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09월 2001-09-01   931

우리는 군대를 가지 않아도 되나?

20여만명 사실상 대체복무…군거부자까지 확대 필요

군사적으로 볼 때 우리보다 훨씬 중국으로부터의 위협이 큰 나라, 타이완. 그러나 타이완은 아시아 최초로 대체복무제도를 실시했고, 톡톡히 효과를 거두고 있다. 타이완의 경험을 통해 한국에서의 대체복무제도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편집자 주

군사적인 면에서 볼 때 타이완이 중국으로부터 받는 위협은 우리가 이북으로부터 받는 위협보다 훨씬 심각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무엇이 타이완에서 대체복무제도를 가능하게 하였을까? 타이완에 머무는 동안 이 문제는 내 머리 속을 떠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리 참관단의 일원이었던 동성애자인권연대 임태훈 대표가 타이완의 동성애인권운동가들을 만나면서 받아 온 소책자는 나를 놀라게 했다. 『동성애자를 알자 – 당신의 가족, 당신의 친구』라는 제목으로 동성애 운동의 상징인 여섯 색깔 무지개로 곱게 단장된 이 책자의 발행기관은 타이페이시 민정국이었다. 서문은 마잉조우(馬英九) 시장이 썼는데, 그 부제는 ‘시장은 동성애자를 사랑한다’였다.

마잉조우는 1998년 12월 타이페이 시장 선거에서 국민당 후보로 출마하여 현재 총통으로 있는 첸수이펜 시장을 큰 표차로 꺾었다. 법무장관 시절 호랑이든 파리든 걸리면 모두 엄정히 처벌하여 부패척결의 기수로 명성을 얻은 마잉조우는 훤칠한 키에 준수한 외모, 그리고 하버드대 박사라는 요소를 더하여 정치인으로서는 드물게 오빠 부대를 몰고 다니는 사람이다. 차기 또는 차차기 총통으로 유력시되는 그런 유력자가 동성애자를 위한 소책자를 펴냈다는 사실은, 동성애자 홈페이지를 음란사이트로 몰아 폐쇄하려는 나라에서 온 우리에게는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동성애자교사연맹이나 동성애자교회가 활동하고 있고, 수십 편의 동성애 영화가 만들어졌으며, 동성애자 간의 결혼식이 거행되는 나라 타이완. 이렇게 소수자의 인권이 보호받고 있기에 대체복무제도를 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실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닐까?

타이완 민주화의 폭과 깊이

동성애 문제와 관련해 한 가지 흥미 있는 것은 타이완에서 동성애자를 가리키는 말이 ‘동지(同志)’라는 것이다. 보수파들이 혁명의 시대는 끝났다고 주장하는 오늘, 동성애자들은 동지라는 말로 무장하고 쑨웬의 얼굴 뒷면을 여섯 색깔 무지개로 장식하고는 그의 유언을 외친다. “동지여, 혁명은 끝나지 않았다. 계속 노력하라!”

타이완과 우리나라는 여러 모로 비슷한 점이 많다. 외형상으로는 우리가 먼저 정권교체를 이루었다. 그러나 우리 사회는 정권은 빼앗겼지만 사회의 헤게모니는 놓치지 않은 수구세력이 자신들의 기준에 어긋나는 사람들을 제거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데 타이완의 외성인들은 본토로 돌아갈 꿈이 깨지면서 이 곳에 뼈를 묻어야 한다는 것을 자각했고, 그 과정에서 본지인들과 더불어 살아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의 민주화가 투쟁으로 일관된 것이었다면, 타이완의 민주화에는 투쟁과 더불어 변화하는 상황에 대한 옛 지배세력의 자기변신이 있었다. “타이완이 아시아에서 제일 민주화된 나라는 아닐지라도 제일 먼저 대체복무제도를 도입할 수 있었던 것은 영광”이라는 왕수에펑(王雪峰) 의원의 지적에서 그 영광의 절반은 수구반동이 아니라 세상의 변화에 자기를 맞추려는 보수세력의 것이 아닐까? 민주화가 필연적인 것을 용인하고, 어떤 것이 국가에 이익이 되는가를 생각하는 구 지배층의 실리적 태도는 이 제도가 국가적 합의와 축복 속에서 시행될 수 있는 요인으로 작용했다.

타이완에서 대체복무제도는 비록 민진당이 집권한 이후에 실시되었지만, 실제로 법안의 통과와 행정적인 모든 준비는 국민당 시절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동성애자를 공개적으로 지지하고 나선 마잉조우 시장도 국민당 소속이다. 커밍아웃을 한 홍석천 씨의 국회 출석 자체를 거부한 한국의 정치풍토와 너무나 뚜렷하게 대비되는 대목이 아닐 수 없다.

