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1월 2012-01-02   1637

문강의 문화강좌-경제학과 드라마

경제학과 드라마

 

문강형준 문화평론가

 

베넷 밀러 감독의 영화 <머니볼>(Moneyball)은 2001년 아메리칸리그 승자 결정전 장면에서 시작한다. 월드시리즈에 올라가 그 해 시즌의 우승컵을 쥐게 될 팀을 뽑는 리그 결정전에서 오랜 전통의 야구팀인 오클랜드 애슬래틱스와 뉴욕 양키스가 맞대결을 펼치는데, 결국 경기는 뉴욕 양키스의 승리로 끝난다. 영화의 타이틀이 나오기 직전, 스크린에는 애슬래틱스와 양키스 간의 연봉총액이 함께 뜬다. 이 둘 사이의 차이는 엄청 나다. 애슬래틱스의 단장인 빌리 빈(브래드 피트)은 이 숫자 차이를 ‘부당함’으로 인식한다. 부자 구단에서는 더 좋은 선수를 데려올 수 있고, 가난한 구단은 그럴 수 없기 때문에 경기에서 밀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가난한 구단이 갑자기 부자가 될 리가 없고, 어쨌든 예산의 제약 내에서 선수를 스카우트해야만 한다면, 그러고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넘볼 수 있기 위해서는 이 숫자의 부당함을 넘어설 획기적인 전략이 필요하다. 빌리가 이 상황에서 떠올리는 것이 바로 ‘머니볼’이다. 머니볼 이론은 가난한 구단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우승 확률을 최대화하는 요소를 갖춘 팀을 만들어 철저한 조직력으로 승부를 보는 전략을 의미한다. 이를 위해 경기분석과 선수선발은 컴퓨터와 공식을 이용한 수학적 통계를 사용하게 된다. 실화에 바탕을 둔 영화 <머니볼>은 약체 팀이었던 오클랜드 애슬래틱스가 스타 선수 없이 머니볼 전략을 사용하여 메이저리그 20연승 달성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드라마에서 경제학으로

머니볼 전략은 통계와 조직을 통한 승부다. 따라서 팀 조직에 맞지 않다면 그 어떤 선수라도 당장 트레이드 시킬 수 있고, 30년 넘게 야구에 몸담았던 분석가의 말이라도 쉽게 무시될 수 있다. 결국 핵심은 ‘우승’이기 때문이다. 야구를 하는 ‘선수’는 팀의 우승을 위한 하나의 부속품이고, 감독은 컴퓨터를 통한 분석이 내놓은 결과에 따라 선수를 써야 한다. 대부분의 야구 영화와는 달리 이 영화의 주인공은 그래서 선수나 감독이 아니라, 머니볼 전략을 적용하는 단장과 경제학과 출신 분석가다. 모든 결정은 컴퓨터와 통계 자료를 통해 정해지고, 단장은 마치 주식을 팔고 사는 것처럼 선수를 매매한다. <머니볼>은 이 모든 과정을 야구 경기의 규칙을 새로 쓴 위대한 전환의 과정으로 다룬다. 머니볼 이론의 핵심은 바로 스포츠 경기의 모든 변수들을 경제학적 통계수치로 변환하는 데 있다. 이는 푸코가 ‘미국식 신자유주의’의 핵심이라고 파악했던 것, 곧 삶과 사회의 모든 결정을 경제학으로 설명하는 방식이기도 하다. 전후 미국 경제 정책에 큰 영향을 미쳤던 게리 베커나 밀튼 프리드먼 같은 ‘시카고 학파’의 핵심 경제학자들이 바로 이런 방식의 경제적 분석을 틀지었던 이들이었다. ‘스포츠 신자유주의’라고도 부를 수 있을 이 머니볼 전략은 스포츠를 ‘드라마’에서 ‘경제학’으로 전환시켰다고 할 수 있다.

