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10월 2012-10-08   3726

[참여연대사]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차병직 변호사

 

고발장 1998 2월 24일 참여연대가 비리 판사들에 대한 정식 수사를 요청하며 의정부지청에 제출한 고발장. 위 이미지는 독자의 편의를 위해 약간의 편집을 거쳤습니다.

 

“5·18 광주 민주화운동은 공산주의 국가를 세우기 위한 혁명이었다.”

혼자만의 생각에 진지하게 경도된 어떤 사람이 대단한 상상력과 용기로 주장한 내용인데, 그런 취지의 현대사 해석이 담긴 책의 제목은 『헌법파괴세력』이다. 이런 책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도 헌법 파괴 세력의 일부가 되는 것일까라고 걱정 아닌 걱정을 하기엔 한가롭다. 그 책을 법원장이 판사들에게 나누어주며 일독을 권했다면 어떤가? 의정부지방법원에서 2012년 봄에 있었던 일이다. 알고보니 그 법원장은 지난해에도 같은 저자의 『5.18과 헌재사망론』이란 과격한 제목의 책을 돌렸다고 한다.

법원장은 어쩌면 독특한 신념과 의욕을 지닌 사람인 것 같다. 다량의 책을 확보하여 판사들에게 선물한 것도 같은 문제를 놓고 함께 생각하며 소통해보자는 좋은 의도였을지 모른다. 언론에 보도되지는 않았지만, 지난해 그 법원에 부임하자 판사들에게 자기소개서를 써 내라고 정중하게 지시한 것만 봐도 그렇다. 그러나 과연 몇 사람의 법관과 얼마나 많은 시민이 그런 기상천외의 기획에 동의할 수 있을까.

세상이 민주화되고 또 그만큼 투명해졌다고 해도, 보통 사람들은 법원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잘 알지 못한다. 가끔 초국가적 권능처럼 들리는 사법권의 독립이란 방패가 법원을 세속의 공격으로부터 막아주기 때문에 더 그렇기도 할 것이다. 사법부의 벽도 요즘은 많이 얇아졌지만, 미우나 고우나 국민의 마음으로 독립성 확보라는 특혜를 부여하는 것도 법원이 아주 특별한 일을 처리하는 곳이라고 믿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법원 바깥에선 흔한 일이 그 담장 안에서 벌어지면 요란하게 반응한다. 그 소란스런 반작용은 무지에서 출발한 간섭이 아니라 관행과 밀행의 장막을 걷으며 던지는 개혁의 구체적 명령일 테다.

의정부지법의 도서 배포 사건 기사를 읽고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 그들은 14년 전 그곳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고 있을까?

 

우리 사법 사상 최대의 스캔들

 

1998년 2월 16일, 한겨레 1면 톱기사의 제목은 ‘의정부 판사 변호사에 거액 받아’였다. 그 보도는 한겨레의 특종이었다. 하지만 당시에는 가판이 있던 시절이라 전날 저녁판에 실린 기사를 조선일보가 받아 같은 날 사회면 톱으로 게재했다. ‘의정부지원 판사 10여 명 ‘무통장입금’ 거액 받았다’.

그 기사는 엄청난 폭발력을 지닌 기폭제였다. 그날 이후 무려 2개월 동안 모든 신문이 나서 매일 보도를 했다. 지원장을 포함한 의정부지원 판사 38명 전원이 교체되었다. 우리 사법 사상 최대의 스캔들이었으며, 사법개혁이 추상적 구호가 아니라 현실의 과제란 사실을 인식시켜 준 충격의 사건이었다. 사건의 가운데에는 민완의 기자 한 사람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가 있었다.

이수형 기자는 동아일보 사회부에서 법조를 출입한 지 1년이 채 되지 않았다. 법과대학 출신인 그는 문화일보에 근무할 때부터 남다른 감각으로 사건을 포착하고 전문지식을 기초로 취재원에 접근했다. 그는 한겨레의 최초 보도가 있기 석 달 전에 의정부지청에서 변호사 사건 수임 비리에 관해 수사를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1997년 11월 26자 동아일보 사회면에 첫 기사가 나갔다. 비리 변호사 사무실을 수색하였으며, 일부 판사의 향응 수수 여부도 수사 중이라는 내용이었다. 이어서 다음날 신문엔 브로커를 고용한 변호사에 대한 수사를 촉구하는 간단한 기사를 내보냈다. 그것은 예고편이었다.

