ‘서울 대탐사’가 일단락되는 날이기도 했다. 여의도에 수많은 노동자들이 모여 신자유주의에 맞설 의지를 다지는 그 시간에 수는 많지 않은, 그러나 답사를 하기에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종문화회관 앞에 모였다. 서울을 ‘살고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한 작지만 소중한 실천이 그렇게 또 시작되었고 마무리되었다.

건너편의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 주위에는 자동소총을 옆구리에 찬 우리의 젊은 전경들이 순찰을 돌고 있었다. 세종로는 이 답사기를 쓰기 시작했던 1년 전과 다름없이, 아니 그때보다 훨씬 더 심한 ‘감시의 거리’가 되어 있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넓고 크다는 태평양을 건너고 다시 아메리카 대륙을 건너야 만날 수 있는 동네, 뉴욕에서 일어난 참사가 이곳에도 결코 작다고 할 수 없는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실감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아프리카에서 나비가 날개짓을 하면 뉴욕에 태풍이 일어난다더니, 뉴욕에서 참사가 일어나면 서울이 온통 중무장을 해야 하는 모양이다.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은 서울에서 가장 신성한 곳인지도 모른다.

무슨 공연이 있었는지, 세종문화회관 앞에는 사람들이 많았다. 나비 넥타이를 매고 양복을 멋지게 차려입은 청년들이 많이 보였다. 서양식 정장을 차려입지 않으면 들여보내지 않는다는 ‘클래식 공연’이라도 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세종문화회관에서 그 옆의 공원으로 넘어가는 샛길 입구에 검은색의 고급 승용차들이 잇달아 멈춰 섰다. 정말 대단한 공연을 하는가 보다 생각했다. 그런데 뜻밖에도 그 승용차들을 모는 사람은 머리를 파르스름하게 깎은 스님들이고 내리는 사람들도 스님들이었다. 해괴한 일이로다. 모든 것을 버리고, 마침내 자신마저 버려야 할 스님들이 어찌된 일이란 말인가.

역사를 갈아엎고 들어선 개발

세종문화회관 옆에는 작은 공원이 자리잡고 있다. 서울을 좀더 살 만한 곳으로 만들려는 노력의 소산이리라. 거기에는 작은 노천 공연장도 있다. 그러나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으나 이곳에서 어떤 공연이 열렸다는 이야기는 아직 듣지 못했다. 하긴 이곳에서 공연이 열린다면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건너편의 아메리카합중국 대사관이 불안할 것이고, 또 한국 최고의 공연장임을 자랑하는 세종문화회관이 불편하지 않겠는가.

그저 지나다니는 내외국인들이 서울의 한복판에 이런 공원이 있고, 게다가 공연장도 있다고 생각하는 것으로 충분할 것이다. 이곳에 공원과 공연장을 만든 사람들은 정말 그런 생각을 했던 것이 아닐까. 몇 명의 전경들만이 이 자리의 여유를 온몸으로 만끽하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아도 가는 게 국방부 시계인데, 이렇게 한가하니 시간이 얼마나 잘 갈까. 이렇게라도 이용될 수 있다니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부종합청사 별관 쪽으로 난 길을 따라 조금 더 가다보니 요상하게 생긴 바윗돌이 눈에 띄었다. ‘주요한’이라는 사람의 시비였다. 이 사람이 누구던가. 오래 전에 배웠던 국어 교과서를 애써 떠올려본다. 이 나라 최초의 자유시를 쓴 사람, 일본 혼에 대비되는 조선 혼을 강조하는 서정시를 쓴 사람. 이런 시력(詩歷)에 어울리게 그는 3·1운동에 참여하기도 했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일하기도 했다. 그러나 뒤에 그는 변절해 친일문인이 되었다.

그는 마쓰무라 고이치(松村紘一)로 창씨개명했는데, 고이치(紘一)란 일본 제국주의의 이념인 ‘팔굉일우(八紘一宇)’에서 따온 것이다. 이 세상을 온통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아래 두겠다는 이념에서 자신의 이름을 따왔던 것이다. 이런 자의 시비가 한국을 대표하는 거리라는 세종로 한켠에 떡 하니 서 있는 것이다. 참으로 웃기는 나라요, 환멸스러운 도시가 아닐 수 없다. 일본 우익들을 위한 관광코스로 개발할 것을 서울시에 적극 권고하는 바이다.

