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8년 11월 1998-11-01   661

한국판 문화혁명을 기다리며

한국판 ‘문화혁명’을 기다리며

독일의 전라도 땅, 작센 지방

「느티나무」 아래 평상과 멍석이 없다.

물난리 나던 지난 여름 ‘IMF 기념’ 차 연구자료를 수집한다는 명분으로 참으로 오랜만에 공부하던 독일로 날아갔을 때,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끈 것은 옛 동독 땅을 한번 찾아보는 일이었다. 서백림에서 학교를 다녔으면서도 옆에 나란히 붙어 있던 동백림을 건네다보지도 못했던 것은 비단 육중한 장벽 때문만은 아니었다. 한국사회에 겹겹이 둘러쳐진 이념적 가시울타리의 위력은 대양을 건너 이 유럽대륙에서까지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고 있었던 것이다.

세계에서 거의 유일하게 공산권 나라로 입국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국민으로서의 원한에 분풀이라도 하듯 나는 기차를 타고 우선 베를린에서 가까운 드레스덴과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이 두 도시들은 작센 주(州)의 중심지이고, 드레스덴은 그 수도이기도 하다. 작센 지방은 독일의 역사로 보면 저항의 전통을 지닌 곳이다. 독일의 전라도라고나 할까.

가까운 역사만 보더라도 우선 마틴 루터가 종교개혁의 불을 지핀 비텐베르크(Winttenberg)가 바로 이 지역에 있다. 그가 태어난 아니제나흐(Eisenach)는 1800년대 후반 아우구스트 베벨(August Bebel)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Wilhelm Liebknecht)가 프러시아에 저항하는 독일 노동운동의 깃발을 꽂은 곳이다. 그리하여 프러시아에 기반을 둔 라싸알레주의적 노동운동 세력에 맞서 이른바 ‘아이제나허’라 불리는 독일 노동운동의 양대세력 중 하나가 건립되었다. 결국 1875년 라싸알레 추종 집단과 ‘아이제나허’는 바로 이 작센의 고타 시에 모여 통합을 이룸으로써 새로운 당강령을 채택하기도 했는데, 그 유명한 맑스의 『고타강령 비판』은 바로 라싸알레주의적으로 채색된 이 강령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이었던 것이다.

다른 한편 루터가 다닌 에어푸르트 대학은 1891년 세계 최초의 맑스주의적 당 강령이라 불리는 『에어푸르트 강령』을 채택한 에어푸르트 시에 있다. 이 에어푸르트 당 강령은 무엇보다 이론과 실천의 극적인 괴리를 담고 있었다. 이 강령의 이론 부분은 카우츠키(Kautsky)가, 그리고 실천 부분은 베른슈타인(Bernstein)이 각각 기초한 것이었다. 한마디로 말하면 계급투쟁을 통한 반자본주의적 혁명을 역설하는 혁명적 이론과 사회적 모순을 자본주의 체제 내에서 개선하고자 하는 개량적 실천 사이에 모순적 긴장이 이미 당강령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것이었다. 이를테면 이 강령은 요컨대 사회운동에 나타나는 명분과 실천 간의 극명한 모순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보여주는 역사적 기념품인 것이다. 그리고 그후 입으로는 혁명을 떠들면서도 손발로는 타협과 개량을 더듬던 독일 노동운동의 역사는 분열과 침체를 면치 못하였다.

어쨌든 이 작센 지방에서는 최근 소련 및 동유럽 공산권이 막을 내리기 시작할 무렵인 1989년 바로 이 라이프치히를 중심으로 동독 공산정권 타도를 외치는 군중의 성난 파도가 넘실거렸다. 군중들은 “우리는 하나의 민족"(Wir sind ein Volk)이라는 구호 밑에 뭉쳐 독일 통일을 향한 인민적 염원을 불태우기도 했다. 바로 이 라이프치히는 또 1800년대 초 나폴레옹이 유럽을 석권하며 이 지역으로 밀어닥쳤을 때 그에 저항하다 산화한 민중의 죽음을 기리는 ‘인민학살 기념탑’이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나폴레옹은 결국 연합군에 의해 패퇴당하였다.

인연과 인간애

나는 어느 노부부가 운영하는 민박집에서 드레스덴의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곧바로 라이프치히로 향했다. 참으로 빈틈없고 정갈하고 친절한 가정집이었다. 그러면서도 우리나라 장급 여관 숙박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금액으로 다음 날 아침 자기들이 먹는 식대로 조반까지 차려주었다. 공산주의를 체험해서일까, 이 노부부에게는 서유럽 사람들에게서는 찾아볼 수 없는, 화폐를 뛰어넘는 따스한 인간미가 촉촉히 스며들어 있었다.