그런데 제동이 걸렸다. 신문사 사주였던 김병관 회장은 마침 선산과 얽힌 부동산 소유권을 둘러싼 소송을 진행하고 있었는데, 관할이 의정부지원이었다. 김 회장은 법원과 관련된 기사를 내보낼 경우 소송에 악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의정부 변호사들의 말을 듣고 걱정한 나머지 데스크와 기자에게 연락하여 넌지시 압력을 행사했다. 당시 사회부를 맡고 있던 김충식 부장은 그런 사정을 알고 있으면서도 결단을 내려 의도적으로 가판을 피하고 아침 배달판에만 이 기자의 기사를 실어 11월의 첫 보도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이후의 후속 보도는 난망이었다.

검찰의 수사 대상이 됐던 변호사는 판사를 하다 개업한 이순호였다. 많은 사건을 수임하다 보니 표적이 됐고, 검찰은 브로커를 고용했다는 사실을 문제 삼았다. 하지만 실제로는 거기에 근거해서 판사들의 계좌를 추적하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챈 사람은 이 기자뿐이었다.

잠시 해외로 피신했던 이 변호사가 귀국하자 검찰은 즉시 구속했다. 2월 9일, 폭설이 내리는 저녁 시간에 이 기자는 동료로부터 삐삐를 통해 이 변호사에 대한 구속영장이 청구됐다는 연락을 받았다. 뭔가 직감한 그는 담당 검사실로 전화를 했으나 통화할 수 없었다. 그 길로 부암동 언덕배기의 노관규 검사 집으로 달려갔다. 검사는 귀가 전이었고, 기자는 눈 속에 서서 기다렸다. 거의 자정 가까이 되어 노 검사가 나타났다. “왜 또 왔어?” 하지만 새파랗게 언 이 기자의 모습이 안쓰러웠던지 차라도 한잔 하고 가라며 데리고 들어갔다. 찻잔을 놓고 마주 앉았는데 평소와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순간 ‘판사가 돈 받은 사실이 확인됐느냐?’고 묻는 것은 우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검사님 합격기에 ‘사람의 운명은 정해져 있는데 우리만 그 사실을 모르고 버둥거리며 살고 있는지 모른다’고 쓰셨던데, 이미 다 정해진 것 아닙니까?” 노 검사는 묵묵부답이었다. 이 기자는 돌아와 즉시 취재를 보강하여 기사 초고를 작성했다.

그 기사를 송고해도 동아일보에 실릴 가능성은 희박했다. 하루 이틀 고민하며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와 접촉했고, 논의한 결과 그 특종을 한겨레에 넘기기로 결단을 내렸다. 무엇보다 사법부의 비리를 세상에 알리고 보다 정확한 진실을 파헤치는 일이 급선무라는 신념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참여연대사-이미지교체-1

                1998년 2월 23일, 참여연대 사법감시센터는 한겨레에 진상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결
                의를 다짐하는 광고를 냈다.

 

법조비리 전국민의 관심사로, 당황한 법원과 검찰

 

이 기자는 한겨레 김현대 기자를 만났고, 참여연대는 공동대표 겸 맑은사회만들기운동본부장이었던 김창국 변호사를 위원장으로 의정부지원 법관비리 진상조사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하여 2월 16일에 기사가 나가게 된 것이다.

15일 저녁 가판에 한겨레 기사가 보도됐을 때 관심을 가진 언론은 조선일보밖에 없었다. 역시 법대 출신으로 법조계를 맡고 있던 이창원 기자가 받아 크게 보도하였다. 이창원 기자는 그 이전에 사법감시센터와 협력하여 조선일보에 매주 전면 기획기사를 연재했고, 그 원고는 『국민을 위한 사법개혁』으로 완성돼 한동안 사법개혁의 교과서이자 매뉴얼로 많은 사람이 이용했다. 그때는 그런 시절이었다.