정부종합청사는 과천으로, 대전으로 이전하는 계획을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는데, 왜 아직도 이곳에 커다란 널판대기를 세워놓은 듯한 모습으로 남아 있어야 하는 걸까.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 옆에 별관까지 세우게 되는 걸까. 세종로 공원은 이 별관의 정원으로 사용되리라. 친일 시인의 시비는 또 얼마나 괴이한 모습인가. 돌을 그라인더로 갈아내는 것도 모자라 쪼개고 그 사이에 시비를 끼워 놓았다. 건축가 정기용 선생은 이 꼴을 보고, ‘돌이 아프다고 한다’고 일침을 놓는다. 자연을 학대하고 고문하면서 자연미를 찾는다는, 이 어처구니없는 미학도 사실은 일본식이 아니던가.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우리의 세금은 이런 식으로 낭비되고 있다.

마무리공사가 한창인 정부종합청사 별관 옆으로 조금 내려가면 얼마 전에 새로 지은 거창한 돌 건물을 만나게 된다. 백 년 전에 지은 건물을 완전히 깨부수고 들어선 감리교회다. 나름대로 멋을 내기는 했지만 이곳이 백년이나 묵은 교회 자리라는 사실은 어디서도 찾아볼 수 없다. 전국의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파괴적 개발이 이곳에서도 이루어졌던 것이다. 그것도 남이 시켜서 강제로 한 것이 아니라 그 교회가 스스로 그렇게 한 것이다.

자기 역사를 자기가 없애는 어처구니없는 파괴의 현장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해서 들어선 새 교회의 모습은 성전이라기보다는 그냥 성이거나 더 심하게 말하면 감옥으로 보인다. 지독히 폐쇄적인 모습이다. 모름지기 교회라면 누구나 쉽게 찾아들 수 있는 곳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그러나 이곳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무서운 곳으로 보인다. 세상 모든 사람들을 지극한 사랑으로 보살펴야 할 곳이 교회 아닌가. 아무래도 내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너무 많은 것 같다.

빛 바랜 ‘경희궁의 아침’

세종문화회관 주변 동네인 도렴동이며 내수동 일대에서는 안 그래도 ‘역사 바로 없애기’가 한창이다. 낡은 한옥촌을 완전히 밀어 없애고 고층 아파트 단지들을 들이고 있는 것이다. ‘경희궁의 아침’이라는 희한한 이름으로 진행되는 공사뿐 아니라 나름대로 멋진 이름을 내건 여러 건의 비슷한 아파트 공사가 경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밤마다 알록달록한 모습으로 피어나는 세종문화회관 뒤편은 지금 온통 소란스런 대규모 공사장이다. 이 동네의 풍경은 경희궁의 옛날 돌담을 경계로 확연히 달라진다. 아파트 공사는 이 돌담의 바깥쪽, 그러니까 세종문화회관에 가까운 쪽에서 진행되고 있다. 낡은 한옥촌은 이곳에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는 손수레를 끌고 노점을 벌여 삶을 이어가는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이제 아파트가 지어지면서 한옥촌이 사라지고, 그 한옥촌이 자리잡았던 원래의 땅이 사라지고, 그리고 그곳에서 힘겹지만 꿋꿋하게 살아가던 사람들이 사라지게 되었다.

이에 비해 돌담의 안쪽인 신문로동은 너무도 평안한 모습이다. 새문안길 쪽에서 보자면, 건축가 김중업이 지은 낯설어 보이는 건물로부터 시작되는 이 돌담 안쪽 동네의 모습은 조용하고 잘 정리된 모습이다. 오래 전부터 이곳은 서울의 부촌이었다. 일제는 경희궁을 멋대로 부수고 이곳에 그 관료들이 살 주택가를 꾸며 놓았다. 그리고 그 옆에는 일제에 봉사할 인력을 기르기 위한 고등학교를 지어 놓기도 했다. 이런 동네가 해방 뒤에도 이 나라의 부촌으로 자리잡았던 것이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로 대표되는 친일파가 지배해왔던 우리의 현대사를 이곳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이 부촌에는 이제는 제법 알려진 문화시설이 자리잡고 있다. ‘성곡미술관’이 그것이다.

