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847

미디어를 위한 변명

‘미디어 테러리즘’을 화두로 하는 토론회가 있었다. 어찌하다 보니 천학비재한 필자가 그 말석에 앉게 되었다. 이 토론회에서 미디어의 폭력성에 관한 성토가 줄을 이었다. 미디어는 ‘진리 독점’으로 진리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며, 미디어가 개입하지 않은 부분은 용납하지 않는 ‘문화 독점’을 통하여 일체의 저항에 대해 폭력을 행사하며, 보이는 것의 집착을 통해 현실에서 폭력을 행사하며, 힘의 논리에 의해 왜곡된 현실을 재현함으로써 소수자들에 대해 폭력을 행사한다….

걸프전과 9·11테러 보도에서 보듯 폭력적 영상의 반복을 통해 전쟁을 사이버게임 수준으로 만들고 폭력에 대한 불감증을 조장한다. 산골소녀 영자의 사연이 방송에 나온 이후 그 가족의 참담한 상황을 보라. 미디어에 의한 무수한 폐해와 역기능을 보라, 그리고 그 피해자들을 보라…. 토론자들은 가히 융단폭격을 가한다. 말씀인즉슨 구구절절 옳은 이야기이고 평소에 내가 익히 생각하던 부분이기도 하다. 유구무언일 밖에 없다.

그런데 미디어 종사자들을 미디어 테러리스트로 부르고 모든 미디어를 테러리즘의 시한폭탄으로 몰고 가는 것엔 적이 반발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한 사람의 미디어 종사자일 뿐 미디어 정책 결정권자도 아니요, 미디어 조직의 책임자도 아니건만 자신의 직업적 근거가 송두리째 매도당하는 것엔 자존심의 방어기제가 발동될 수밖에 없었던 것일까.

테러리스트라고 하면 그것이 옳고 그름을 떠나서 적어도 자신이 믿는 신념체계를 실천하고자 하는 확신범이다. 그렇다면 과연 미디어 종사자들이 그러한가. 지금 지적된 미디어의 여러 폭력성은 미디어의 기능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빚어진 어떤 부산물로 그저 미디어의 역기능 또는 부작용이라고 말하면 충분하다.

이 세상의 어느 미디어 종사자가 폭력적 역기능 그 자체를 달성할 것을 목적으로 미디어를 사용하겠는가. 미디어의 부작용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적어도 그것은 목적이 아니라 의도하지 않은 결과이고, 이는 종사자의 부주의나 무지에서 오는 실수(error 즉 terror가 아닌 error)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미디어 종사자를 테러리스트라고 모는 것은 언어의 테러가 아닌가.

미디어가 그러할 정도로 폭력성을 행사하는 것은 그만큼 힘이 있기 때문이다. 그 힘과 권위는 누가 가져다 주었는가. 그것은 바로 수용자다. 미디어가 자신을 극대화해 나가는 회로에는 독자나 시청자들의 수용이라는 중요한 단계가 있다. 수용자들은 미디어에 열렬히 반응하고 스스로 즐기며 미디어를 적극적으로 그리워한다. 그들은 미디어의 정체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럼에도 미디어를 동경하며 때로는 이에 편승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디어는 더욱 큰 힘을 확인하고 재충전한다. 미디어가 테러리즘이라면 수용자도 그 회로 안에 들어와 있다.

수용자의 책임 부분을 배제한 채 모든 미디어 종사자를 우범시하는 것은 결코 문제해결에 도움되지 않는다. 미디어의 폭력성이나 역기능은 우리 시대에 미디어가 미디어로 작동하는 한 피할 수 없는 속성인지도 모른다.

마치 필자가 이 세상 모든 미디어 종사자의 대변자가 된 양 열변을 토했다. 말을 하다보니 자못 논리가 그럴듯(?)하여 자아도취에 빠져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런데 무언가 허전했다. 미디어의 폭력성 논의에 수용자의 책임을 걸고 들어가는 물귀신작전을 쓴 셈인데 그런다고 문제가 해결될 일인가. 미디어가 테러라는 논의에, 그것은 테러가 아니라 에러라고 빠져 나갔지만 결국 작금의 미디어가 에러임을 자수한 꼴이다. 테러리스트를 피하려고 스스로 서툰 목수, 어설픈 광대 노릇을 자인한 셈이니 영 입맛이 쓰다. 이제 무엇을 할 것인가….

정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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