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7년 01-02월 1997-01-01   1544

특별기획-전자주민카드 미래체험기

98년 더 이상 프라이버시는 없다

시나리오 1-개인신상정보 유출로 박리다매형 범죄 가능

1998년 5월 8일, 서울 서초동에 사는 김길동 씨는 편지 한 통을 받았다.

“김길동 씨 귀하. 고향이 경남 하동이신데 나도 하동이오. 지난 해 8월까지는 개포동에 살았는데 이사갔더군. 부인 이미숙 씨도 안녕하시겠지. 댁의 따님 예슬이는 참 예쁘더군. 나도 예슬이처럼 열 살난 딸이 있는데 그만 불치병에 걸리고 말았소. 그러나 돈이 없어 치료를 못 받고 있소. 당신 수입이 한 달에 500만 원 넘는다는 걸 잘 아는데 그중 300만 원만 아래 계좌로 조용히 입금해주시오. 10일까지 돈을 입금하지 않거나 시끄럽게 하면 내 후배들이 흥분해 예슬이가 다칠지 모르니 명심하시오.”

진짜 딱한 사연이 있는 게 아니라 협박편지로 돈을 뜯어내려는 게 확실했다. 김씨는 신고할까 하다가 딸의 얼굴이 떠올라 마음을 바꿨다. 자기 고향이 하동이라는 것, 개포동에 살다가 이사한 것, 가족의 신상까지도 정확히 아는 것으로 보아 자기 가족을 겨냥해 주도면밀하게 뒷조사를 한 게 분명했다. 그렇다면 신고할 경우 진짜 보복을 할지 모른다. 딸 예슬이가 혼자 학교에 갔다오다가 납치되거나 불량배한테 다치기라도 하면…. 아찔한 생각에 김씨는 고개를 설레설레 흔든다. 다행히 요구액이 300만 원이면 그리 많은 돈이 아니다. 김씨는 다음 날 조용히 돈을 입금시킨다.

5월 11일, 한 지방은행에서 범인이 찾아간 돈은 3억여 원. 100여 명의 리스트를 뽑아준 관계자에게 사례비로 1억을 떼주고, 나머지 2억여 원을 어디에 쓸까 고민하는 범인의 입가에 흐뭇한 미소가 흐른다.

전자주민카드시대에 가능할 수 있는 ‘박리다매형 협박범죄’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전자주민카드의 주전산기를 한두 번만 돌리면 된다. 즉, 월 500만 원 이상의 고소득자(국민연금 자료) 중 13세 이하의 어린 자녀가 있는 사람(주민등록등본)의 명단을 파악, 그 사람의 본적과 전·현주소지, 가족사항(주민등록 자료)을 뽑으면 되는 것이다. 전산망에서 자료를 뽑아주는 관계자에게는 국민학생용 고급학습지 구독권유 편지를 보낸다고 하고 대신 두둑한 대가를 약속한다. 이렇게 확보된 100여 명의 리스트를 넘겨받아 각 주소지로 협박편지를 보낸다.

받은 사람들은 자신의 신상이 상당히 깊숙이 파악된 데 놀라 위협감을 느낀다. 그러나 요구금액이 그리 많지 않아, 앞의 김씨처럼 신고하기보다는 자녀의 안전을 생각해 조용히 입금시키는 쪽을 택할 가능성이 높다. 각 개인에게는 그리 많지 않은 액수지만 다 모이면 수억 원이 된다.

시나리오 2-정보기관의 신무기, 정보 장악해 총선 주도

2000년 2월. 곧 닥칠 4월 총선을 앞두고 정부여당에서는 후보자 선정작업을 하고 있다. 97년 대통령선거에서 승리한 개혁지향의 대통령은 대폭적인 물갈이로 정치판을 혁신하려 한다. 기존 의회로부터 번번이 제동을 당하면서 개혁의 지속을 위해서는 의회의 뒷받침이 절실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대통령은 비교적 젊고 신선한 전문가층을 대거 영입했다.

문제는 당선 가능성이다. 신진세력으로 교체하는 것은 좋지만 자칫 실패해 의석의 과반수를 얻지 못하면 개혁은 큰 타격을 받게 된다. 그러나 대통령은 내심 자신이 있었다. 신진 전문세력이 기성 정치인만한 지명도는 없지만 선거는 바람이 중요하다는 걸 잘 알기 때문이다. 개혁적이고 전문적인 소양을 갖춘 신진세력을 대거 전방에 배치, 바람을 일으키면 오히려 유권자들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다는 심산이다. 여당 핵심층도 이에 동조하는 분위기다.