인연이나 인간의 만남이라는 게 이렇게 환장할 정도로 소중하고 애틋한 것일 줄이야. 그런 느낌이 날이 갈수록 더욱 뜨거워만지니 이 사춘기 소년 같은 철없는 감상은 도대체 언제쯤이면 사라지게 될까. 다음날 아침 하룻밤 잔 민박집 노부부와 다음에 또 보자며 포옹까지 하곤 헤어졌다. 글쎄, 다음에 또 만날 수 있을까. 허나 언어가 다르고 피부색깔이 다르다고 해서 인종의 차이가 진하게 느껴질까, 또 순진하게 뛰노는 이국 어린 애를 보면서도 인종차별 같은 것이 가슴에 와닿을 수 있을까? 인연이란 아마도 인간에 대한 사랑, 요컨대 보편적인 인간애를 일컫는 것일 게다. 예컨대 유럽에서 ‘원수를 사랑하라’라는 살벌한 애정윤리가 기염을 토하고 있을 때, 우리에게는 전통적으로 ‘이웃사촌’이라는 수줍고 순박한 인정이 맴돌고 있었다.

헌데 나는 그림엽서를 한 장 사러 들어간 드레스덴 시내의 한 조그만 가게에서 타일랜드 여성을 만난 적이 있다. 독일 남자와 결혼해 독일에 온지 겨우 한 달밖에 안된다며 독일어는 이제 갓 배우기 시작했다면서 영어로 띄엄띄엄 말하는 여인이었다. 그녀는 아마 고국을 떠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인지, 내가 같은 아시아 사람이라고 고향 사람 비슷하게만 생겼어도 무조건 반가운 모양이다. 그녀가 어떤 사연으로 이곳까지 흘러들어오게 되었는지는 모르지만 나 역시 거리 구경을 다니면서 일부러라도 자꾸 그 가게가 기웃거려졌고, 그 태국 여성도 나를 발견하기만 하면 반갑게 두 손을 흔들어대었다.

나는 혹시 자연스레 안으로 굽는 팔을 억지로 바깥으로 돌리려 애쓰고 있는 건 아닌가 하고 자문해보기도 했다. 피는 수혈만 가능한 것이지 송두리째 바꿔버리는 것은 불가능한 것인가?

라이프치히와 KBS (전국노래자랑)

라이프치히에 온 날은 토요일이었다. 저녁 기차는 나를 다시 베를린으로 모셔가야 했다.

토요일 오후 사람의 왕래가 잦은 옛 시청 건물 앞 공터에 가설무대가 하나 세워졌다. 그 무대 윗 쪽에는 ‘에너지 절약 주간’이라는 선전문귀가 붙어 있었다. 말하자면 에너지 절약을 호소하는 어느 시민단체가 이런 현수막을 무대 위에 내걸고 악단을 내세워 두드리고 노래를 부르며 자신들의 취지를 조용히 알리고 있는 모양이었다. 얼핏 보면 무슨 동네 음악회인지 사회운동성 집회인지 전혀 알아볼 수 없도록 분위기 자체가 그렇게 부드럽고 자연스러워 보일 수 없었다. 청중들은 땅바닥에 깔린 의자에 쭈그리고 앉아 음악소리에 맞춰 손바닥을 두드리며 노래를 따라 부르고 해서 무슨 축제를 벌이는 듯했다. 서 있는 사람들도 물론 몸을 흔들어대고 있었다. 입장권이라는 게 있을 리 없다. 라이프치히에서도 벌건 대낮에 이런 대중 모임을 가질 수 있다는 것은 물론 통일 이후에 얻은 자유 탓일 게다.

나는 아직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것을 보면 눈시울과 가슴이 뜨거워진다. 그게 무슨 일이든지간에 일단 벌이기만 하면 온몸을 바쳐 혼신의 열정을 한데 모으는 그 미친듯한 몰두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는 듯한 나의 철없는 열광 때문이리라. 헌데 손톱만한 돋보기도 촛점을 하나로 모아 종이 부스러기라도 태우지 않는가. 나에게도 “미친 사람의 눈빛"을 그렇게도 동경하던 시절이 있었다. 하여 요즘도 이따금 학생들에게 선생이랍시고 그런 걸 요구할 때도 있다. 물론 그게 모두가 다 미친 사람이 되라는 당부가 결코 아님을 그들도 잘 알고는 있다.