‘성곡’은 공화당의 자금줄 노릇을 했던 쌍용의 창업주 김성곤이라는 사람의 호이다. 이 사람이 살던 집을 고쳐서 1990년대 중반에 미술관으로 만든 것이 ‘성곡미술관’이다. 삼성이 창업주인 이병철의 호를 따서 ‘호암미술관’을 연 것과 같은 방식이다. 이 미술관의 뒷동산에 오르면 경희궁의 옛날 돌담을 만날 수 있다. 조금 높은 곳이라 이곳에서는 돌담 바깥 동네가 굽어보인다. 바로 그 아래에 ‘경희궁의 아침’이 지어지고 있다.

그러니까 ‘경희궁의 아침’은 차라리 ‘성곡미술관의 아침’이라고 해야 더 정확할 것이다. 도심 한복판, 그것도 경희궁이나 ‘성곡미술관’과 같은 문화공간의 바로 옆에 고층 아파트가 지어지는 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가난한 동네는 없어져야 할 곳이고, 가난한 사람들은 쫓겨나야 하는 존재인 이 상황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성곡미술관’을 지나 조금 더 나아가면 다시 한옥 동네를 만나게 된다. 이곳에도 어김없이 재개발 바람이 불었다. 길목마다 ‘경축 재개발 승인’의 현수막이 날리고 있다. 현수막만으로 보면, 완전히 ‘경사났네 경사났어’ 분위기다. 이런 파괴적 개발이 과연 경사일까. 오랫동안 몸을 누이고 살아왔던 동네가 완전히 사라지는 것인데, 경사일 수 있을까. 아파트를 없애고 옛 동네를 복원하는 것을 경축하는 현수막 따위는 정녕 볼 수 없는 것일까. 그나마 서울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던 도심 속의 한옥촌들이 빠르게 사라지고 있다. 그 자리에는 고층 아파트 아니면 고층 사무용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다. 이렇게 해서 서울은 사라지고 있는 것이다.

길 저편의 인왕산 아래는 이미 어둠의 자락이 드리워졌다. 거기에 서울에서 가장 신성한 곳, 사직단이 자리잡고 있다. 길을 건너야 하는데, 지하도밖에 없다. 이 길은 지하도가 아니면 건널 수 없는 것이다. 길 저편은 ‘근린공원’인데, 지하도를 통하지 않고는 저편으로 갈 수 없다. 노약자들은 어떻게 하나. 장애인들은 어떻게 하나. ‘자동차가 왕’인 서울의 면목을 다시금 확인하며 지하도를 건넌다. 마침 한 할머니가 한 걸음 한 걸음 힘겹게 옮기며 지하도 계단을 오르고 있다.

안국동에서 그런 것처럼, 혜화동에서 그런 것처럼, 서울의 모든 곳에서 지하도나 육교를 없앨 수는 없는 것일까. 세종로를 횡단보도로 건널 수 있게 된다면, 세종로의 의미며 구실이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라지지 않을까. 거창하게 무엇인가를 새롭게 세우는 것보다 이런 식의 변화가 서울을 더욱 ‘살고싶은 도시’로 바꾸는 초석이 되는 것은 아닐까.

사직단은 서울에서 가장 불행한 곳이다. 가장 신성한 곳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그런 대접을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은 저녁의 어스름이 잘 어울린다. 조선은 중국의 의례를 따라 정궁인 경복궁의 왼쪽에 종묘를 들이고 그 오른쪽에 이 사직단을 들였다. 이른바 ‘좌묘우사’의 원리이다. 종묘가 ‘세계문화유산’으로까지 지정받고 보호받는 것에 비하면, 사직단은 너무나 홀대받고 엉망으로 망가져 있다.

종묘는 도심 속의 유일한 숲이 있는 곳이고 그 건물이 조선 사대부의 미학을 아주 잘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렇게 대접을 받아야 마땅하다. 그러나 종묘는 상징적 의미로만 따지자면, 전주 이씨 화수회에서나 귀중히 여길 곳이다. 그에 비하자면 사직단은 그 상징적 의미가 훨씬 더 크고 넓은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 걸맞는 대접을 전혀 못 받고 있다. 왜 이렇게 됐을까.