그러나 각 선거구 후보자가 내정된 바로 다음 날 정보기관의 보고서 한 통이 대통령의 이러한 구도를 180도 뒤엎어버렸다. 내정된 신진세력 중 상당수가 당선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내용이었다. 당초 대통령은 정보기관의 보고서에 그리 무게를 두지 않으려 했다. 21세기를 맞아 정보기관의 업무행태도 대폭 개혁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신진세력에 대해 정보기관 측은 이전에도 몇 번 부정적인 보고서를 올린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 중엔 여론조사 자료도 있었는데, 원래 여론조사라는 게 조사하는 측의 의도가 개입될 소지가 많다는 걸 잘 알고 있어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은 달랐다. 기피인물들에 대한 음해라고 보기엔 근거가 너무 명확했기 때문이다. 또 후보자 내정 후 곧바로 당선 가능성을 분석한 보고서의 신속성에 대통령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대통령은 이 나라 정보기관의 위력에 감탄하면서 보고서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정보기관의 보고자료는 대략 다음과 같은 요지였다.

“우리나라 국민의 의식구조나 투표성향은 △나이(세대) △소득수준(계층) △출신지 등 세 가지 요인으로 결정된다. 상대적으로 고령자가 많은 선거구에서는 젊은 후보를 싫어한다. 또 중상류층이 많은 지역에선 개혁보다 보수 성향을 선호한다. 출신지에 따른 투표 성향은 거의 결정적이다. 앞의 두 가지 요소가 맞아떨어져도 해당 선거구 유권자의 출신지 분포와 의원 후보의 출신지가 맞지 않으면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 아울러 상대방 후보의 출신지도 고려해야 한다. 또 이 3요소가 해당 선거구에서 어떤 관계로 연결-분포돼 있는지의 상관성도 고려해야 한다. 예컨대 나이 많은 고소득자 중 호남-영남 출신의 비율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표의 향방이 달라지는 것이다.

이번에 영입된 신진인물은 87명인데, 해당 선거구 유권자의 나이, 소득수준, 출신지를 전부 조사하고 상관관계를 분석한 결과, 이러한 3요소를 만족시키며 당선 가능권에 든 후보는 8명에 불과하다. 또 21명은 경력 등으로 유권자에 어필할 수 있으나 이 3요소가 맞지 않아 바람몰이를 하더라도 고전이 예상된다. 나머지 58명은 해당 선거구 유권자의 분포상 당선 가능성이 희박하다(별첨: 각 선거구 유권자의 나이, 소득수준, 출신지 분포표 및 상관관계, 당락예상표). 따라서 신진세력의 대폭 영입은 재고돼야 한다.”

대통령은 “언제 이런 조사를 다했느냐”며 놀라워하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보고를 마치고 나오는 정보기관의 김부장은 혼잣말로 이렇게 중얼거리며 흐뭇한 미소를 흘린다.

“조사는요? 전자주민카드 주전산기를 한 번씩만 돌리면 되는데요 뭘….”

실제로 그랬다. 먼저 각 선거구별로 ‘나이 & 소득수준 & 출신지(본적)’의 검색항목을 넣어 유권자의 분포를 뽑은 뒤 후보 내정자의 이력과 대비하는 것으로 간단히 끝난 것이다. 정보기관의 김부장은 “하긴, 전자주민카드사업이 이렇게 유익하고 위력적인 것일 줄은 나도 몰랐으니까…” 하며 차에 오른다.

보완체계 허술, 악용 소지 높아

앞의 두 시나리오는 어디까지나 가상이다. 그러나 현실로 나타날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는 없다. 전자주민카드사업을 우려섞인 눈으로 주목하는 것도 바로 이런 가능성 때문이다.

정부는 97년부터 전자주민카드를 발급, 98년부터 본격적인 전자주민카드시대를 열 계획이다. 이에 따라 우리 사회나 시민들의 일상생활에 엄청난 변화가 예상된다. 단순히 종이와 비닐로 된 기존의 주민등록증이 IC카드로 바뀌는 정도가 아니다.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변화를 맞게 되는 것이다.

현재 정부 계획대로라면 전자주민카드에 주민등록, 운전면허, 의료보험, 국민연금, 인감, 지문 등 41개 항목의 개인신상정보가 수록-관리되게 된다. 그 내용은 이미 각 기관별로 파악·관리되고 있는 기초자료들이다. 따라서 전자카드에 모아놓는다고 해서 특별히 달라질 것은 없다는 게 정부의 설명이다. 그러나 시너지 효과가 가장 높은 게 정보다. 뿔뿔이 흩어져 있으면 아무 것도 아니지만 어떤 고리에 의해 연결되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게 된다. 몇 가지 단서를 연결해 기막히게 범인을 잡아내는 유능한 강력반 형사를 연상하면 될 것이다.

전자주민카드에는 나이와 거주지, 가족관계, 출신지(본적지) 등의 인적사항은 물론 국민 개개인의 신상을 파악할 수 있는 자료들이 들어간다. 예컨대 국민연금보험 가입 유무를 통해 그 사람이 봉급생활자인지 아니면 자영업이나 무직자인지 드러난다. 또 국민연금 가입일과 총불입액이 수록되므로 이를 대비하면 그 사람의 소득 규모가 대략 파악된다.