이 악단 멤버들은 자신들을 소개했다. 오늘 새벽 보쿰, 프랑크푸르트, 게다가 미국 인디애나 등지에서도 모여들었다고 한다. 그래서 오리지널 미국 컨트리 송을 부르는 독일 아가씨도 등장한다. 이들이 독일 전역에 널리 알려진 유명가수들이 결코 아님은 물론이다. 사회의 개선과 공익추구를 위해 여기저기서 자발적으로 그리고 헌신적으로 모여든 뜻을 같이 하는 장인들이었다. 청중들도 나처럼 제 발로 걸어와 이렇게 자연스럽게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그룹의 활기차면서 꾸밈없는 희생정신과 헌신, 그리고 기다렸다는 듯이 흥겹게 몸을 흔들어대는 청중. 애기를 안고 자연스레 춤을 추는 독일 아줌마도 보이고, 무대 아래서는 어린애들도 서로 손잡고 춤을 추어대고 있다. 흘러간 인기가요 같은 게 나올 때는 청중들도 향수에 젖는 듯 목청껏 따라 부른다. 열광하는 악단과 열광하는 청중, 그리고 저 기막힌 자연스러움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하는 것일까. 이런 걸 새로운 종교라 부를 수는 없을까? 일종의 ‘국제적 연대’의 발돋음인지, 뉴올리언즈 노래도 흘러나온다. 노래를 쬐끔이라도 할 줄 안다면 나라도 그냥 성큼 무대로 뛰어오르고 싶을 정도였다.

저 자연스러운 도취는 도대체 어디에서 비롯하는 것일까? 우리는 그렇게도 신명을 사랑하는 민족인데도 왜, 왜, 그러하지 못하는것일까?

그러한 현상은 악단과 청중의 혼연일치를 불러일으키는 탁월한 대중동원과 조직력 때문일까, 아니면 밖으로 내건 사회개혁적 구호에 대한 드넓은 공감대의 형성 탓일까, 또 아니면 그들이 쓰잘 데 없는 일로 잔 걱정 할 필요조차 없는 풍족한 생활의 여유를 누리고 있어서 일까? 어쨌든 분명한 것은 그 집회가 어린이, 젊은이, 학생, 노동자, 남녀 노소 등 등이 가릴 것 없이 모여든 사회개혁을 위한 합창이며 마을축제임이 분명하다는 사실이다.

헌데 이 독일인들은 자기네 땅에서 열광하고 도취하는데, 나는 왜 홀로 또 이렇게 숙연해져야 하는 것일까? 나는 또 버릇처럼 우리 한국에서 이런 생김새의 집단 모임이나 운동 유형이 생겨나고 번져나갈 수는 없는 것일까 하는, 사회과학을 공부하는 천진난만한 책상물림다운 유치한 호기심을 발동시키고 있었다.

그때 나에게는 홀연히 KBS TV가 주최하고 방영하는 (전국노래자랑) 프로그램이 떠올랐다. 이 자연스러운 열기와 청중 운집이 서로 닮았다는 인상 때문이었을까. 하기야 내가 가장 좋아하는 텔레비젼 프로가 바로 이것 아니던가.

우리의 이 가설무대에는 오랫만에 읍내 미용실에라도 다녀왔음직한 농부의 아내도 출연하고, 일터에서 잠시 나들이 나온 듯한 더벅머리 총각도 나타난다. 이곳에는 몸으로 부딪치며 사는 사람들이 몸으로 부르는 노래와 춤이 있다. 무말랭이처럼 볼품없고 괄시받는 사람들끼리 한데 어울려 서로의 처지와 형편에 맞게 애환을 나누고 달래기 위해 그들은 강제동원도 없고 막걸리 선심공세도 있을 턱이 없는데 말없이 이곳으로 백사장처럼 모여드는 것이다.

이리 채고 저리 쫓기며 한 평생을 잡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가설무대를 에워싸고, ‘이 고장의 명카수, 이 고을의 인간문화재 OOO’를 응원하기 위해 열심히 손바닥을 두들겨대는 것이다. “땡 해도 좋응께 최선을 다해라"라는 현수막을 흔들어대는 응원단의 표정이 훈훈해서 즐겁고, “출연 직전까지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여 물론 자신만만하다"고 기염을 토하긴 했으나 노래를 시작하자마자 ‘땡’ 소리의 기습공격을 받고서는, 그래도 그저 씽긋 웃어버리고마는, 생선회처럼 싱싱한 웃음이 소탈해서 좋다.

과거를 헤아릴 길 없는 81세의 할머니가 가설무대로 올라와서는 “거어친 꿈이 기이펐나"로 끝나는 ‘선구자’ 노래를 두 손을 깍지낀 채 눈물을 글썽이며 열창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또 눈물을 글썽이게 만든다. 운전복을 그냥 입고 돈주머니는 놓칠새라 한손에 움겨쥔 채 무대로 뛰어오르는 택시기사도 있고, 깊숙한 돈주머니가 두 개 달린 비닐 앞치마를 걸치고 비늘처럼 번쩍거리는 이를 드러내며 등단하는 생선장수 아줌마도 있다. ‘시청 위생과 소속 청소부’라고 자기 신분을 밝힌 어떤 노인은 “타향살이 몇 해던가……"를 울부짖듯이 토해내고는 먼지 쌓인 황색 근무복을 털며 무대를 떠난다.

