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878

한국전쟁 51년, 아물지 않는 상흔 민간인 학살

죽음의 사이렌 소리

통행금지가 있던 70년대 이전에 살았던 사람들은 사이렌 소리에 대한 기억을 갖고 있을 것이다. 사이렌은 통금이 시작되는 자정과 통금이 해제되는 시간에 거리에 울려퍼졌다. 그것은 이제 집으로 돌아가지 않고 거리에 나돌아다니는 사람은 잡아가겠다는, 기분 나쁘고도 엄한 명령이었다. 우리는 그때 술을 마시거나 친구를 만나 늦게 있다가도 집이나 여관으로 들어가려고 종종걸음치거나 뜀박질을 했다. 어디선가 호루라기 소리도 들려오고 누군가 나를 잡으러 오는 듯한 느낌도 들었다. 이 사이렌은 비상시에도 가끔 울렸다. 필자의 기억으로는 80년대 초 이웅평 북한 소령인가, 중공기인가가 우리 국경 안으로 들어왔던 일요일 낮에도 울렸던 것 같다. 그 때 우리는 국가 비상사태가 터진 것이 아닌가 한껏 마음 졸였다. 그 시절 사이렌은 우리의 사지를 얼어붙게 만들었던 신호였으며, 너희들의 몸을 우리가 관리한다는 국가의 명령 그 자체였다.

지난 8월 9일 부산·경남지역 피학살자 유가족들과 현장 생존자들을 만나면서 나는 사이렌에 대한 공포가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를 처음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일제 말에도, 미군 공습 시에 사이렌이 울렸다는 것은 어른들로부터 들어서 알고 있었지만, 한국전쟁 당시에는 사이렌이 생명을 구하라는 소리가 아니라 생명을 바치라는 소리, 멀쩡한 사람의 목숨을 부르는 지옥 사자의 소리였다는 끔찍한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한국전쟁 당시 각 경찰서에 설치된 사이렌은 보도연맹원을 소집하여 총살하거나 수장하기 위한 동원 명령이었다. 경남·거제지역의 피학살자 유족 한 사람은 당시 지서의 급사로 일하면서 사이렌 울리는 일을 했는데, 자기 형을 죽음으로 보내는 줄도 모르고 사이렌을 울렸다는 가슴 아픈 이야기를 했다.

보도연맹원 학살은 국가범죄행위

보도연맹원 학살은 한국 현대사 최대의 미결 과제다. 그들에 대한 처형은 가장 심각한 공권력 남용이자 일종의 국가범죄행위에 속한다. 그렇기 때문에 국가는 그 사건의 진실이 드러나지 않도록 온갖 방법을 썼다. 일전에 사망한 보도연맹 창안자 오제도 변호사는 죽을 때까지 이에 대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내무부 장관 지휘 아래 수십만 명의 좌익전향자들을 조직하고, 그들을 시시때때로 동원하여 교육하다가 전쟁이 터지자 재판 한번 없이 처형해버린 이 엄청난 사건이 어디에도 기록돼 있지 않다는 사실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그러나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법이다. 이제 카펫 아래 감추어진 진실은 카펫을 적시고 우리가 앉은 자리까지 스며들어 오고 있다.

부산·경남지역 생존자와 유가족들의 증언을 종합하면 보도연맹이 좌익 성향의 인물들로 이루어졌다는 통설 역시 근거가 없다는 점이 분명히 드러났다. 서울에서는 보도연맹에 적극적인 좌익 동조자가 많이 포함되어 있었는지 모르지만, 지방에서는 삐라 한번 주운 사람, 지서에 한 번 불려간 경력이 있는 사람, 빨치산의 강요에 의해 그들의 짐을 한번 날라준 적이 있는 사람, 좌익활동하는 친구를 둔 사람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오히려 보도연맹은 말단 행정부처에서는 그것에 들지 않으면 곤란을 당할 수도 있는 관변조직이 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이승만정부에 찍히지 않기 위해, 농사철에 관으로부터 비료를 타기 위해, 동네 이장으로 위에서 할당한 수 를 채우기 위해, 지방 유지이니까 등등의 이유로 자발적으로 보도연맹에 가입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보리를 몇 말 팔아 이장에게 갖다주고 보도연맹에 가입시켜 달라고 애걸하는 이들까지 있었다. 또 이장들은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사람들에게 도장 한번 찍으면 된다고 설득하여 많은 무지렁이 농민들을 가입시키기도 했다.

