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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01년 11월
  • 2001.11.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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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극의 땅 캄보디아를 처음 방문한 것은 1982년 5월. 그 후 1999년까지 필자는 매년 세 차례 이상 캄보디아를 찾았다. 스위스 제네바에 본부를 둔 WCC(세계교회협의회)의 아시아국장이 된 게 1982년 2월 26일. 아직 일에 적응도 못한 채 첫번째로 출장 간 곳이 캄보디아였다. 장 클라버(Jean Clavour)라는 프랑스 신부가 책임자로서 운영하고 있는 WCC 아시아국 캄보디아 사무실을 방문하는 길이었다. 이 사무실은 1979년 이후 캄보디아, 베트남, 라오스에 대한 미국과 서방 강대국들의 경제제재로 인해 배고픔에 떨고 있는 크메르족을 긴급 구호하는 업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강대국 사이에서 이중고에 시달린 캄보디아의 운명

우선 캄보디아의 근세사를 살펴보자. 프랑스는 1864년 베트남, 캄보디아, 라오스를 식민지로 삼아 제2차 세계대전이 막을 내린 1945년 이후에도 지배를 포기하지 않다가 1953년 비엔티엔 전쟁에서 호치민군에 패배하자 비로소 철수했다. 프랑스군의 철수 후 캄보디아는 1955년 시아누크에 의해 독립이 선포된다. 그는 곧바로 중립을 선언해 1960년 벌어진 베트남과 라오스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정권을 유지했지만 1970년 미국이 지지하는 론놀 장군에 의해 실각했다. 시아누크는 론놀을 몰아내기 위해 크메르 루즈와 연대하는 한편 중국과 북한의 지원을 얻어 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그러나 1975년 폴포트가 이끄는 크메르 루즈는 론놀을 축출하고 급진적 토지개혁과 사회개혁을 실시했다. 이 와중에서 우리에게 ‘킬링 필드(Killing Field)’로 잘 알려진 대학살이 벌어져 100만 명 이상의 인명이 희생됐다. 베트남은 크메르군이 1978년 베트남 국경을 두 차례 침범한 것을 빌미로 현 캄보디아의 제1수상인 훈센을 도와 폴포트를 축출하고 캄보디아의 새로운 실력자로 군림하게 된다.

1975년 미국은 베트남 전쟁에서 패한 뒤 분을 삭이지 못하던 터에 1979년 베트남이 캄보디아를 거의 식민지화하자 경제제재를 선포한다. 이처럼 베트남과 태국에 짓눌려 있다 구 소련과 미국의 냉전에 휘말려 또다시 큰 고통을 겪어야 했던 약소국의 운명이 곧 캄보디아의 근현대사다.

폴포트 정권과 해골의 동산

얘기를 다시 처음으로 돌려보자. 클라버 신부는 경제제재가 있기 4∼5년 전부터 프놈펜에서 선교활동을 하다 WCC 직원으로 뽑혀 프놈펜에 그대로 머무르게 된 사람이다. 그는 훈센 정부가 들어선 뒤에도 미사 집전을 멈추지 않으면서 WCC의 원조를 등에 업고 공산화되어 가는 땅에 복음을 심겠다는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WCC는 1979년 미국의 경제제재에 반대하며 무고한 국민들이 정치적 이데올로기에 희생되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하고 인도주의적 원조를 실시하기로 결의했다. 이에 따라 세 나라에 매년 300만 달러 이상을 원조했다. 클라버 신부의 미사에 참가하는 원주민 크메르족의 수는 계속 늘어났다. 훈센정부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계속 미사를 집전하는 클라버 신부는 눈엣가시일 수밖에 없었다. 1982년 4월 클라버 신부는 강제 출국당해 태국 방콕에서 재입국을 기다리고 있었고 WCC 프놈펜 사무실은 현지 고용인들만 남아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이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필자는 부임하자마자 프놈펜에 가게 된 것이다.

