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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간 참여사회    since 1995

  • 2001년 11월
  • 2001.11.29
  • 591
세계 NGO국제형사재판소 설치 논의 본격화
오사마 빈 라덴이라는 테러리스트를 잡겠다고, 수백억 달러의 전비를 쓰는 전쟁이 시작되었다. 그처럼 많은 돈을 쓰고도 애꿎은 아프간 사람들의 희생만 늘어간다니 참으로 분통터질 노릇이다. 세계무역센터에 있던 사람들이나, 들이받은 비행기에 탔던 사람들이나, 모두 무고한 사람들이긴 마찬가지이다. 테러리스트의 반격으로 탄저병에 걸려 죽어 가는 사람들은 더 말해 무엇하랴? 몇 사람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대다수 사람들이 목숨을 내놓고 지내야 하는 고약한 날들이 계속되고 있다. 도대체 언제까지 이런 부조리 속에서 살아야 한단 말인가?

세계무역센터가 무너져 내리는 광경은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기만 하다. 그러니 미국 사람들이 저렇게 흥분해서 기를 쓰고 테러범을 체포하겠다는 것도 충분히 이해가 가는 일이다. 하지만, 곰곰이 되짚어 보면, 전쟁을 통해 테러를 해결하려는 것처럼 무모한 일은 없다. 아무리 공분에서 시작된 것이더라도, 전쟁은 그 자체의 논리로 사람과 자원을 동원하게 마련이기 때문이다. 엄청난 테러 앞에서 세계인의 분노가 하나로 모이고, 심지어 이슬람 근본주의자들까지 애도의 대열에 합류한 상황이라면, 좀더 성숙한 문제 해결방안을 고려해 보아야 한다. 제2차 대전이 끝났을 때, 뉘른베르그와 동경에서 벌어졌던 전범재판과 같은 방식도 하나의 대안이 될 수 있다.

ICC에 대한 초강대국들의 태도

사실 현재의 국제정치 현장에는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Court, 이하 ICC)라는 이름으로 테러에 대한 사법적 대응책이 제안되어 있다. ICC는 ‘인간의 평화와 안전을 위협하는 심각한 범죄를 기소하고 처벌하기 위하여 독립적으로 설치될 예정인 국제적인 사법기관’이다. 옛 유고나 르완다의 인권범죄를 처벌하기 위한 특별형사재판소가 ‘승자의 정의’에 치우쳤다는 비판에 부딪히면서, 그 극복을 위해 상설기구화된 것이다. 생각해보면, 지난 세기의 인류사는 정치적 목적에 의한 집단학살을 수없이 반복하면서도, 그 범죄자들에 대한 법적 응징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비참한 역사였다. 그러다 보니 불처벌은 하나의 관행이 되었고, 군사적 응징을 빌미삼아 또 다른 집단학살이 시도되는, 일종의 악순환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ICC의 설치를 주장하는 핵심논리 중 하나는 사법적 방식의 처벌을 통해 이런 악순환의 고리를 끊어내자는 것이다. 정치적 목적에 의한 범죄는 대부분 국내의 권력투쟁과 연관되는 까닭에 혁명으로 미화되거나, 형식적 재판 또는 정치적 사면으로 마무리되는 예가 많았다. 이럴 경우, 가슴 아프게도 이유없는 죽음을 당한 피해자들의 아픔은 살아남은 자들에 의하여 무시되는 것이 다반사였다. ICC 설립운동은 바로 이런 정의의 공백을 채우자는 시도이다. 국내 사법제도가 사법적 처벌과 피해자구제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할 경우에, 국제적 차원에서라도 그것을 진행시킬 수 있는 재판기구를 마련하자는 운동인 것이다.

세계 각국의 인권조직과 양식 있는 지식인들이 중심이 된 ICC 설립운동은 1998년 로마에서 열린 외무장관회담을 통해 ICC 설립에 관한 로마조약을 제정함으로써 중요한 결실을 보았다. 이 조약에서 합의된 바에 따르면 ICC의 관할범죄는 (1) 집단살해죄(Genocide) (2) 인도에 반한 죄(Crimes against humanity) (3) 전쟁범죄(War crimes) (4) 침략범죄(The Crime of Aggression)이다. 이 가운데 그 정의가 후일로 미루어진 침략범죄를 제외하면 나머지 범죄들은 수사와 처벌에 지장이 없을 수준으로 상당히 구체적인 행위들이 열거되었다. 그밖에 관할권 문제에 대해서는 (a)규정이 발효된 이후의 범죄행위에 대하여 (b)원칙적으로, 국내법원이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경우에 ICC가 개입하는 것으로 확정되었다(보충성의 원칙).

