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01년 10월 2001-10-01   1315

청계고가도로의 그늘 아래

청계로

광교에 서서, 아니 광교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네거리의 한 귀퉁이에 서서 주위를 둘러본다. 남대문으로 들어온 사람들이 종로로 가기 위해 건너는 큰 다리였던 광교는 이미 사라진지 오래고, 그 주위에는 광교가 있던 시절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큰 건물들이 빙 둘러 서 있다. 아마도 그 시절에는 목멱과 백악이 늘 눈을 맞추고 있었으리라, 지금은 둘 사이에 높다란 건물들이 들어서서 산길이며 바람 길을 모두 막고 서 있지만.

광교 주위에 들어선 높다란 건물들 중에 가장 오래된 것은 조흥은행 본점이다. 몇 해 전에 현대식으로 외장 공사를 한 이 건물의 광교쪽 모퉁이에는 작은 다리 모형이 자리잡고 있어서 오가는 사람들의 눈길을 끈다. 그 아래에는 작은 연못이 있어서 사람들은 그곳에 동전을 던지기도 하는데, 그 돈은 어려운 이웃을 돕는 용도로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다리 모형은 다름 아니라 청계천의 복개와 함께 사라진 광교이다. 관광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싸구려 모조품을 떠올리게 하기도 하지만, 그나마 이런 모형이라도 만들어 놓아서 우악스럽게 사라져 버린 한 시대를 떠올릴 수 있다는 것이 다행스럽기도 하다.

역사의 죽음은 망각이다. 아무리 재주가 좋은 사람이라도 있었던 것을 없었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없었던 것처럼 만드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한 것 같다. 사람들로 하여금 있었던 것을 잊어버리게 하면 그렇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의 죽음은 망각이다. 사람들이 잊어버리는 순간, 역사는 죽어 버리는 것이다. 그 좋은 예를 광교에서, 그리고 청계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서울 안의 큰 개천이 폐천으로 전락 ,/b>

조흥은행 본점의 광교쪽 모퉁이를 돌아서 동쪽으로 향하면, 툭 트인 넓은 찻길 앞으로 삼일고가도로와 저 유명한 삼일빌딩이 보인다. 박정희(다카키 마사오) 시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건축물과 구조물이다. 문득 우습다는 생각이 든다. 일제의 군사학교를 두 곳이나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관동군의 장교로서 만주에서 독립군을 상대로 싸웠던 자가 자신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세운 건축물과 구조물에 ‘삼일’이라는 이름을 붙이다니. 그는 장난감을 가지고 놀듯이 역사를 가지고 놀았던 것이다.

본래 ‘개천’으로 불렸던 청계천은 서울 안의 가장 큰 하천으로서 여러 용도로 사용되었다. 그러나 가장 큰 용도는 역시 하수구였다. 이 때문에 청계천은 도시화의 급진전과 함께 급속히 더러워졌으며, 더욱이 그 옆으로 판자촌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어, 결국은 서울의 가장 큰 애물단지가 되고 말았다. 서울을 멋지게 탈바꿈시켜서 ‘조국근대화사업’의 성과를 널리 과시하고자 했던 박정희에게 이런 청계천은 아주 좋은 사업거리였으리라.

청계천을 복개해서 그 위에 고가도로를 놓겠다는 구상은 원래 일제가 내놓은 것이었다. 이 구상은 1957년부터 시작되어 결국 박정희에 의해 완성되었다. 뛰어난 일제군다운 치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다. 일제로서는 서울의 본래 모습이 마구잡이로 파괴되든, 하부구조가 부실한 상태로 남아 있든 별 문제가 아니었을 것이다. 그저 번듯한 외관을 갖추고 나름대로 도시생활을 영위할 만한 공간이 될 수 있다면, 아마도 그것으로 만족했을 것이다. 그런 일제의 의도를 박정희가 완성시켰던 것이다.

청계천은 아스팔트로 뒤덮이고 말았다. 이로써 ‘개천’(開川)은 ‘폐천’(閉川)이 되어 버렸다. 그리고 ‘폐천’(閉川)은 ‘폐천’(廢川)이기도 하다. 복개는 하천의 죽음인 것이다. 그것은 생태적인 의미에서 그럴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의미에서도 그렇다. 복개되어 세상과 호흡할 수 없는 하천은 생태적으로 죽은 하천이다. 그리고 시간이 흘러 사람들이 그곳에 하천이 있다는 것을 잊게 되면, 결국 그 하천은 역사적으로도 죽은 하천이 되고 마는 것이다. 청계천은 무도한 무리에 의해 이런 비참한 운명을 맞아야 했던 것이다.

