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평-야당 집권이 실패한 개혁 만회할 수 있을까?

최장집 저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정치인과 재벌들이 차리는 밥상에 눈이 먼 채, 학회장 선거과정 등에서 한국정치의 악습을 적나라하게 되풀이하는 한국 정치학계의 일반적 풍토 하에서 최장집 교수는 학자적 분수를 지키면서 시대의 현안을 분석하고 대안을 천착하는 데 몰두하는 보기드문 지식인이다.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나남, 1996)은 최 교수의 바로 그러한 자세와 열정이 농축되어 있는 최근의 역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한국민주주의의 이론』 연장선 위에서…

관심있는 독자는 다 알만한 일이지만, 이 책은 김영삼 정부가 출범할 무렵에 최 교수가 출간한 『한국민주주의의 이론』과 긴밀히 연관되어 있다.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에서 제시된 문제의식의 연장선 위에서, 지난 몇 년 동안 진행된 한국 민주화의 성과와 한계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고, 나아가 진정한 민주주의의 조건을 제시하면서 한국민주주의의 미래를 전망하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국민주주의의 이론』과 마찬가지로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 역시, 저자의 말마따나 “처음부터 어떤 체계를 갖추어 쓴 저작이라기보다는 그때 그때 요구에 따라 현실정치의 변화를 민주주의의 이론 내지는 실천이성적 관점에서 분석한 글들로 구성”되어 있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 전부를 대상으로 하기보다는 초점을 예의 한국 민주주의 문제에 맞추는 것은 저자의 의도와 주장에 누를 끼치지 않을 것이라고 믿는다.

최장집 교수는 한국정치 혹은 한국민주주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 있어서 비교/역사학적 맥락을 구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고 있다. 이 책의 제1부 「근대화와 민주주의의 역사적 조건」에서 김영삼 정부의 성격을 1940년대 해방의 역사, 1950년대 전쟁의 역사, 그리고 1960년대 이후 산업화의 역사에 투사하는 것은 그가 현대 한국정치 50년사를 자유자재로 왕래할 수 있는 역사적 안목을 보유하고 있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동시에 그는 한국민주주의의 문제를 남미나 유럽 등 다양한 외국의 사례들과 적절히 비교함으로써 역사적(혹은 한국적) 접근의 편협성과 폐쇄성을 성공적으로 극복하고 있다. 비교/역사적 시각으로 무장된 최 교수가 한국정치 혹은 한국민주주의를 설명할 때 가장 애용하는 개념은 이른바 수동혁명 혹은 보수적 근대화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김영삼 정부 하의 정치적 민주화 및 ‘위로부터의 개혁’은 역사적으로 볼 때 미군정 말기에 있었던 선거민주주의의 일괄 도입, 이승만 정권 하의 토지개혁, 박정희 정권의 산업화를 통한 근대화와 똑같은 원리를 재생산하고 있는 것인데, 이와 같은 현상은 세계사를 볼 때 한국만의 특이한 역사적 전통이라기보다는 근대국가 혹은 민주주의의 발전역사에서 가끔씩 목격되는 장면인 것이다. 그리하여 최 교수는 수동혁명, 보수적 근대화 혹은 변형주의의 개념을 통해 한국정치사의 중요한 특징을 제시하면서도, 한국의 사례를 비교정치학의 영역으로 위치시키려는 노력에 충실한 편이다.

발육부진의 한국민주주의 분석

최 교수에 의하면 한국의 민주주의 이행은 전반적으로 볼 때 공고화를 동반하지 않은 ‘반(半)이행’에 멈춘 것이며, 계층 및 지역적으로 볼 때는 ‘불균등한 이행’에 불과한 것이다. 우선 정치적 측면에서 군부권위주의로부터 탈각하고 정치개혁입법을 제정함으로써 확립된 절차적 민주주의의 이면에는 사회의 핵심적인 생산집단인 노동자와 농민의 정치참여를 가로막는 법적, 이데올로기적, 정치적 제약이 여전히 남아 있다. 경제적인 측면에서 금융실명제 등의 전격 실시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재벌기업의 헤게모니는 오히려 강화됐고, 특히 노동의 영역에서는 절차적 민주주의의 수준에서조차 과거와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또한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긴장을 완화시키고 화해를 도모하기보다는 흡수통일이라는 공식의 유혹에 빠진 채 공격적 강경정책을 선호함으로써 민주주의의 공고화에 해악적인 효과를 초래했다는 게 최 교수의 분석이다. 따라서 현단계의 한국민주주의는 ‘발육부진의 민주주의’(Creeping Democracy)로 평가되고 있으며, 문민정부 초기의 개혁 드라이브도 이제는 보수세력의 대해(大海)에 압도되어 애초의 기대와 효과가 현저히 감소되고 있는 것이다.