다시 말해 파시즘적 상호통제와 집단 동원이 목적이었다는 것이다. 하기야 적극적인 좌익인사들이 이미 월북을 했거나 투옥된 마당에 자의반 타의반 가입한 이들 보도연맹원들에게 사상 교육을 한다는 것 자체가 무의미한 일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이제 정부의 품에 들어갔으니 안심이라고 생각했던 이들에게 이승만정부는 총을 겨누었다.

인륜을 짓밟은 추악한 전쟁

1950년 7월 중순, 전쟁이 터졌는지조차 정확히 알지 못한 채 살아가던 저 남도 사람들의 귀에 사이렌 소리가 들렸다. 앞서 언급한, 당시 거제도의 어느 지서 급사였던 증언자의 말에 따르면 사이렌이 울린 지 5분도 안 돼 동네 보도연맹원 30명이 곧바로 모여들었다고 한다. 무서운 동원력이었다. 동원의 속도는 권력에 대한 공포감과 비례하는 것이겠지만, 그 정도로 연맹원들이 자주 동원됐다는 말도 된다. 이들은 모두 15리 떨어진 거제경찰서로 향했다. 급사는 의사였던 형이 마침 이웃 동네에 왕진을 가 사이렌 신호가 울린 뒤에도 지서에 오지 않자, 형을 찾아 나섰다. 그는 형을 발견하자 빨리 지서로 가라고 소리치면서 가방을 받았다. 형은 흰 가운을 벗지도 못한 채 지서로 달려갔고, 곧 거제경찰서에 합류하였다고 한다. 그것으로 급사는 형과 영원히 이별했다. 형은 다른 보도연맹원들과 함께 거제 앞바다에 포승으로 두 손이 묶인 채 수장되었을 것이다. 경찰과 헌병들은 이들을 배에 싣고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 곶감처럼 엮인 보도연맹원들을 물 속으로 밀어 넣었다. 허우적대는 사람들은 카빈총으로 사살되었다. 이렇게 수백, 수천의 연맹원들이 무참히 죽어갔다.

그런데 모든 보도연맹원이 이렇게 죽은 것은 아니었다. 경찰서에서도 선별작업을 했는데, 사상과 행적을 바탕으로 분류하기도 했지만, 더 중요한 기준은 돈이었다. 소를 팔고 밭을 팔아서라도 돈을 마련할 수 있었던 사람들은 죽음의 대열에서 빠졌다. 지식과 언변이 있어서 자신을 효과적으로 변명할 수 있었던 사람들도 총살자 명단에서 빠졌다. 잘못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고 사이렌 소리에 순응했던 사람들만이 죽음의 길로 들어섰다. 빨갱이가 된 것이 죄가 아니라 돈 없는 것, 무식한 것, 약지 못한 것이 죄였다. 빨갱이 활동을 하고서도 이후 면서기를 했으면 살았다. 빨갱이라도 두목질을 했으면 살았고, 근처에서 얼쩡거리거나 구경갔던 사람들은 죽었다.

일각에서 생각하는 것과는 달리, 전쟁에서 생과 사를 가른 것은 이념이 아니었다. 한국정부가 보도연맹과 관련된 사실들을 은폐한 것 이상으로 중요한 사실은, 국가폭력이 권력부패와 맞물려 돌아가고 있었다는 점이다. 전쟁통에 부모를 잃은, 「실록 보도연맹」이라는 책을 쓴 안제(가명)라는 사람은 “관이 민족 고유의 양속인 선린(善隣)의 풍속을 뭉개버린 주범이 되었다. 민족사가 만연한 불신풍조로 오염되는 시점이 이 때부터라고 생각한다”고 증언한다.

한국전쟁은 이데올로기의 전쟁만이 아니었다. 다른 면에서 보면 부역자 처단이라는 명분 아래 국가가 공권력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고, 사람 사이의 신뢰를 파괴하며, 인륜을 짓밟은 추악한 전쟁이었다. 돈 없고 무식한 사람이 마구잡이로 처형되고, 남은 가족들의 한이 반세기에 걸쳐 산천을 울린 이 땅에 우리가 살고 있다.

독자들이여, 내가 지금 50년 전 과거 일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김동춘 성공회대 NGO학과 교수·참여연대 정책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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