자연과 역사를 죽인 대가로 ‘근대화’를 이루겠노라고 그들은 호언했다. 본래의 자연과 역사가 빚어낸 문화와 삶은 없애 버려야 하는 너절한 쓰레기와 같은 것이라고 그들은 주장했다. 분명히 청계천은 이름처럼 맑고 깨끗한 곳이 아니었다. 반드시 어떤 대책이 필요했다. 그러나 복개가 그 대책은 아니었다. 이름 그대로 청계천을 맑고 깨끗한 곳으로 만드는 것이 그 대책이어야 했다. 그러자면 무엇보다 서울의 하수시설을 제대로 정비하기 위해 힘을 쏟아야 했을 것이다.

파리에서는 ‘하수도 관광’을 할 수 있다. 그곳의 하수도는 커다란 지하 굴과 같아서 사람들이 그 안에서 여러 가지 설비들을 이용해서 하수를 처리할 수 있다. 그리고 심지어 관광의 대상으로까지 이용되는 것이다. 많은 노동자들이 그 길고 긴 하수도 안에서 말 그대로 구슬땀을 흘리고 있다. 그런 덕분에 아름다운 파리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어디 파리뿐인가? 이름난 근대 도시들은 모두 튼튼한 하부구조 위에 건설되어 있다.

하부구조를 돌보지 않고 멋있는 상부구조를 탐하는 것은 이를테면 염불은 하지 않고 잿밥만 먹으려 드는 것과 같다. 하부구조가 부실한 도시는 겉모습이 아무리 멋지더라도 제대로 된 근대 도시라고 할 수 없다. 서울이 그 좋은 예이다. 광교에서 청계로로 접어드는 길목에서는 광케이블 매설공사가 한창이었다. 보도를 어지럽게 파헤쳐서 광케이블을 깔아놓고는 다시 흙으로 덮고 보도블록을 까는 식이다. 첨단기술의 상징인 광케이블이 가장 후진적인 방식으로 설치되는 것이다. 청계천의 박정희식 근대화는 아직도 이렇게 계속되고 있다.

청계천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열려 있어서 살아 있던 하천을 떠올리는 사람은 이제 많지 않다.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은 늘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삭막한 고가도로와 밤이면 유령의 거리로 변해 버리는 그 주위의 상가를 떠올릴 것이다.

본래 삼일고가도로로 불렸던 청계고가도로는 서울의 교통망을 입체화하여 서울을 근대화한 구조물로 평가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실 청계천의 복개와 마찬가지로 허울뿐인 근대화였다. 설계자조차 불분명한 이 고가도로는 그야말로 얼렁뚱땅 지어진 구조물이었다. 주한 미군이 이 고가도로를 이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은 이미 잘 알려져 있다. 원천적으로 부실한 구조물이기에 이용하지 못하도록 한다는 것이다. 경부고속도로가 그렇듯이 이 고가도로도 아마 원래의 건설비보다 이후의 보수비가 훨씬 더 많이 들었으리라. 아무리 정치적인 과시를 목적으로 급조된 구조물이라고는 해도, 그 정권이 조금이라도 신실했더라면 이렇게 엉망으로 만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원천적으로 부실한 구조물이기는 했지만, 박정희는 이 고가도로를 애용했던 모양이다. 심지어 박정희를 위해 이 고가도로를 만들었다고도 한다. 워커힐을 좋아한 박정희가 시내의 교통에 구애받지 않고 단숨에 그곳으로 갈 수 있도록 이 고가도로를 놓았다는 것이다. 박정희는 호젓하고 경치도 일품인 그곳에서 술도 마시고 여자와 잠자리도 즐겼다고 한다. 그러니까 청계고가도로는 박정희의 ‘유흥로’였던 셈이다. 그런 구조물에 삼일고가도로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그의 낯짝은 두꺼웠다.

설계자가 밝혀지지 않은 청계고가도로

청계고가도로는 물론이고 그 아래 청계천을 복개하고 닦아 놓은 청계로도 완전히 자동차만을 위한 길이다. 사람들은 오직 지정된 횡단보도를 이용해서만 이 길을 건널 수 있다. 횡단보도가 있는 곳을 빼고 고가도로의 다리 사이는 모두 철망으로 막혀 있다. 차들이 멋대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으려는 뜻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사람들이 아무데서나 건너는 것을 막기 위한 설비일 것이다. 철망이 없는 어떤 곳에서 길 가운데에 종이상자로 몸을 뉘일 공간을 만들어 놓고 낮잠을 자고 있는 늙은 노동자가 있었다.

