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2월 2002-12-01   563

21세기 노동운동의 키워드 “비정규직”

한국통신 계약직, 캐리어 사내하청, 레미콘 운송기사, 린나이 서비스기사, 인사이트코리아 소속 파견근로자들, 보험모집인, 골프장 경기보조원, 방송사 비정규직…. 이들은 모두 비정규직으로 올 한 해 노동운동 현장을 뜨겁게 달구었던 노동자들이다.

김유선 한국노동사회연구소 부소장이 지난 8월 통계청의 ‘경제활동인구조사 부가조사’를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비정규직은 전체 임금노동자의 55.7%인 737만 명이다. 비정규직의 59.2%는 법정노동시간인 주당 44시간보다 훨씬 많은 시간을 일하고 있다.

또 월 평균 100만 원 이하의 임금을 받는 사람도 74.7%에 이른다. 이뿐 아니라 사회보험 혜택은 19∼22%만 받고 있고, 퇴직금·시간외수당·상여금은 10∼14%만 받고 있다. 이처럼 열악한 근로조건에서 일하면서도 평균 근속년수는 정규직(7.6년)의 1/4 수준인 1.8년으로 늘 고용불안에 시달려온 비정규직 노동자들이 하나둘씩 노조를 만들고 노동조건을 개선하는 싸움에 나서기 시작했다.

자발적인 조직화, 그러나 험난한 길

87년 노동자대투쟁 이후 정부와 자본은 전통적인 제조업-대기업-남성-정규직 중심 전투적 노동운동에 대항해 고용을 유연화하면서 정규 노동자와 비정규 노동자를 분리해 노동자계급 내 계층분화를 촉진시켰다. 특히 97년 IMF 경제위기를 계기로 대규모 정리해고와 정규직의 비정규직화가 이뤄졌는가 하면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임금·노동조건이 급격하게 악화됐다. 99년 들어 통계청의 공식 자료로도 비정규직은 전체 노동자의 절반을 넘어설 만큼(51.7%) 늘어나게 되었다.

기존 노동운동은 자본의 합리화 전략과 정부의 규제완화 정책에 적극 대처하지 못하고 기득권 방어에만 급급해 늘어나는 저임금 하청노동자들의 문제를 도외시했다는 비판을 면할 수 없게 됐다. 또한 미조직·주변부 노동자와의 연대를 소홀히 함으로써 자본의 노동시장 분리정책을 고착시키는 데 일조했다. 오히려 ‘노동조합’과 ‘파업’의 무풍지대로 여겨졌던 비정규 노동자들이 서서히 조직화의 주체로 떠오르면서 정부와 자본의 논리에 대항하는 투쟁을 벌이고 있다. 유난히 장기투쟁 사업장이 많았던 올 한 해 비정규직 투쟁의 특징은 우선, 여전히 ‘기업별 복수노조 금지조항’ 때문에 노조를 만들 때부터 어려움을 겪고 있다는 점이다.

워커힐호텔 식당에 근무하는 계약직노동자들로 이뤄진 명월관노조는 99년 11월 노조 설립신고를 낸 이래 무려 2년 동안 노조 인정을 위한 투쟁을 벌이고 있다. 정규직노조인 워커힐노조와 조직대상이 중복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워커힐노조는 계약직노동자들까지 조직대상으로 하고 있지만 사실상 이들의 노조가입을 거부하고 있다.

한국통신 계약직노조는 정규직 노조(한국통신노조)로부터 가입을 거부당한 뒤 6개월여 만에 계약직들의 독자노조 설립이 가능하도록 정규직 노조가 규약을 변경함으로써 합법성을 얻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올 2월 노사정위에서 ‘기업단위 복수노조 금지 5년 연장’을 합의했고 관련법도 개정됐기 때문에 기업단위 복수노조 설립 금지는 앞으로도 여전히 비정규직 조직화의 걸림돌이 될 것으로 보인다.

전면부정당하는 노동3권

둘째로 법·제도의 미비와 행정감독의 부재에 따른 폐해가 막심하다는 점이다. 도급계약 형식을 띠었지만 실제로는 파견근로자를 사용해온 (주)캐리어나 (주)SK, 대한송유관공사 등은 노동부로부터 불법파견 판정을 받았다. 그러나 2년 이상 근속자를 직접 고용하라는 시정명령을 받고도 이를 이행하지 않았다.