로마조약에 따라 ICC는 이제 세계 각국 정부의 서명과 비준을 기다리고 있다. 60개국 이상이 비준절차까지를 모두 마치게 되면, ICC의 설치 및 구성작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어 네덜란드의 헤이그에 자리를 잡게 된다. 현재까지 약 37개국 정도가 서명 및 비준절차를 마쳤고, 나머지 국가들은 서명을 하지 않았거나, 아직 비준에 동의하지 않은 상태이다. 2000년 3월에 이 조약에 서명한 우리나라도 아직 비준절차를 끝내지 않고 있다. 60여 개의 아시아국가들 가운데 비준한 국가는 현재까지 중앙아시아의 타지키스탄이 유일하다.

재미있는 것은 ICC와 관련된 초강대국들의 태도이다. 대표적으로 미국은 애초부터 ICC의 설립을 반대하다가, 서명기한의 마지막 날 로마조약에 서명하였으나 현재까지 비준하지 않고 있고, 중국은 주권침해의 소지가 있다면서 서명까지도 완강하게 거부하였다. 각국이 처한 국제정치적 형편에 따라 ICC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이 사실이지만, 자칫 인권침해국가로 낙인 찍혀 ICC에 제소당할 위험을 느끼는 국가들이 반대하거나 회피하고 있는 경향이 포착된다.

피를 부르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으려면

이처럼 아직 종이 위에만 있을 뿐인 ICC가 만약 미리 설치되었더라면, 이번 사태의 전개과정에 어떤 영향을 미쳤을까? 경솔한 예측인지는 모르지만, 지금보다는 훨씬 이성적인 방법으로 문제해결이 시도되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무엇보다 용의자로 지목된 ‘오사마 빈 라덴’이나 그 보호자인 아프가니스탄의 탈레반정권에게, 세계인권선언으로 표상되는 보편적 가치에 반대하지 않으면서도, 자신들의 행위를 심판받을 수 있는 합법적인 공간이 보장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아울러 미국이 제시하는 수사의 자료가 독립된 법관들 앞에서 평가될 기회 또한 확보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분쟁의 해결수단으로서 법 또는 재판이 가지는 거의 유일한 장점은, 당사자들에게 주장할 기회를 공평하게 제공함으로써, 분노를 삭이고 평상심을 되찾을 시간을 벌어주는 것이다. 그런 장점을 최대한 이용하는 것, 즉 시간을 두고 적법절차를 통하여 책임자의 범위를 확실하게 좁히는 것이야말로 피가 피를 부르는 테러의 악순환을 끊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접근이 아닐까?

오늘날 세계화는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이다. 시장은 국경을 불편하게 여기기 시작한 지 오래고, 국제정치와 국내정치의 구분은 갈수록 불분명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 자체의 ‘보이지 않는 손’이나 국제정치의 권력균형이론에만 기댄다는 것은 너무도 무력한 선택이다. 이대로 내버려 둘 경우, 세계는 국경 없는 투기자본의 경연장과 강대국들의 군사전략 실험장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한복판에서 무력한 개인들은, 아무 이유 없이, 집단적으로 죽거나 죽을 위험을 감수해야만 하는 것이다.

사법을 통해 입법과 행정을 감시하고, 그 사법을 다시 시민이 감시하는 것! 이것은 민주적 시민사회의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할 정치적 입장이다. ICC 설립운동은 이런 입장을 세계인의 차원으로 확대하도록 요구한다. 따라서 ICC가 설립되는 그 순간부터, 서구중심적, 제국주의적 세뇌공작을 염두에 두면서 ICC에 대항하여 감시하고 투쟁해야 할 일들이 많이 생길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런 각오와 더불어 ICC 설립운동을 전향적으로 지지해야 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세계적 규모의 입법과 행정을 감시하기 위하여 세계적 규모의 사법기관이 너무도 필요한 시점이기 때문이다.

이국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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