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841

미국 워싱턴 현지보고

미국이 증오의 대상이 된 이유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부었습니다.” (한용운 “님의 침묵”中)

만해는 일제하에서 ‘님’을 잃은 슬픔을 이렇게 노래했다. 그는 슬픔이 힘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리고 그 힘은 ‘파괴적 절망’이 아닌 ‘새로운 희망’의 원천이 될 수 있음을 우리에게 가르쳐주었다.

지난 9월 11일 미국 뉴욕과 워싱턴에서 참혹한 테러사건이 벌어졌다. 그 이후 내가 유심히 지켜본 것은 미국사회가 그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을 어떻게 ‘힘’으로 정제하여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이붓는지 하는 것이었다. 만해의 싯귀같은 비장한 울림이 맨해튼의 잿빛 시멘트무덤 위에서, 펜타곤의 구겨진 철근더미 위에서, 그리고 유력 신문과 TV에서 어떻게 울려퍼지는지 보고 싶었다.

그러나, 실망스럽게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그런 감동스런 장면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반대로, 강자의 오만함이 그 깊은 슬픔을 압도하고 퇴색시키는 모습만 보일 뿐이었다.

“왜?”란 물음없이 성급한 움직임

슬픔이 힘이 되고 다시 희망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 슬픔에 깊이 침잠해야 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그런 극심한 고통을 안긴 상대편을 들여다봐야 한다. 그런 다음 서서히 일어나, 어떻게 하면 그 고통을 치유하고 부정의를 바로잡을 수 있는지, 어떻게 하면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할 수 있는지 찾아봐야 한다. 그 과정에서 진정한 화해와 정의가 이뤄지고 슬픔은 새로운 희망으로 솟아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미국의 경우는 어떤가? 테러사건의 희생자나 그 가족들은 아직도 깊은 충격과 고통에 잠겨 있을 것이다. 이 사건이 희생자 가족들에게만 해당되는 사건이 아니라면 미국사회 전체가 아직도 그러해야 마땅할 터이다. 그리고 이 사건의 의미를 깊이 성찰하려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미국정부와 의회 그리고 언론은 너무 빨리, 그리고 아주 경쾌하게 그 반대쪽으로 움직였다.

사건발생 직후 부시 대통령은 이 사건의 성격을 아주 간단하게 정의내렸다. 이 사건은 ‘미친 자들(madmen)’이 저지른 ‘자유에 대한 공격(attack on freedom)’이라며 무력보복을 다짐했다.‘선과 악’(Good vs. Evil)의 싸움에서 어떤 희생을 무릎쓰고서라도 이길 것이라 장담했다. 그리고는 바로 행동으로 돌입했다. 아무런 확증도 없이 오사마 빈 라덴을 ‘사악한 적’으로 단정하고 군병력을 아프가니스탄쪽으로 이동시켰다. 전쟁을 외치는 대통령에게 의회가 무력사용의 전권을 위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킨 것은 사건발생 후 불과 3일만이었다. 이 사건의 의미와 올바른 대처방식에 대한 진지한 토론도 없었다. 상원에서는 만장일치(98:0), 하원에서는 한 흑인여성의원(바바라 리)을 제외하곤 전원 찬성(420:1)이었다.

언론도 마찬가지다. 그런 엄청난 사건을 다루면서도 사건의 성격이나 본질에 대한 근본적인 의문을 던지고 성찰하는 모습은 찾아보기 힘들었다. 누가 어떻게 저지른 것인지에 대한 얘기만 있을 뿐이지 “왜 일으킨 것인지” “왜 미국이 그런 공격을 받게 된 것인지”를 숙고하는 기사나 칼럼은 극히 드물었다. 나는 9월 11일부터 17일까지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LA타임스』, 『보스턴글러브』 등 미국 4대 권위지의 기사를 검색해보았다. 수천 건의 테러사건 관련 기사나 칼럼 사설 중 “미국이 왜 테러공격의 대상이 됐는지” “왜 아랍에 반미감정이 강한지” 등의 문제를 본격적으로 다룬 기사나 칼럼은 단 두 꼭지, 과거 외국에서 미국정부가 저지른 테러사건 등 반미감정의 원인을 분석한 『LA타임스』의 기획기사(9/13)와 아랍의 반미정서 배경을 다룬 『보스턴글러브』의 분석기사(9/13)뿐이었다.

반면, 9월 18일자 『워싱턴포스트』는 “Reasons for Pride”란 제목의 칼럼에서 부시 대통령을 비롯 미국사회는 이번 테러사건에 대해 아주 훌륭하게 대처해왔다며 찬양 일색이었다. 『뉴욕타임스』의 칼럼니스트 토머스 프리드먼은 13, 14일 잇단 칼럼에서 이스라엘 외무장관 시몬 페레스의 말을 빌려가며 이슬람사회의 후진성을 냉소적으로 꼬집고 이번 테러사건의 주요 원인으로 암시하기도 했다.