(주)캐리어가 하청노조의 끈질긴 투쟁의 성과로 사업주가 구속된 이후 2년 이상 캐리어에서 근무해 온 하청노동자 100여 명을 정규직으로 채용한 것이 전부다. 더욱이 중앙노동위원회는 지난 10월 ‘인사이트코리아’라는 도급업체를 통해 실질적으로 파견노동자를 사용해 온 SK가 ‘불법파견’을 사용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파견근로를 해 온 노동자 3명에 대해서는 파견대상업무가 아닌 일을 했다는 이유로 SK의 직접 고용의무가 없다고 판정했다.

노동부 장관이 지난 9월 국정감사에서 “불법파견이더라도 2년 이상 고용된 노동자들은 사용업체가 직접 고용해야 한다”고 한 답변은 휴지 조각이 되어버렸다. 또한 레미콘 운송기사들로 이뤄진 건설운송노조는 노조설립신고필증을 교부받고, 노동위원회나 법원으로부터도 적법한 노조로 인정받았지만 노조를 인정할 수 없다는 사용자들의 횡포 때문에 170여 일 동안 노조인정투쟁을 벌여야 했다.

셋째, 정규직 노조와의 갈등이 짧은 시간 안에 극복하기 힘들 만큼 깊고, 상급단체의 조정능력도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는 캐리어 사내하청 투쟁사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하청노조가 결성되어 파업을 하자 정규직 노조는 ‘하청노조가 정규직들의 일자리를 뺏는다’는 악의적인 내용으로 정규직 조합원들을 선동하고, 하청노조원들은 물론 중재하러 온 상급단체 간부들까지 폭행했다.

한통 계약직 노조는 7000명 전원 계약해지에 맞서 1년 가까이 싸우고 있지만, 한국통신 노조는 이들을 받아들이지도 않으면서 계약직의 독자노조 설립을 지연시키는면서 기금 한푼도 지원하지 않은 방법으로 그들을 철저히 외면해 왔다. 하지만 비정규 투쟁의 발목을 잡는 정규직 노조의 이기주의에 대해 상급단체인 민주노총과 각 연맹들은 중재하려는 ‘노력’만 했을 뿐 문제를 본질적으로 해결하는 데 아직 역부족이다.

21세기 핵심의제는 비정규직

‘정규직’과 ‘비정규직’이라는 자본의 노동시장 분리전략과 정규직 노조의 외면, 법 제도적 보호장치의 미비라는 3중고에 시달리고 있는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투쟁은 이런 이유로 길어질 수밖에 없다. 투쟁방식도 집회나 항의방문에 그치지 않고 전화국 점거나 여의도공원 장기농성, 전 조합원 단식, 지방노동청 점거, 국회의사당 점거 등 극한적인 방식이 동원되고 있다.

비정규직노동자들의 투쟁은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우리 사회의 극심한 불평등 구조와 사회적 배제를 극복하는 운동이라는 점에서 단순히 노동문제를 넘어 21세기 우리 사회의 핵심 의제로 부각되고 있다. 이는 20세기 노동운동의 주류인 제조업-대기업-정규직-남성 중심의 운동에서 벗어나 공공서비스-소기업-비정규직-여성이라는 새로운 주체를 내세우면서, 성장주의 대신 지속가능한 발전을 추구하는 운동이라는 의미에서 더욱 그렇다.

그러나 비정규직 노동자투쟁을 새로운 노동운동, 새로운 사회운동의 가능성으로 실현하기 위해서는 자발적인 비정규직의 조직화투쟁과 더불어 기존 정규직 중심 노동운동이 극복해야 할 과제들이 많이 있다.

무엇보다 비정규직 문제를 기존 노동운동 내에서 함께 풀어가기 위한 교육 강화와 조직화, 투쟁지원을 위한 인력·재정의 확보가 시급하다. 또한 노사정위 비정규 특위에만 맡겨진 듯한 비정규관련 노동법 개정에 더욱 적극적으로 나서 기간제 근로의 사유제한, 단시간 근로자에 대한 근로조건 개선, 불법파견 근절 및 간접고용 확산에 따른 사용자 책임 확대등 법적 보호장치를 서둘러 마련해야 할 것이다.

더불어 올해 양대 노총과 비정규공대위가 함께 한 최저임금 인상 노력 및 위반사업장 고발 캠페인과 같은 사업을 확대해 비정규 노동문제를 사회적 관심사로 끌어올리고 해결하려는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다.

이정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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