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785

북녘동포 10명을 만나보니

북녘동포 10명을 만나보니

낯선 곳에서 낯선 이에게 말 걸기란 쉽지 않다. 괜한 얘기를 꺼냈다가 무안을 당할 수도 있고 자칫 정이라도 들어 버렸다간 기약 없는 만남을 손꼽아 기다려야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만남의 순간을 외면과 무관심으로 스쳐 지나칠 수는 없는 법. 북쪽 사람들과의 반세기만의 만남도 그랬다. 처음에는 머쓱하고 어색했지만 몇 마디 오간 후엔 오래 사귄 사람들처럼 친밀하게 대화를 나눴다.

조선 제일의 화가가 꿈인 미술대 학생들

지난 8월 16일 정오, 청년중앙회관은 남북 청년들의 대동한마당 행사로 들썩이고 있었다. 북의 공연이 끝나고 남북해외청년대표 연설도 끝난 터라 모두들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길놀이에 정신이 없었다. 멀찍이 떨어져 이 모습을 사진기에 담고 있던 기자에게 방금 전에 인사를 나눴던 두 명의 북녘 대학생이 달려들었다.

“이거 뭐하시는 겁니까? 혼자 쏙 빠져서 재미도 없게 사진이나 찍고, 가서 어울립시다.”

김광성 씨(29세), 정창주 씨(21세). 그들은 모두 평양미술대학에서 유화를 전공하고 있단다. 이 행사엔 북측 범청학련 대표로 뽑혀 왔다고 한다. 그들은 “이렇게 많은 남조선 사람들은 처음 본다”며 기자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김일성종합대학이나 김책공업대학말고도 평양에는 미술, 음악 분야의 단과대학들이 있다고 한다. 공연이 끝날 때마다 유난히 큰 박수와 고함 소리를 내던 이들은 그림에 대한 열정도 대단했다. 조선 제일의 화가가 되고 싶다는 그들은, 청년중앙회관에서 헤어질 때까지 내내 손을 꼭 잡고 함께 어울리기를 청했다.

평양에서는 재일조선인 3세들도 만날 수 있었다. 해외대표 자격으로 통일대축전에 참가한 하홍철 씨(23세). 일본 히로시마(廣島)에서 온 그는 8월 16일 저녁 양각도 호텔 만찬장에서 의자 위에 올라가 빼어난 목소리로 ‘산천가’를 불렀다. 참석자들은 그의 노래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기도 했다. 음주가무를 좋아하는 민족성은 남북 가릴 것이 없었다. 그는 일본의 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해 정황을 전해주었다. 일본 시민들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이 책에 비판적이며 적극적으로 불매운동을 벌이고 있단다. 원폭투하장소인 히로시마 평화공원에서 한일 시민이 함께 불매운동을 벌이기도 했다 한다. 그는 민요에 관심이 많아 지난 5월 평양에 와서 ‘산천가’, ‘박연폭포’ 등을 배웠다고 한다. 아직은 남쪽에 가지 못하지만 노래패 꽃다지의 ‘넝쿨을 위하여’를 좋아한다며 살짝 들려주기도 했다.

8월 17일 대동강 유람선 위, 남측 대표단과 북의 안내원들이 강변을 바라보며 술과 담소를 나누고 있을 때, 유람선의 엔진을 점검하고 있는 기관원들을 만날 수 있었다. 찜통더위에 웃옷을 벗고 일하다 갑판으로 올라온 김정훈 씨(43세), 안장원 씨(31세), 김철 씨(40세). 사진촬영에 응해달라고 부탁하자 언제 거친 일을 했냐는 듯 선글라스까지 쓰고 멋진 자세를 취한다. 갑판장 김철 씨에 따르면 이 유람선은 북의 휴일과 명절에 하루 3∼4회 운항한단다. 그는 “문산 이북 강원도 천내가 고향”이라며 “작년에 남측 이산가족들을 태우기도 했는데 언젠가는 한강에서 이 유람선을 몰아봤으면 한다”고 말했다.

지난 8월 17일 남측의 국립도서관에 해당하는 북의 인민대학습당에서 만난 김성철 씨(23세). 그는 알이 매우 두꺼운 안경을 쓰고 『The Gadfly』라는 소설을 읽고 있었다. 어찌나 시력이 안 좋은지 군에도 못 갔다고. 책 내용을 묻자 그는 “19세기 이탈리아가 오스트리아에 강점당했을 때 이탈리아 민중의 민족해방투쟁을 소설화한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그는 배선공으로 아직 대학에 가지 못했지만 이후 대학에 가게 된다면 영문학을 전공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는 작년 6?5공동선언 발표 후 남측의 통일열기는 어느 정도인지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10년째 백두산을 지키는 해설강사

지난 8월 18일 백두산 천지에서 만난 리희옥 씨(29세)는 10년 동안이나 이곳에서 해설강사를 해왔다. 백두산 자락 해발 1600미터에 위치한 삼지연에서 태어난 그는 많게는 하루에 스무 번이나 백두산을 오르내린 적도 있다고 한다. 백두산 곳곳의 지명과 유래에 대해 막힘이 없는 그는, 1930년대 김일성 주석이 이끌었다는 항일유격대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불규칙한 기후로 인해 산살이가 힘들고 1년에 단 한 번 휴가를 얻어 고향에 가볼 수 있을 뿐이지만 한 사람에게라도 백두산의 진면목을 더 많이 알려줄 수 있다면 그것이 보람이라고 했다.

방북기간중 남북의 합동종교행사도 함께 열렸다. 19일 묘향산 보현사에서 만난 북쪽의 청벽 스님은 이런 상황에 들떠 있었다. 부모님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절을 자주 찾던 그는 진리를 찾아 불교에 귀의하게 되었다고 한다. 북에서도 종교를 가질 수 있냐고 묻자, 그는 “북에도 엄연히 종교의 자유가 보장되어 있다”며 “당에서 막지도 않고 지장도 없다”고 답했다. 이날 남북의 스님들은 보현사 대일여래(비로자나불) 앞에서 합장을 했다.

서울로 되돌아오기 전날인 8월 20일 방문한 만수대 소년학생궁전에는 많은 학생들이 과외교습을 받고 있었다. 이곳은 컴퓨터, 발레, 태권도, 음악 등 특기를 키울 수 있는 국립과외교습소다. 리향미 양(14세)은 중학교 4학년생으로 화술을 전공하고 있었다. 남측의 한 중학교 교사가 “우리네 초등학생들처럼 선발된 학생들만 받는 엘리트 과외교육 아니냐”고 묻자, 리양은 “학교마다 각자의 적성에 맞게 수업 후에 특별활동을 하고 있으며, 이곳도 평양의 학생이라면 누구나 올 수 있는 곳”이라고 대답했다. 유치원에서 중학교 6학년까지의 학생들이 이곳에서 교육을 받는다고 한다. 리양은 화술을 제대로 소화해 내면 성악을 전공하는 것이 꿈이라고 말했다. 남측 대표단이 떠날 때가 되자, 리양은 버스 안에까지 올라와 “조국통일 되는 날, 선생님들 모두 다시 뵙겠습니다”며 환한 웃음과 함께 작별인사를 했다.

기자가 북에서 만난 사람들이 평양시민 또는 일반 시민들의 생활을 대변하는 것은 물론 아닐 것이다. 실제 평양에서는 지하철을 탈 수 없어 시민들을 만날 수 없었다. 즉, 매우 제한적인 만남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이번에 만난 이들을 통해 북한 사람들이 나름대로 안정되고 일상적인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최경석(참여사회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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