타이완과 한국, 대체복무의 가능성

타이완과는 달리 한국에서 대체복무제도에 관한 관심은 여호와의 증인 젊은이 1300여 명이 그들의 양심에 따른 병역거부 때문에 수감되어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면서 시작되었다. 한국의 인권운동은 주로 고문, 투옥, 불법연행 등 정치적 권리의 문제를 중심으로 진행되다가 노동권 등 사회적 권리로 확대되었고, 아주 최근에와서야 소수자의 인권 문제에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양심적 병역거부자들에 대해 시민사회가 뒤늦게나마 관심을 갖게 된 것은 다행스런 일이지만, 아직도 인권운동가들이 반성해야 할 점이 있다. 이들은 유엔이나 국제적 기준에서 볼 때 틀림없는 양심범이지만, 인권단체들은 아직 이들을 양심범으로 분류하고 있지 않다. 양심의 명령에 따른 1300여 명의 젊은이들이 옥에 갇혀 있는 나라에 인권대통령은 있을 수 없고, 그런 나라가 인권국가가 될 수도 없다.

여호와의 증인 문제를 중심으로 대체복무제도가 논의되기 시작한 것은, 이들의 절박한 사정 때문에 사회적 관심을 빨리 모을 수 있었다는 효과를 가져왔지만, 또 한편으로 이 제도에 대한 논의가 특정집단에게만 혜택을 주는 문제인 것처럼 보이게 만든 부정적인 효과를 가져오기도 했다. 유럽이나 타이완에서 시행되고 있는 대체복무제도는 사회복지의 향상과 군대 자체의 개선, 그리고 개인 인권의 향상을 가져온다는 점에서 어떤 특정집단만이 아니라 사회 전체에 이익을 가져다 주는 제도이다. 우리 사회에서도 이 제도가 도입되려면 이런 인식의 전환이 이루어져야 한다.

병영국가였던 타이완에서 정부 당국이 대체복무제도를 수용한 것은 60만에서 45만 이하로 감군을 실현하였기 때문이다. 12억 인구의 중국을 상대로 하는 인구 2300만의 타이완이 병력으로는 중국과 경쟁할 수 없으며, 군당국도 병력을 줄이는 대신 장비를 현대화하는 것이 국방력의 향상에 훨씬 더 유리하다는 점을 깨달았기에 이 같은 변화가 가능했다.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한국의 경우 감군은 아직 논의의 대상이 되지 않았다. 부시 행정부의 등장 이후 남북의 화해 분위기에 찬물이 끼얹어졌으나, 앞으로 남북 긴장완화에 따른 감군과 국방비 절감은 피할 수 없는 추세일 것이다. 또 군 내부, 특히 해군과 공군에는 병력 감축을 지지하는 세력이 많이 있다. 그러나 일반 사병들의 봉급이 월 30∼40만 원에 달하는 타이완과는 달리, 한국의 경우 사병들의 봉급이 월 평균 1만 원 이하로 터무니없이 낮기 때문에 병력감축에 따른 국방비 절감 효과가 타이완에 비해 크게 낮다는 점이 문제이다. 또 현재 매년 20만 이상의 청년들이 군대에 간다는 사실은, 한국의 실업률을 크게 낮추는 효과를 내고 있다는 점도 경제관료들이 감군에 소극적으로 나올 수 있는 요인이 될 것이다.

반면 한국의 경우 이미 산업기능요원이 약 5만5000명, 전문연구요원이 약 1만5000명, 공익근무요원이 5만5000명, 공중보건의 1000여 명 등으로 거의 13만에 달하며, 여기에 의무경찰, 상근예비역 등을 더하면 20만에 가까운 수가 현역이 아닌 직역에서 사실상의 대체복무를 하고 있다. 이는 대체복무제도를 당장 실시한다 하더라도 병력 수급에 별다른 지장이 초래되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단, 대체복무제도가 병역기피의 수단이 되지 않도록 각종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

대체복무제도가 완벽한 제도일 수는 없으나, 병역비리, 병역제도의 불공평성, 양심적 병역 거부자들의 투옥, 극히 낮은 사회복지 수준 등 많은 문제들을 해결하는 데 큰 기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체복무제도에 대한 논의는 한국사회에서 이제 시작이며, 이 제도가 한국사회에 도입되기 위해서는 아직도 넘어야 할 산이 많이 있다. 그러나 시민단체들이 뜻을 모으고, 군 당국을 비롯한 정부가 사회복지와 남북관계의 진전에 따른 군축과 개인의 인권보장에 대해서 전향적으로 사고한다면 이 제도의 도입이 결코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베트남전진실위원회 집행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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