“동지 섣달 꽃 본듯이 날 좀 보소"라든지 “사랑이 꽃이라면 다시 피겠지" 하는 타령들은 또 얼마나 절묘한 표현법을 구사하고 있는가. 한 겨울의 꽃은 얼마나 귀중할 것이며, 다시 피는 꽃처럼 다시 피어나는 사랑은 또 얼마나 애틋할 것인가. 이처럼 허드렛 무리들의 염원은 이리도 가슴 찡하다. 어디 그뿐인가. “어차피 혼자 왔다가 어차피 혼자 가는데, 원망도 미련도 다 버려라. 오늘이 지나면 태양은 뜨는데, 내일을 위해 건배를 하자"거나 “세상살이 어렵고 서러울 때면 너털웃음 한번 웃고 술 한잔에 취해보자. 꽃잎이 진다고 청춘이 간다고 한탄말고 아쉬워마라"는 가사에 깃들어 있는 이들의 절규는 또 얼마나 가슴 사무치는 다짐으로 가득차 있는가. 이들은 한 많고 설움 많은 인생살이 속에서도 너털웃음을 웃으며 내일 다시 떠오를 태양을 여유롭게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이 (전국노래자랑)은 경상도에서 전라도로 건너뛰기도 하고 충청도 산골에서 강원도 바닷가로 내닫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에도 분단의 쓰라림은 어김없이 찾아든다. 진도에서는 노인네들이 더덩실 춤을 추며 진도 아리랑을 부르는데, 몽금포 타령은 마냥 입을 다물고 있다. 언제쯤이면 황해도 사리원이나 함경북도 명천 또는 압록강 하구의 용암포쯤에서 (전국노래자랑)이 펼쳐질 수 있을지, 갯지렁이 같은 주름이 옹골차게 박힌 황토빛 얼굴을 들고 몇 몇 노인들은 간혹 휴전선으로 가로막힌 북녘땅을 촉촉한 눈길로 응시하기도 하는 것이다.

한국의 사회운동, 그리고 소나기와 보슬비

그런데 이들은 과연 누구인가?

이들이야말로 바로 푸대접 받으면서도 우리 사회를 먹여살리고 키워나가는 장본인들 아닌가. 이들이 제 발로 찾아와 모여드는 우리의 (전국노래자랑) 무대 같은 것을 사회적 문제점이나 비리를 극복하기 위한 공개적이고 대중적인 문화집회 같은 것으로 만들어나간다면 어떨까? 우리의 사회운동단체들이 이러한 대중자발적인 거리의 문화공연과 문화집회를 통해 대중사회로 뻗어나갈 준비를 서둘러야 하지 않겠는가, 내 사념은 애매한 라이프치히에서 꼬리를 물고 이어졌다.

어쨌든 이곳에는 목청 높여 절규하기만 하는, 그리하여 비장하긴 하지만 겉으로만 맴돌아 물 위의 기름처럼 떠다니는 애국지사적 고군분투와 메아리 없는 절창, 그리고 비명소리 같은 게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 라이프치히에는 수줍고 어리숙해 보이지만 군중들과 더불어 노래하고 손바닥 두들기며 춤추는, 그리고 같이 호흡하고 신음하고 열광하는 사회 변혁의 넓게 퍼져나가는 단합의 수근거림이 조용히 파문처럼 번져가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끙끙대며 끄집어내는 수학공식 같은 것이 아니라, 가슴 밑바닥에서 대양의 파도처럼 울렁거리는 공감의 물결 같은 것이 이는 듯했다. 절창이 아니라 조용한 합창, 비명이 아니라 속삭임, 폭우처럼 쏟아지지만 이내 그쳐버리고마는 소나기가 아니라 부드럽게 내리지만 온몸을 꾸준히 적시는 보슬비와도 흡사한 무엇이 이 라이프치히 옛 시청 광장을 맴돌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한 사람이 천 걸음을 내닫는 것보다 백 사람이 다섯 걸음을 함께 내딛는 게 바람직하지 않을까. 혹 옛날 약장수들처럼 사물놀이패를 앞세우고 운동을 팔러나서면 또 어떨까?

우리는 치열하지만 거칠지 않고, 냉철하지만 비정하지 않은, 그리고 선량하지만 흔들림 없는 사회운동을 추구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접었다 풀었다 하며 고국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 지친 몸을 실었다.

혹시 지금 우리 사회운동의 나침반은 그 아래 평상과 멍석이 깔리지 않은 철학까페 「느티나무」 수준 정도를 가리키고 있는 것은 아닐까?

박호성 서강대 정치외교학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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