한겨레에 이어 조선일보까지 적극적으로 보도하자 상황은 확연히 달라졌다. 17일부터는 다른 신문들도 일제히 보도에 나섰다. 사태가 들불처럼 번질 기세를 보이자 법원보다 검찰이 더 당황하기 시작했다. “사실이 아니다”, “수사 계획이 없다”는 식으로 발뺌했다. 함부로 터뜨렸다간 법원의 반발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김태정 검찰총장은 판사들의 계좌 추적에 대해 보고받은 바 없다고 잡아뗐다. 그러면서 일선 검사들에게 “변호사의 검사실 방문은 물론 저녁 식사 등 의혹을 살 만한 일체의 접촉을 삼가라”고 특별 지시를 내렸다.

대법원에서는 법원행정처의 고현철 인사관리실장을 단장으로 조사단을 구성하여 의정부로 파견했다. 판사들은 떳떳하지 못한 관행 때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지만, 변호사들로부터 관행적인 향응을 제공받기는 검사들도 마찬가지라며 법원을 향한 일방적 비난을 원망했다. 그 시간에 사법감시센터가 중심이 된 진상조사위는 검찰의 철저한 수사를 촉구하며 윤정석 부장검사와 노관규 검사에게 격려 서한을 발송했다.

2월 21일 안용득 법원행정처장은 사과문을 발표했다. 대법원 조사단 조사 결과 5~6명의 판사가 명절 떡값 등의 명목으로 40만 원에서 300만 원까지 받은 사실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다음날 한상호 지원장은 수원으로 전보되어 의정부를 떠났다. 이임식은 단 3분 만에 끝났다.

 

1999년 2월 5일 한겨레 사회면-1             1999년 2월 4일 오전 서초동 서울지점 앞에서 법인 법조 개혁을 촉구하는 퍼포먼스.   
                이 퍼포먼스에는 참여연대 회원과 서울대, 성균관대 등 법대 학생들이 참여했다.


법관 838명 인사 단행

 

대법원의 발표는 사태를 진정시키기는커녕 여론을 더 들끓게 만들었다. 그 조사 결과는 믿을 수 없었다. 사법감시센터는 이미 동아일보 부형권 기자가 의정부의 현직 판사와 단독 면담으로 취재한 내용을 알고 있었다. 부 기자가 18일 밤 10시경 강남의 모 일식집에서 비밀리에 만난 A 판사와의 인터뷰 내용에는 놀라운 것들이 포함돼 있었다.

“대법원은 엄청난 파문을 예상하고 축소 조사를 했다”, “나도 지난해 추석 때 수십만 원을 받았다”, “대법원은 통장에 입금 흔적이 있는 시군 판사만 조사했다”, “변호사들이 멀리 있는 시군 판사들에겐 찾아갈 시간이 없으니 계좌로 송금했기 때문이다”, “의정부지원은 마피아 법원으로 불린다”, “미아삼거리의 ‘빅토리아’라는 술집엔 형사 단독판사들의 고정 파트너가 있다. 변호사가 ‘오늘 판사님 가신다’고 연락하면 그 고정 파트너는 일절 다른 손님은 받지 않고 대기한다”, “갓 부임한 판사들이 ‘이래선 안 된다, 개선하자’고 건의하면, 지원장은 ‘넌 얼마나 깨끗하냐’는 식으로 반응해 서로 얼굴을 붉힌 적도 있다”, “일부 판사들은 자신과 전혀 연고가 없는 은행 지점에 통장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내가 이런 말을 하는 것은 대법원 조사 방향이 크게 잘못됐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동아일보 법조팀은 한 달 취재비를 모조리 털어 마련한 50만 원을 들고 ‘빅토리아’에 잠입 취재를 했다. 사법감시센터는 한겨레에 진상을 밝히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다짐하는 광고를 냈다. 그리고 판사들에 대한 정식 수사를 요구하며 24일 의정부지청에 고발장을 제출했다. 그 사이 보험회사에 다니는 43세의 시민 한 사람은 개인적으로 판사들을 고발하기도 했다. 사법감시센터 간사들과 참여연대 회원들은 연일 시위에 나섰다. 그때만 해도 아직 참여연대가 널리 알려지지 않아, 중앙일보는 기사 말미에 용어해설 형식으로 참여연대를 소개하기도 했다. 대법원은 서둘러 3월 1일자로 전국 법관 838명에 대한 사상 최대 규모의 인사를 단행하면서, 의정부지원 판사 38명 전원을 교체했다. 법원이 송두리째 바뀐 것이다.