머니볼 전략은 메이저리그에만 있는 게 아니다. 그것은 이미 우리 삶을 지배하는 총체적 가치가 되었다. 우리의 삶은 ‘드라마’가 아니라 ‘경제학’의 영역 속에 놓여 있는 것이다. 우리의 노동력 가치인 ‘연봉’은 대개 그 인간의 삶의 가치와 수준을 말해주는 지표이고, 등급과 점수로 평가되는 우리의 고등교육은 더 높은 연봉을 받을 가능성을 높여주는 유명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이다. 문자로 해고통보를 받는 노동자는 조직에서 쓰임새가 없기에 ‘자유시장’으로 방출되는 노동 ‘선수’이고, 철거대상이 된 거주민은 도시공간의 효율적 개발을 위해 영원히 사라져야 하는 퇴출인력이다. 키, 재산, 학력 등을 모두 통계화 하고 있는 결혼정보회사의 등급분류표는 ‘충격’일 이유가 없다. 그것은 예전부터 ‘결혼시장’이라는 말 속에 담겨 우리 사회의 짝짓기를 규정했던 기준이 겉으로 드러난 일일 뿐이다. 고등학생들의 ‘노스페이스 계급도’ 역시 마찬가지다. ‘노스페이스’라는 상표는 ‘서울대’나 ‘삼성’ 등 최고급 조직을 나타내는 브랜드 중 하나이다. ‘서울대’나 ‘삼성’에 아무나 갈 수 없는 것과는 달리 ‘노스페이스’는 열심히 알바를 하거나 부모님 ‘등골’을 ‘브레이크’하면 입을 수 있다는 게 다를 뿐이다. 이미 성적으로 구분되고 분류되어 계급화된 학생들에게 ‘노스페이스’는 옷으로 재현된 또 하나의 계급일 뿐이다.

경제학이 된 삶과 생존경쟁의 서사형식

 

경제학이 된 삶은 언제나 숫자 경쟁력에서 살아남은 이들과 살아남지 못한 이들로 갈린다. 드라마에는 중간이 있지만, 숫자의 경쟁력에서 중간은 없다. 경제학이 된 삶이 언제나 ‘생존경쟁’의 서사형식을 취하는 것은 그 때문이다. 입시, 대학, 취업, 연봉, 결혼, 집, 노후―우리 삶의 모든 부면에서 경제학이 드라마를 대체하게 될 때, 삶은 예외 없이 생존경쟁으로 변해간다. 좀비가 습격했을 때 살아남는 것 외에는 다른 대안을 가지지 못하는 좀비 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생존경쟁을 주된 형식으로 삼는 우리의 삶 역시 그렇다. 자신의 생존을 위해서 타인의 삶에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면, 타인의 삶을 쉽사리 짓밟거나 타인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이 얼마나 대수로운 일이겠는가. 역설적으로 이러한 개인들의 ‘합리적’ 선택의 결과, 사회의 모습은 점점 비정해지고, 처참해지고, 무서워진다. 초등학생에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세대와 남녀를 초월해 막말, 폭행, 자살 등 사회면을 장식하는 뉴스들은 특이한 개인의 ‘해프닝’이 아니라 경제학이 되고 생존경쟁이 된 삶 속의 수많은 선택이 만들어내는 우리 사회의 야만의 결이다. “사회는 없다”던 대처의 말은 색다른 방식으로 이곳에서 증명되는 중이다. 

문제는 우리 삶을 지배하는 이 ‘경제학’ 자체의 성과가 형편없다는 데 있다. 1970년대 말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가 영국과 미국에 도입되기 시작한 이후, 이 경제학의 성과를 노동하는 가난한 인민이 따먹은 적은 한 차례도 없었고, 변방의 국가가 위기이지 않은 적은 한 번도 없었다. 2008년 이후로 미국, 아이슬랜드, 아일랜드, 스페인, 이태리, 그리스를 차례로 위기로 몰아넣고 있는 이 경제학의 미래를 밝게 보는 이들은 거의 없다. 오클랜드 애슬래틱스 역시 머니볼 전략을 쓴 이후 단 한 차례도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하지 못했다. 경제학의 무능 속에서 ‘삶’ 전체를 바꾸는 ‘드라마’를 다시 생각해야 할 시점이 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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