미국정부와 의회 그리고 대다수 언론이 이렇게 슬픔의 승화나 자기성찰 없이 성급하게 강경일변도의 대응으로 치닫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세계최강의 자존심이 상처받은 데 대한 보상심리, 국가적인 사태가 발생했을 때 일제히 성조기를 흔들며 대통령 뒤로 일렬종대하고 다른 목소리를 내는 것을 터부시하는 애국주의의 범람, 강자의 오만함, 그리고 미국 특유의 이중성이 뒤섞여 나타난 것으로 보인다.

실례를 살펴보자. 부시정부는 이번 사건을 “자유에 대한 공격”이라고 규정지었다. 자유가 마치 자기들의 전유물이라는 투다. 서구사회의 가치(the Western Values)를 지키기 위해 싸워야 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실제 행동은 어땠는가. 자유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은 절차의 정당성이다. 확정판결 받기 전까지의 무죄추정원칙은 민주주의의 기초상식이다. 그러나 이번 사태의 초점이 된 오사마 빈 라덴을 미국은 어떻게 취급했는가. 아무런 확증도 없이 단지 혐의자일 뿐인 그를 미정부는 주범으로 지목하고 체포-사살을 운위하며 군사행동을 개시했다. 그가 은신하고 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아프가니스탄에는 엄청난 군사적-정치적 위협을 가하고 있다. 이를 둘러싼 절차적 정당성 문제에 대해 미국 언론들은 아무런 문제제기도 하지 않고 있다.

테러를 몰아내자고 하면서도 정치적 암살의 합법화를 추진하고 있다. 무고한 민간인의 희생이 따르더라도 보복공격을 감행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다. “자유와 인권”을 앞세워 비서구 국가들을 조롱하고 압박하면서도 기실 자신이 뭘 할 때는 아랑곳하지 않는 강자의 오만, 미국적 ‘이중잣대’의 단면을 드러내는 것일 뿐이다.

베트남전, 강자의 오만에 대한 경고

“미국은 강하다. 그러나, 단지 그 때문에 미국이 뭐든지 할 수 있고 늘 정당하다고 믿는 것에 대해서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1964년 8월, 통킹만사건으로 미의회가 대통령에게 무력사용권을 위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반대표를 던졌던 웨인 모스 상원의원(민주당·오레곤주)이 한 말이다. 북베트남 통킹만 인근에서 두 대의 미국함정이 잇달아 기습당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보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들끓었다. 의회는 즉각 대통령에게 무력사용의 전권을 위임하는 결의안(Tonkin Gulf Resolution)을 상정했다. 하원은 만장일치(416대 0), 상원은 모스 의원 등 단 두명을 제외한 전원 찬성(88:2)으로 가결시켰다. 성조기의 물결 속에 존슨정부는 북베트남에 대대적인 폭격을 가했다.

미국을 월남전의 수렁으로 밀어넣은 이 통킹만사건이 사실은 상당부분 조작되었다는 것이 나중에 밝혀졌다. 언론도 결과적으로 국민들을 오도했다는 게 드러났다. 그런 내막을 알 길 없었던 국민들은 “감히 미국을?”이라며 “무차별 보복!”을 외쳐댔던 것이다. 상원에서 문제의 결의안을 통과시킬 때 모스 의원은 다음과 같은 경고로 반대연설을 끝맺었다.

“지금 미국의회는 역사적인 과오를 저지르려고 하고 있다. 그리 머지않아 우리 후손들은 이를 수치스럽게 돌아보게 될 것이다.”

그의 경고는 불행하게도 곧 현실이 되고 말았다.

걱정스러운 것은 37년이 지난 지금 다시 비슷한 역사가 반복되려 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미국의 자존심을 건드리는 사건으로 국민적 공분이 일어난 점도 그렇고, 이에 대한 정부나 의회, 언론의 대응방식도 아주 유사하다. 대통령에게 무력사용권을 일임하는 결의안을 상하원 통틀어 한두 명을 제외한 전원 찬성으로 통과시킨 점도 똑같다. 형편없던 부시 대통령의 지지도가 테러사건후 급상승하는 것도 통킹만사건 후의 존슨 대통령과 비슷하다. 결정적인 닮은 꼴이 한 가지 더 있다. 베트남과 아프가니스탄 두곳 다 지형적으로 또 역사적으로 외국군에게는 악몽같은 곳이라는 점이다.

베트남에서 이미 충분한 교훈을 얻은 미국으로서는 강자의 오만을 거두고 대신, 슬픔에 침잠하며 깊은 자기성찰이 필요한 때인 것 같다.

강영진 미국 조지메디슨대학 분쟁해결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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