서울에서 가장 아름다운 곳이 될 수도 있었을 청계천은 복개되어 버리고 그 위에 고가도로까지 놓여 일대 전체가 늘 그늘에 덮인, 서울에서 가장 삭막한 곳이 되고 말았다. 길가에는 공구상가가 길게 늘어서 있고, 그 끝에서는 다시 의류상가가 길게 이어진다. 품목은 크게 다르지만 길가 풍경은 별로 다르지 않다. 보도는 사람들이 편하게 오가는 보도라기보다 물건들을 늘어놓는 노천 진열대에 가깝다. 모든 상점들이 반쯤은 노점상인 것처럼 보인다.

청계로의 길가는 어수선할 뿐더러 지저분하기도 하다. 필요한 물건을 사기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사람들은 구태여 이곳을 찾아오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공구상가는 의류상가보다 훨씬 나은 편이다. 찾아오는 사람들이 그렇게 많지 않고 노점도 드물기 때문에 의류상가에 비해 공구상가의 보도는 한산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의류상가의 보도는 한마디로 북새통 그 자체이다. 그야말로 치열한 생존의 격전장이다. 그러나 그것은 아귀다툼 따위와는 거리가 먼, 숙연한 기분마저 들게 되는 생생한 삶의 현장이다.

골목길을 통해 공구상가의 안 동네로 들어가면 길가와는 다른 모습들을 볼 수 있다. 이곳에서는 일제 때 지어졌을 법한 낡은 건물들도 아직 많이 남아 있다. 아마도 좀더 시간이 지나면 어떤 식으로든 결국 재개발되어 사라지고 말 것이다. 그러나 예컨대 무교동 같은 식으로 이런 동네들을 모두 재개발해 버린다면, 도대체 서울에는 어떤 역사가 남아 있게 될까? 일제 때 지어진 듯한데 형태는 그대로 둔 채 멋있게 개조한 2층 벽돌 건물이 있었다. 이런 식의 개조가 도심 재개발의 주요한 방식으로 바뀌어야 하지 않을까?

기존의 것을 밀어 없애고 완전히 새로운 것을 밀어넣는 방식의 재개발은 서울처럼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에는 도무지 걸맞지 않는다. 새로운 것이 거대 자본의 거대 빌딩이라면, 그런 식의 재개발은 더욱더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는 생태적으로, 역사적으로, 문화적으로 문제일 뿐만 아니라, 기존의 동네에 살고 있던 가난한 사람들을 내쫓는 것이기 때문이다. 직선으로 곧게 뻗은 청계로의 옆에는 여전히 미로 같은 골목길들이 놓여 있고, 그 골목길 안에서는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다양한 사람들이 다양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곳에는 낮은 지붕 위를 예쁜 꽃밭으로 일구어 놓고 사는 사람도 있다. 이런 삶을 존중하고 배려하는 재개발이야말로 서울에 적합한게 아닐까?

공구상가를 따라 의류상가 쪽으로 걸어가다 보면 세운상가를 만나게 된다. 지저분하고 삭막한 구조물들이 층층으로 얽혀 있어서 빨리 지나치고 싶은 생각이 든다. 가장 아래의 청계천에는 하수가 흐르고, 그 위의 청계로에는 자동차들이 흐르고, 또 그 위의 세운상가 보도로는 사람들이 흐르고, 또 그 위의 청계고가도로에는 다시 자동차들이 흐른다. 세운상가 보도 위로 올라가니 젊은이들이 비디오 찾느냐고 물어온다. 그들은 이 보도로 올라오는 남자라면, 일단 포르노 비디오를 사러 온 사람으로 여긴다.

시민들에게 교통에 구애받지 않고 서울의 간선도로들을 가로지르며 시내를 구경할 수 있는 만보로를 제공하겠노라던 김수근의 구상은 철저하게 실패하고 말았다.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적어도 그렇게 우악스러운 주상복합건물을 올려놓지는 말아야 했다. 세운상가가 들어선 자리는 원래 일제 때 공습 대피용 소개로로 만들어진 빈터였다. 전후에 빈민들이 몰려들면서 이곳은 서울 최대의 유곽지대가 되어 버렸다. 만일 이곳을 녹지공원으로 재개발했더라면 서울의 모습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다. 그랬더라면 북악에서 창경궁과 종묘를 지나 남산으로 이어지는 녹지축이 형성되어 서울의 자연과 역사가 지금보다는 훨씬 더 생생한 상태로 살아날 수 있었을 것이다.