잊혀진 성전 사직단을 되살리자

사직단은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요컨대 그곳은 생명의 기원을 생각하는 곳이다. 그러므로 사직단은 서울에서 가장 신성한 곳이다. 지금처럼 사람들이 땅을 온통 투기의 대상으로만 여기는 상황에서 사직단의 가치는 더 두드러진다. 세계무역기구의 협상에 따라 우리 농업이 조만간 완전한 파탄지경에 이를 것이 분명해지고 있는 지금, 곡식의 귀중한 가치와 의미를 생각하게 하는 사직단의 가치는 더 두드러진다.

그러나 사직단은 지금 너무도 초라하고 볼품 없는 모습으로 어둠 속에 잠겨 있다. 사직단으로 들어가는 정문과 사직단 사이에는 조그만 운동장이 있다. 정문과 단이 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다. 원구단 자리에 조선호텔이 들어선 것만큼이나 어처구니없고 잘못된 일이 아닐 수 없다. 그 뒤에는 훨씬 더 큰 운동장이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그 운동장에는 두 개의 커다란 동상이 서 있다. 어찌된 영문인지 모르겠지만, 하나는 이율곡이고 다른 하나는 신사임당이다. 무슨 이유로 이곳에 두 사람의 동상을 세운 것일까. 전혀 어울리지 않는 곳에 두 분은 서 있다. 그렇게 서서 초라하게 망가진 사직단을 보며 두 분은 무슨 생각을 하실까.

어쩌면 사직단이라는 이름마저도 이미 오래 전에 잊혀진 것인지 모른다. 동네 사람들조차 사직단보다는 사직공원이라는 일제식 이름에 익숙하다. 일제의 ‘조선 혼 말살정책’에 따라 이 신성한 곳이 공원으로 바뀌었던 것이다. 물론 이곳을 공원으로 이용하지 못할 이유는 없다. 그러나 그렇더라도 그 의미는 지키며 공원으로 이용했어야 했다. 물론 일제야 그런 의미를 염두에 두었을 리가 없다.

아니, 그것을 염두에 두고 일부러 초라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일제는 서울의 본래 모습을 파괴하기 시작한 장본인이다. 그런 일제에게 땅의 가치와 의미를 되새겨보는 의례가 펼쳐지는 이곳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것은 너무도 분명하다. 우리의 해방이 진정한 해방이 되기 위해서는 일제가 저지른 이런 식의 문화적 파괴를 복원하는 일이 오래 전에 이루어졌어야 했다.

사직단은 두개의 단으로 이루어져 있다. 하나는 토지의 신을, 다른 하나는 곡식의 신을 모시는 곳이다. 홍살문 사이로 보이는 그 단은 놀랍게도 텅 빈 모습이다. 네모난 모양으로 몇 층의 돌을 쌓아 올리고 그 위는 그저 텅 빈 채로 내버려 둔 것이다. 우리의 생명은 본래 이렇게 텅 빈 곳에서 온 것이다. 빈 곳을 그냥 두지 못하고 어떻게든 건물을 지어서 돈을 벌려는 세태로 보자면, 이곳보다 더 이상하고 괴이한 곳은 아마도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생명은 본래 이렇게 텅 빈 것이다. 우리는 빈 손으로 와서 빈 손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빈 곳에서 와서 빈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서울이 ‘살고싶지 않은 도시’인 까닭은 무엇보다 우선 높고 큰 건물들이 산이고 들이고 가리지 않고 들어선 도시이기 때문이다. 이곳을 ‘살고싶은 도시’로 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를 사직단은 잘 보여준다. 생명의 근원인 ‘텅 비어 신성한’ 곳을 서울은 절실히 필요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직공원을 사직단으로 되돌리는 일을 지금 바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이 일은 이곳을 시민들이 자유롭게 이용할 수 있는 방식으로 진행되어야 한다. 사직단에서 시민들은 타락한 종교가 가르쳐주지 못하는 공간의 신성함을 온몸으로 깨치게 될 것이다.

홍성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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