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1191

미장원 사람들이 노조를 만든 까닭

하루 12시간 일하고 월급 50만원

한 달에 한 번 쯤 찾아가는 미용실. 커트나 파마, 때론 시원한 스포츠머리로 사람의 인상을 엄청나게 달라지게 만드는 미용사들은 ‘변신의 마술사’임에 틀림없다. 하지만 그런 미용사가 되기 위해서는 하루 12시간 이상 일하면서 월 40∼60만원을 받는 미용보조원 생활을 3∼4년씩 해야 한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어엿한 미용사가 되더라도 월 100만 원 안팎의 임금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려야 하는 반면, 퇴직금이나 연장근로수당, 4대 보험의 혜택은 제대로 받지 못한다는 사실은 더더욱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디자이너’인가 ‘노동자’인가,

“지금 고생하더라도 열심히 배워 미용사가 되면 미용실을 차릴 수가 있잖아요? 그러니까 힘들더라도 참아야죠.”

서울 신촌의 한 미용실에서 10개월째 미용보조원으로 일하고 있는 손아무개 씨(24세)의 말이다. 일이 힘들고 임금도 적지만 미용사가 되는 그 날까지 고생도 감내하겠다는 다짐이 배어 있다. 도제식 훈련을 거쳐 일정한 수준의 기술을 갖추면 자기 가게를 차려 독립할 수 있다는 특성 때문에 많은 보조원들은 부당한 대우를 당연한 것으로 여기고 참아왔다.

‘한가위’ 선생님으로 유명한 정석철 씨(29세)도 그랬다. 일도 재밌고, 돈도 많이 번다길래 군대에서 이발병으로 근무했던 경험만 믿고 미용업계에 발을 내디뎠던 그. 그러나 95년 초 첫 월급을 받던 날, 눈앞이 캄캄했다. 고작 16만5000원. 자격증도 없는 그에게 미용실 원장이 월급으로 책정돼 있는 15만 원에 웃돈까지 얹어준 것이 그랬다.

‘이렇게는 살 수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식당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모아둔 돈으로 미용학원에 등록하고 자격증을 땄다. 정식 미용보조원이 되어도 하루 12시간 꼬박 일하고도 한달 42만 원밖에 받지 못하지만 최고의 미용사가 되겠다는 일념 하나로 버텼다. 퇴근 후에도 잘 아는 선배로부터 2∼3시간씩 부지런히 미용기술을 배워 2년 만에 꿈에도 그리던 미용사가 될 수 있었다.

미용사가 되자 발언권도 생기고 임금도 올랐다. 하지만 언제까지 이런 생활을 계속해야 하는지 마음 한 구석은 늘 불안했다. 특히 후배들을 볼 때면 그랬다. 몇 해 전만 해도 같은 처지였지만 미용기술을 ‘배운다’는 이유 때문에 저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는 후배들이나 자기 처지를 볼 때마다 “이게 아닌데”하는 회의가 들었다.

파마나 염색을 할 때 쓰는 중화제나 염색제는 그 성분이 독하기 때문에 손이나 팔은 피부병에 걸리기 일쑤였다. 하루종일 서 있어야 하기 때문에 관절염이나 허리디스크, 어깨 결림을 호소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그것이 ‘직업병’이라고 불리는 줄도 몰랐다. 식사시간도 따로 없다. 언제 손님이 올지 몰라 늘 대기해야 하기 때문에 ‘한가한’ 시간에 ‘눈치 봐서’ 식사를 해야 한다. 늦게까지 파마 손님이 있는 날이면 퇴근시간은 밤 9시를 훨씬 넘기기 일쑤다.

오전 9시부터 하루 12시간 가량 고된 노동을 하면서도 자신들에게 연장근로·야간근로 수당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지, 40만 원대에 불과한 임금이 최저임금보다 낮은지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선배들도 이 같은 고생을 해왔기 때문에 당연히 참아야 하는 것으로 알았고, 하루 빨리 경력을 쌓아 버젓한 미용실 하나 차려 독립하는 것이 유일한 희망이었다.

박준미장 등 4곳 근기법 위반으로 고발

그러다가 정씨는 손님으로 미용실을 자주 찾던 서울경인지역평등노조 임미령 위원장을 만나면서 자신도 노동법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 ‘노동자’란 사실을 알았고, 참아야만 했던 부당 대우를 개선할 수 있는 자신의 법적 권리를 알았다. 막연했던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어떻게 떨쳐버릴 수 있는지 드디어 방법을 찾은 것이다.

임 위원장과의 몇 차례 만남 끝에 정씨는 평등노조 미용지부 지부장을 맡아 적극적으로 활동에 나섰다.

첫 번째 일은 노골적으로 근로기준법을 위반하는 사업주에게 법에 맞게 개선을 요구하는 것이었다. 정 지부장은 노조와 함께 체인화되어 있는 박준미장, 이철 헤어커커, 이가자 미용실, 박승철 헤어스튜디오 등 대형 미용실 4곳을 근로기준법 위반, 최저임금법 위반, 4대 사회보험 미가입 등을 이유로 노동부에 고발했다. 미용노동자들의 임금, 근로조건, 4대 사회보험 가입 실태 조사도 했다. 노조는 이를 바탕으로 미용사들의 열악한 노동현실을 알리고 침묵하고 있는 많은 미용사들이 노조를 통해 정당한 권리를 찾아나갈 수 있도록 구체적인 사업계획을 마련할 예정이다.

현재 미용사 자격증이 있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60만 명에 이른다. 국내에 미용실이 8만 곳이나 된다고 하니 원장이나 사장인 미용사 외에 미용실에 고용돼 있는 미용사들은 얼추 50만 명이나 된다는 얘기다. 아직 노조 미용지부에 소속된 조합원은 100여 명에 불과하다. 하지만 정 지부장은 “노조 활동에 대해 아는 것이 없지만 동료들에게 우리도 당당한 노동자라는 것과 우리의 권리를 알려 정당한 노동권을 확보할 수 있도록 힘 닿는 데까지 해볼 생각”이라고 자신감을 내보였다.

앞으로는 미용실에 가면 반드시 물어보자. “제 머리를 손질하는 당신은 노조원입니까?”라고.

이정희 한국비정규노동센터 워킹보이스 취재편집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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