대체로 전문인들을 상대로 하는 공구상가와 는 달리 수많은 대중들을 상대로 하는 의류상가는 커다란 전문상가의 겉모습을 갖추고 있다. 그런데 왜 하필이면 이곳의 이름은 ‘평화상가’일까? 전태일의 삶과 죽음이 말해 주듯이 예전에 이곳의 노동자들에게 ‘평화상가’는 결코 평화로운 곳이 아니었다. 지금은 어떨까? 겉으로 보기에 ‘평화상가’와 그 주위는 참으로 많이 바뀌었다. ‘평화상가’도 칙칙한 모습을 버리고 번쩍거리는 빛깔로 바뀌었지만, 더 큰 변화는 말 그대로 세계 최대의 의류상가들이 주위에 들어선 것이다.

‘국제적인 명소’라면 ‘국제적인 명소’답게

이제 이곳에서 ‘노동자도 인간이다’라고 외치며 자기 몸을 살랐던 전태일의 모습을 찾아보기는 어렵다. 청계 고가도로의 그늘 아래서 사람답게 살 권리를 차압당한 채 노역에 시달려야 했던 전태일의 삶은 이제 그저 먼 과거의 일이 되어 버린 듯하다. 이곳은 젊은이들의 노역장에서 젊은이들의 쇼핑장소이자 문화마당으로 변해 버린 것처럼 보인다. 더욱이 이곳은, 중국과의 경쟁에 쫓기고 있지만, 세계 각지에서 많은 손님들이 찾아오는 ‘국제적 명소’이기도 하다.

전태일이 자기 몸을 사르고 어느덧 30년의 세월이 흘렀다. 눈에 잘 띄지는 않지만 이제 전태일을 기리는 기념판이 이곳의 보도 어딘가에 설치되어 있기도 하다. 전태일이라는 이름조차 함부로 입에 담지 못했던 시절에 비하자면 사뭇 큰 변화가 아닐 수 없다. 그 동안 이곳은 겉모습뿐 아니라 그 속살도 적지않은 변화를 겪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여전히 치열한 생존의 격전장이고, 주위에는 여전히 고된 노동에 시달리는 많은 노동자들이 있다. 변한 것도 많지만 변해야 할 것도 여전히 많은 것이다.

소비자의 처지에서는 잠깐이라도 앉아 쉴 곳이 너무나 아쉽다. 상가의 겉모습을 화려하게 바꾸고 길가에 화단을 만들어 놓기도 했지만, 잠시 앉아 숨돌릴 곳조차 없기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다. 이런 정도의 여백은 있어야 정말 ‘국제적 명소’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겉모습만 그럴 듯하게 꾸며 놓는 것은 소비자를 배려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소비자를 현혹하기 위해 화장술을 이용하는 얕은 상술일 뿐이다. 정말 필요한 것은 인파에서 벗어나 잠시라도 앉아 쉴 수 있는 빈틈이다.

가장 크게 변해야 할 것은 이곳의 지배적인 경관이다. 청계고가도로로 상징되는 이곳의 지배적인 경관은 많은 문제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전혀 변하지 않았다. 긴 호흡으로 서울의 미래를 생각한다면, 청계천의 복구를 진지하게 검토해야 한다. 서울의 역사와 자연을 복원한다는 점에서나, 서울을 사람들이 살고 싶어하는 도시로 만든다는 점에서나, 청계천의 복구는 어렵지만 분명히 긴요한 시대적 과제이다. 원천적으로 부실한 구조물인 청계고가도로를 철거하고 시커먼 아스팔트를 걷어 내서 청계천을 이름 그대로 맑고 깨끗한 도심 속의 하천으로 되살려야 한다.

오늘도 청계고가도로의 그늘 아래로는 수많은 차량들이 빠르게 흘러가고 있다. 그 아래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 유폐된 채, 또한 대다수 사람들에게서 완전히 잊혀진 채, 한강으로 흘러가고 있는 청계천은 다시 살아날 때를 꿈꾸고 있다. 그렇게 다시 살아난 청계천을 보고 싶지 않으신지?

홍성태 상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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