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1044

한류 열풍을 생각한다

한류 열풍을 생각한다

중국에, 동남아에 한류(韓流) 열풍이 불고 있다고 한다. 아닌게아니라 안재욱, 장동건, 김남주에다 HOT, NRG 등이 현지에서 불러일으키는 선풍은 예사롭지 않다. 일본에 온 길에 어쩌다 들르는 할리우드 배우나, 한물 간 미국 가수가 적선이라도 하듯이 와서 맛이 간 목소리로 부르는 무대에도 열광하는 우리네 모습만 보아오던 터다. 그랬는데 이제 한국의 연예인들이 당당히 문화상품의 공급자로 나서는 광경은 정말이지 신선한 감동을 주기까지 한다.

아니나다를까. 매스미디어와 문화평론가들의 진단이 줄을 잇는다. 한국 음악의 거칠고 박력 있는 맛이 그네들을 사로잡았다는 얘기에다, 한국 드라마의 매력이 그들에게 대리만족을 주며 어필하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사실인지 아닌지를 떠나 듣기 싫은 말은 아니다. 방송문화계의 변방에 있는 필자로서도 느끼는 바가 각별하다. 걸핏하면 표절·모방 시비에다 선정·폭력 시비에 시달리던 우리 방송이, 퇴폐적 서구 문화나 조악한 일본 문화를 들여오는 주범으로 취급받던 우리 방송이 이렇게 한류 열풍을 이끄는 견인차가 되고 있다는 것에 자못 어깨가 으쓱해진다.

말하자면 산업화 이후, 오랫동안 부품 하청업자 노릇이나 하다가 드디어 완제품을 만들어 수출을 시작한 이래 OEM 제품을 벗어나 드디어 자국의 브랜드로 세계시장에 진출한 기분과 비슷하다고 할 것이다. 그동안 툭하면 한국 방송이 어쨌느니 하던 사람들에게 “자, 봐라! 이래도 우리 방송보고 계속 뭐라고 그럴 거냐”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사실 미국이 주도하는 할리우드 문화가 온 세계를 주름잡고 있는 상황에서 지상파 방송의 프라임 타임에서 미국제 프로그램이 방영되지 않는 몇 안 되는 나라에 한국이 속한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그뿐인가. 우리 대중가요가 팝 음악을 사실상 몰아냈고, 극장에서도 할리우드 블록버스터를 물리치고 우리 영화가 4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다. 그것은 단순한 문화적 국수주의의 소산이 아니라 우리 문화상품이 가진 소구력(訴求力)으로 소비자의 엄정한 선택에서 살아남은 결과다. 우리의 대중문화계가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고, 또 치열한 경쟁 속에 부단히 시장에의 진입과 퇴출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형성된 콘텐츠가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외국에서도 통하는 상품성을 갖추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을 한류 열풍 와중에 비로소 발견한 것이다. 망나니에다 천덕꾸러기인 줄 알았던 아들녀석이 알고 보니 밖에서 제 몫을 하는 효자였다는 것을 우연히 알게 된 셈이라고나 할까.

물론 자화자찬 속에 샴페인을 터뜨리기엔 이르다. 필자는 한류 열풍이 마치 한국 문화의 우수성의 결과이며 이제 이들 대중연예인을 앞세워 한국상품의 수출 시장을 대대적으로 개척할 수 있다는 식으로 떠벌리는 것은 경계한다. 냉정히 짚어보면 한국 연예인들의 어필은 아직 대중문화의 생산기반이 취약한 이들 나라에서의 일시적인 현상일지도 모른다. ‘원단’ 할리우드 스타를 불러오지 못하는 이들이 이른바 문화할인율이 낮은 한국 연예인을 통해 유사 할리우드 문화의 ‘대체재’로 한국 대중문화를 소비하는 것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또한 미디어의 호들갑과는 달리 한류 열풍이 일부에서의 지엽적인 현상이라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게다가 자국문화를 보호하려는 이들 국가에서 한국 대중문화의 범람과 확산을 경계하는 경향이 있고 보면 지속성 여부는 좀더 지켜보아야만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한류 열풍에서 사실 한국 가수의 CD가 더 팔린 것도 아니요, 항차 한국상품이 더 팔린 것도 아니어서 별 ‘실속’을 차린 것도 없다고 한다. 곧 이들 나라의 대중문화계가 자체 생산력을 갖출 경우 현지 시장에서는 치열한 주도권 다툼이 벌어질 것이다. 이 때 한국제 문화상품은 무엇으로 이들과 본격적인 경쟁에 나설 것인가. 독창적인 상상력이 승화된 우리만의 문화적 코드 없이 그저 유사 할리우드 문화로서의 대리만족만 줄 뿐이라면 과연 그때도 한류는 계속될 것인가. 한류 열풍이 썰렁한 한류(寒流)로 끝나지 않기 위해서는 훨씬 치열한 고민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정길화 MBC 시사교양국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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