이러한 각각의 정보도 중요한 가치가 있겠지만 특히 각 데이터베이스가 네트워크로 연결되면 전혀 새로운 차원의 정보를 생산할 수 있다. 이들 정보를 통합 관리하는 곳은 전자주민카드 발급센터다. 유관기관 합동으로 운영될 이 센터의 기능에 대해 정부는 “각 행정기관간의 주민등록 정보 공동 활용을 위한 중앙센터 기능”, “조세, 연금, 의보 등 국가적 정책정보 사업의 인적 정보 제공 지원” 등으로 설정하고 있다. 발급센터에 집적되는 국민신상정보를 민원업무용에만 국한시키지 않고, 국가정책적인 차원에서 적극 활용하겠다는 계획인 셈이다.

모든 기능엔 순기능과 역기능이 있다. 좋은 목적에 활용될 수도 있지만 그 반대의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특히 보안체계가 허술하거나 관리이용에 대한 통제가 민주적으로 되지 않을 경우 범죄 혹은 정치·경제적인 목적으로 악용되는 것을 막을 수가 없다. 참여연대, 민변 등 시민사회단체에서 전자주민카드사업에 반대하는 것도 이러한 우려 때문이다.

정보이용실명제 이뤄져야

이러한 우려가 결코 기우가 아니라는 것이 속속 밝혀지고 있다. 필자는 전자주민카드사업 초기부터 참여하다 그만둔 탁승호 박사(서울대 IC카드연구소장)의 증언을 토대로 그러한 우려가 현실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밝힌 바 있다(『NEWS+』 11월 21일자). 탁 박사는 “현재 전자주민카드사업의 보안체계가 허술하게 추진되고 있으며 정보의 관리이용에 대한 철저한 기록-통제가 불가능한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다”고 폭로했다. 정보에 대한 보안체계(암호알고리즘 등)와 관리이용에 대한 통제는 불가분의 관계가 있는데, 현재 추진되는 방식으로는 전자서명에 의한 정보이용실명제가 불가능해 정보의 음성적 이용을 차단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안기부의 개입 의혹이 제기되는 것도 이 대목이다. 현재 안기부는 전자주민카드사업에 공식 참여, 보안체계 수립에 관여하고 있다.

정보이용실명제는 발급센터에 집적된 국민신상정보를 검색-수정-출력했을 때 누가 언제 어떻게 이용했는지가 완벽하게 기록되도록 하는 것이다. 하이텔, 천리안 등 일반 컴퓨터통신의 경우에도 가입자의 접속-이용기록이 자동으로 처리되게 돼 있다. 문제는 이 이용기록이 변조되거나 삭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전자주민카드는 국민들의 중요한 신상정보가 들어 있는 것이기 때문에 이용기록이 투명하고 완벽하게 보존될 필요가 있다. 그래야만 만일 문제가 생겼을 경우 그 경위와 책임자를 가려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불순한 목적으로 정보를 무단이용하거나 외부로 유출하는 것을 막을 수 없다.

그러나 현재 추진되는 전자주민카드의 보안시스템 상으로는 이러한 정보이용실명제가 완벽하게 이뤄지지 않는다는 것이 탁승호 박사의 주장이다. 그는 “안기부가 전자서명에 의한 정보이용실명제를 기피하는 것은 전자주민카드의 정보를 음성적으로 이용하기 위한 것 외에는 납득할 만한 다른 이유를 찾기 어렵다”고 의혹을 제기했다.

기실 전자주민카드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는 ‘투명성’이다. 민변 등에서는 전자주민카드사업을 전면 반대하면서, 아예 주민등록제도 자체에 대해서부터 부정적이다. 이는 일리 있는 관점이기는 하다.

하지만 꼭 그렇게만 볼 필요가 있는가는 의문이다. 모든 사물 그 자체는 가치중립적이며 언제나 양면이 있다. 주민등록제를 폐지하려면 현실적인 문제가 엄청나거니와, 거꾸로 전자주민카드가 시행될 때 무시못할 이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다. 정부에서는 민원편의 등 경제적인 효과를 홍보하지만 필자가 주목하는 것은 정치-사회적인 측면이다. 잘만 준비하면 앞으로 가정투표로 지역사회나 국가의 문제를 결정하는 21세기형 직접민주주의를 실현할 수 있다. 그 초석이 될 수 있는 게 이 전자주민카드다.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앞당기는 정치·사회적 인프라가 될 수 있는 것이다.

투명한 관리시스템이 관건

문제는 투명성이다. 전자주민카드에 집적되는 정보가 그야말로 공익적 차원에서 활용되도록 하는 투명한 관리시스템의 확보가 문제인 것이다. 현재 정부는 보안체계 등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해커의 침입 등 안전성 문제를 내세워 철저히 비공개로 일관하고 있다. 그러나 암호체계도 공개개발해야 오히려 안전하다는 게 이 분야의 정설이다. 특히 전자서명방식에 의한 정보이용실명제는 정보이용-관리의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 필수적인 장치다. 투명성만 철저히 확보된다면 전자주민카드를 그리 두려워할 필요는 없다고 본다. 오히려 적극적으로 참여민주주의의 실현을 위해 전자주민카드를 활용하는 방안 등을 모색하고 정부를 그 방향으로 이끄는 문제도 생각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

강영진 자유기고가·전『NEWS+』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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