이로써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에서 나타난 비관적 예측은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에서 마침내 현실화되고 말았다. 그리고 그 원인이 바로 보수연합에 의한 집권이라는 김영삼 정부가 출범하게 된 방식 자체에 내재하고 있음이 확인됐다. 강력한 권한을 가진 대통령이 있어 ‘위로부터의 개혁’을 착수하는 데는 유리한 조건이 됐지만, 대통령 개인 중심의 개혁정치는 한국의 정치사회가─시민사회가 아니라─보수주의에 의해 주도되고 있다는 엄연한 현실의 벽을 넘어서지 못한 것이다. 정치사회의 보수성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통령과 국민을 직접 연결하는 ‘국민투표제적 민주주의’(Plebiscitary Democracy) 상황이 한때 연출됐으나, 이때 국가와 사회를 연결하는 강력한 기제로 등장한 여론정치의 주역, 곧 언론 또한 사실은 자체정화 혹은 사정개혁의 대상이 되어야 할 존재들이었다. 이런 점에서 이번에 최 교수가 언론의 문제를 건드린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국민주주의 공고화는 어떻게?

그렇다면 실질적 민주주의 혹은 민주주의의 공고화를 위한 국가적 전략은 무엇인가? 이에 대해 최 교수는 무엇보다도 정치개혁이 중요하다고 진단한다. 보다 구체적으로 그는 ‘협의체적 결정체제’ 또는 혼합정체를 제안한다. 그것은 “이익대표의 다원주의에 입각한 경쟁적 체제와 계급/계층이익 대표의 수준에서 기업과 노동을 중심으로 하는 생산자집단의 비공식적이지만 체계적인 참여를 결합하는 것을 가능하게 하는 체제”로 정의된다. 이는 시민권의 수준을 사회경제적 수준으로 진전시키고 계급갈등이 계급타협의 방식으로 완화 내지 해소되어 민주적 공동체 원리가 구현될 뿐만 아니라, 그러한 사회적 합의의 토대 위에서 자본주의 세계시장에서 한국국가의 활로를 개척할 수 있는 능동적 조건을 구비하는 것을 뜻한다. 최 교수가 ‘힘있는 민주주의’라는 다소 생소한 개념을 도입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맥락에서라고 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구현되기 위해서는 정치개혁이 ‘강경보수+중도연합’으로부터 ‘온건보수+중도연합’ 혹은 ‘중도’로 그 지배연합의 중심축을 이동시키고, 이를 통해 정치경쟁의 영역이 ‘중도+온건좌파’로까지 확대되는 정치지형의 변화가 필요하다고 본다. 그렇다면 이런 식으로 한국에서 민주주의가 공고화됐다고 말할 수 있는 시점은 언제쯤일까? 이에 대한 최 교수의 대답은 “야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할 때”이다.

『한국민주주의의 조건과 전망』은 김영삼 정부의 성격을 역사적으로, 이론적으로, 그리고 무엇보다도 비판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읽지 않고 넘어갈 수 없는 귀중한 학문적 기여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것들을 조심하면서 책장을 펼칠 일이다. 무엇보다 이 책은 한국의 제한적 민주화와 좌절된 개혁의 책임을 김영삼 정부의 ‘원죄’에 지나치게 집중시키고 있다. 그러나 민주주의의 공고화가 실패한 이유에 대해서는 현 정권의 태생적 한계 못지 않게, 정치사회 혹은 시민사회에 속한 대안적 정치/사회세력 고유의 한계와 무능도 마땅히 거론됐어야 했다. 이런 점에서 그는 『한국민주주의의 이론』에서 92년 대통령선거의 (실패) 결과를 ‘정치적인 문제이면서 또한 도덕적인 문제’라고 규정했던 것을 이번에도 되풀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과연 97년 대통령선거에서 “야당이 선거를 통해 집권할 때” 한국의 민주주의는 공고화되는 것일까? 최 교수가 지금 염두에 두는 것은 과연 어떤 야당이며 집권할 자격이 갖추어져 있다고 보는가? 모쪼록 집권 ‘야당’에 대한 최 교수의 기대가 다시 좌절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전상인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

정부지원금 0%, 회원의 회비로 운영됩니다

참여연대 후원/회원가입


참여연대 NOW

실시간 활동 SNS

텔레그램 채널에 가장 빠르게 게시되고,

더 많은 채널로 소통합니다. 지금 팔로우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