공항에 도착하니 소련제 리무진 4대가 대기하고 있었다. 필자는 놀랐다. 한 사람을 위해 4대의 승용차가 대기하다니, 그것도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나라에서. 맨 앞차는 호위하는 차, 두번째는 나와 통역, 세번째는 당 간부들, 마지막 차는 신문기자들용이었다. 허술하게 고쳐놓은 영빈관에 여장을 푼 나는 곧바로 통역에게 자동차는 두 대면 충분하다고 말했지만, 이 제안은 일 주일 내내 반영되지 않았다. 공항에서 작별할 때 통역이 조심스럽게 한 말은 잊을 수가 없다. “박 선생님, 죄송합니다. 계속 차 4대로 움직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자동차 수를 줄이는 데 1개월의 행정절차가 걸리기 때문입니다.” 20년 전 일인데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그날 나는 아시아 공산주의의 관료주의에 눈을 뜨게 된 셈이다.

둘째 날 나는 훈센 당시 외무부 장관의 방으로 안내되었다. 40대 초반의 훈센은 얼굴에 칼자국이 선명하였고 강인한 인상을 주었다. 나는 클라버 신부의 축출에 대해 항의하고 그를 재입국시키지 않으면 모든 원조를 잠정 중단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훈센 장관은 “공산주의 국가인 우리는 당신네 직원이 예배 인도를 포기하기 전엔 재입국을 허가할 수 없다”고 맞섰다. 팽팽한 대결은 결국 타결점을 찾지 못한 채 결렬되고 말았으며 WCC 원조는 1987년까지 5년간 중단되었다.

일 주일 간의 체류에서 나는 정치이념을 빌미로 인간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비극을 이 작은 나라에서 보고 들을 수 있었다. 그들은 수많은 사람들을 고문하고 죽음으로 몰고 간 감옥을 공개하고 있었다. 안내자의 자세한 설명을 들으며 필자는 인간이 이렇게 잔인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에 몸을 떨었다. 요즘도 프놈펜 교외의 ‘해골의 동산’을 정부가 일반인에게 공개하고 있다고 들었다. 폴포트정권의 죄상을 보여주면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교훈을 주기 위한 것이라지만 선뜻 납득되지 않았다. 나 역시 셋째 날 해골동산으로 안내되었는데 섬뜩한 느낌을 내내 떨칠 수 없었다.

타히티군도 여성들이 기형아를 출산하는 까닭

캄보디아의 비극은 지금도 곳곳에서 목격된다. 우선 대인지뢰에 손발이 잘린 국민들이다. 목발을 집거나 돈이 없어 의수를 달지 못한 사람들이 도처에서 눈에 띈다. 대인지뢰는 한번 묻으면 거의 제거되지 않는다고 하는데 무고한 사람들을 평생 불구로 만들고 있었다. 폭발하지 않은 지뢰를 제거하는 데 드는 비용도 엄청나고, 제거 과정에서 희생자가 다수 생길 수 있다. 필자는 비슷한 상황에 놓여있는 우리나라의 비무장지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인지뢰금지조약에 각국이 서둘러 가입하고 있는 실정을 헤아려야 할 필요가 있다.

캄보디아의 또 하나의 비극은 아직도 많은 임산부들이 기형아를 낳고 있다는 사실이다.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처럼 전쟁을 오래 치르면서 아직도 폭발물이 묻혀 있는 나라에서는 땅의 성분이 변화하고 다이옥신 등 인체에 해로운 물질에 의해 대기가 오염되어 기형아가 비정상적으로 발생한다는 사실이 과학적으로 증명되고 있다. 프랑스가 태평양의 타히티 군도를 중심으로 원자폭탄 실험을 계속한 이래로 타히티 군도의 임산부들이 다수의 기형아를 분만하는 것과 마찬가지 이유에서다. 인류가 전쟁과 무기를 포기할 때까지 대체 얼마나 더 많은 희생을 치러야 할까.

박경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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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캄보디아에 대한 자세한 내용 : http://www.netvibes.com/cambo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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