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1758

형사와 노닥거린 선배에게 던진 비수

97년 초의 일이다.

외출에서 돌아온 나는 사무실에서 낯선 손님을 발견했다. 다른 간사와 얘기를 나누는 그의 태도가 어찌나 자연스러운지 둘은 잘 아는 사이처럼 보였다. 나는 인사라도 할까하며 다가갔고 그와 얘기를 나누던 간사도 눈치를 챈듯 말을 끊었다. 내가 ‘아무개입니다’ 하고 인사를 하자 그는 벌떡 일어서며 “마포서 정보과에 새로 부임한 ○○○입니다. 잘 부탁합니다”라고 말했다.

잘 부탁하긴 뭘 잘 부탁해! 예상이 완전히 빗나간데다, 형사 특히 사복형사라고 하면 본능적으로 거부반응을 일으키던 나는 치미는 화를 참으며 그를 쫓아낼 궁리를 시작했다.

그때만해도 단체에 대한 사찰이 노골적이었다. 우리 단체도 귀찮게 구는 형사들이 있었는데 우리는 이들의 사무실 출입을 엄격하게 막아왔다. 선임 형사는 주로 전화를 이용했고, 우리도 웬만하면 원하는 ‘정보’를 주는 것으로 협조했다. 그리고 선임 형사는 사무실 출입만큼은 자제했고, 우리도 그 점을 높이 평가했다. 그런데 새로 온 형사가 우리의 ‘협력체제’를 무너뜨린 것이다. 게다가 이번 형사는 눈이 쭉 찢어지고 광대뼈가 튀어나온 것이 영락없는 ‘짭새’였다.

잠깐 생각끝에 나는 싸늘하게 말했다. “형사님, 시민단체를 잘 모르시는 것 같은데, 여기는 형사님이 드나들 곳이 아닙니다. 회원들이 수시로 찾아오는데 형사가 있으면 그분들이 위축되지 않겠어요?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저에게 전화주세요.” 그리고 그에게 명함 한 장을 쥐어주면서 등을 떠밀다시피 돌려보냈다. 간단하게 ‘처리’했다는 생각에 무척이나 뿌듯해했다. 그러나 며칠 후….

외출에서 돌아온 나는 ‘그 형사’와 ‘그 간사’가 며칠 전과 똑같은 자세로 ‘담소‘를 나누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나는 거의 본능적으로 소리쳤다.

“아저씨! 내가 오지 말라고 했잖아요. 당장 나가요!”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그는 어이없다는 표정만 지을뿐 아무말도 못했다. 사실 놀라기로 치면 그보다 내가 더했다. 내 목소리가 아주 이상하게 나왔기 때문이다. 주춤거리는 그에게 다시 다그쳤다. “빨리 나가란 말이에요∼”

그는 일그러진 얼굴로 “내∼참!”하며 사라졌다.

‘주적’이 사라지자 다음 차례는 ‘그 간사’였다. 그는 간사가 된 지는 얼마되지 않았지만 오랫동안 회원활동을 했고 나이도 나보다 네살이나 많았다. 하지만 나는 도끼눈을 치켜뜨고 “형! 뭐하는 거예요. 원칙 좀 갖고 일하세요!”하며 면박을 주었다. 그 때 그가 자신을 합리화하는 어떤 말을 했다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 지 모른다. 다행히 그는 대꾸가 없었는데,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로 보아 화가 났음을 알 수 있었다. 사무실 분위기는 썰렁해졌다.

나는 사무실을 나왔다. ‘나이 어린 여자라고 내 말을 무시한 거야.’ 형사에 대한 또 다른 분노가 솟아난 나는, 맥주를 한 캔 사서 홀딱 마셔버렸다. 그리고 한 시간쯤 홍대앞을 배회하며 붕어빵, 떡볶이 등으로 기분을 달랬다. 배가 불러서일까. 기분이 좀 나아지면서 내가 심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무실로 돌아온 나는 그 간사에게 한마디 툭 던졌다.

“아깐 내가 심했어요. 하지만 형도 생각 좀 해보세요.”

“……”

그 후로 형사는 오지 않았다. 또 왔는지 모르지만 내 눈에는 띄지 않았다. 서로 민망해진 우리도 더 이상 그 얘기를 하지 않았다.

돌이켜봐도 그 형사에게는 미안하지 않다. 부당한 일에 그 정도의 수모는 당연하니까. 다만 함께 일하는 사람을 배려하지 못한 미안함은 계속 남는다. 늦었지만 그에게 한마디. “형! 그 때 내가 발악할 수 있었던 건 아마 덩치좋은 형이 옆에 있었기 때문일거야.”

김유진 민주언론운동시민연합 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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