대검은 사법감시센터가 고발한 사건을 서울지검으로 옮겨 특수3부에 배당했다. 약 한 달이 지난 3월 23일, 정홍원 3차장은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15명의 법관이 금품을 받았으나 청탁 명목은 아니었다, 따라서 기소하기보다는 그 사실을 대법원에 통보하여 자체 징계로 마무리하게 하겠다는 결론이었다. 4월 7일, 대법원은 판사 5명에게 정직을, 7명에 대해서는 견책 또는 경고의 징계처분을 내렸다. 그리고 참여연대의 집요한 항의 끝에 서울지검은 수사를 질질 끌다가 10월에 가서야 판사 6명에 대해서 기소유예 처분을 했다. 사법감시센터는 즉시 항고하였지만, 그것은 사건의 막을 내리는 엔딩 크레딧에 불과했다.

 

명쾌하지 않은 마무리, 무엇을 어떻게 감시할 것인가

 

참여연대 창설과 함께 출발한 사법감시센터는 기존의 법조인들에게 눈엣가시였다. 특히 판사들은 ‘사법감시’라는 용어에 드러내 놓고 거부감을 표시했다. 1995년 10월 2일 <사법감시> 창간호를 내면서 그런 현상은 더했다. 감히 누가 법원을 감시한단 말인가라는 투의 반응이었다. 참여연대 회원 조직으로 사법감시센터와 연계된 활동을 했던 <사법 제자리 놓기 시민 모임>이란 존재도 법조인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초기에 소장과 부소장을 맡았던 박은정, 한인섭 교수, 담당 간사였던 문혜진의 헌신적 노력으로 사법감시 활동은 기반을 다졌다.

의정부 사건이 명쾌하지 않게 마무리되자, 그 다음 해엔 대전법조비리 사건이 터졌다. 이후론 사법개혁이란 용어가 완전히 상용화되었으며, 누구도 함부로 사법감시란 말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1895년 개성재판소로 문을 열었고 도중에 철원지원이 되기도 했던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은 2004년에 의정부지방법원으로 승격했다. 그런 전통의 법원에서 최대의 비리 사건이 벌어졌다는 사실은 치욕이다. 하지만 그 고통을 계기로 새 시대에 부응할 면모로 사법 의식도 승격되었는가? 쓰나미처럼 휩쓸고 간 소용돌이의 흔적은 어떤 교훈으로 남아 있는가?

 

10년 남짓의 세월 동안 법조의 환경과 상황은 판이하게 달라졌다. 의정부지법만 하더라도 지금은 67명의 판사가 있는데, 사건이 터졌을 당시 대부분 예비 법조인이거나 학생이었던 소장 판사들의 의식은 시민과 훨씬 가까워져 있다. 그리고 다른 측면에서 사태의 인식에 대한 정확성을 추구하면서도 현란할 정도로 다양한 개성을 지니고 있다. 그 물결에 밀리지 않으려는 듯 구세대 판사들은 법원 고유의 벽에 갇힌 정신 세계에 집착하여 케케묵은 옛 미덕을 유지 또는 복원하려 애쓰는 것은 아닐까.

이런 자리에서 사법감시센터는 무엇을 해야 할까 고민해야 한다. 법조 전체에 진행되고 있는 변화와 변화가 초래할 상황을 예측하여 감시의 대상과 방식을 모색해야 한다. 어느새 사법감시센터의 활동 자체도 누군가의 감시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을 시점은 이미 지났지만, 다행히 아직 늦지 않았다.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변호사)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호에서는 사법감시의 필요성에 대해 전국민적 공감대를 얻게된 결정적 계기가 되었던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을 복기합니다.

–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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