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2년 09월 2012-09-05   1965

[놀자] 누구든지 아무 때나 종이공작 박람회

누구든지 아무 때나 종이 공작 박람회

이명석 저술업자

얼마 전에 작은 전시회를 했다. 친구의 사무실이 가끔 갤러리를 겸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우리도 시켜줘’라고 무턱대고 한 말이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빼도 박도 못하게 된 것이다. 전시는 『도시
수집가』라는 책을 만들기 위해 그렸던 지도와 일러스트레이션을 모은 원화전이었다. 그런데 이게 손가락 크기 정도의 작은 그림들이라 어떻게 내놓아야 전시라는 이름에 부끄럽지 않을까 고민이 되었다. 결국 전시회 전, 두 주 동안 나의 집은 공작교실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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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색의 딱딱한 종이, 칼, 딱풀, 자……. 이런 도구들을 늘어놓고 제멋대로 그림을 자르고 붙였다. 고양이 그림을 여러 칸의 유리에 붙여 앞뒤로 세우기도 하고, 음악을 테마로 한 그림만 모아 LP판에 붙이기도 했다. 레고 블록에 신나는 표정의 그림들을 끼워 입체적으로 세운 뒤 ‘세계의 축제’라고 이름 붙였는데, 그걸 본 친구가 ‘멕시코 묘지’ 같다고 하기도 했다. 전시를 준비하고 진행하는 과정이 마치 미대생 놀이 같았는데, 그중에 제일 재미있었던 것은 바로 이 공작 교실 놀이였던 것 같다.

  돌이켜보면 어릴 때는 뭐든 가지고 놀 게 없으면 종이를 오려서 만들곤 했다. 시골 할머니 댁에 가서 화투 놀이를 배웠는데, 엄마를 아무리 졸라도 ‘그건 나쁜 거’라며 화투를 안 사주시는 거다. 그래서 누나랑 같이 지난해 달력을 오리고 그림을 그려서 화투 패 전체를 만들었다. 뭐 그걸 엄마가 보자마자 연탄아궁이에 넣어버려 비운의 대작이 되기는 했지만 말이다. 어쨌든 누나와 나는 마론 인형도, 로봇 태권브이도, 장난감 기차도 전부 종이로 만들어 놀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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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이 된 이후에도 이런 버릇을 못 버리고 있는데, 꼭 거창한 전시를 위해서만 공작을 하는 건 아니다. 카페에서 커피를 시키면 테이크아웃 용 컵에 담아 주는 경우가 있는데, 그걸 감싸고 있는 골판지 홀더가 가지고 놀기에 참 좋다. 간단히 손으로 찢고 돌돌 말아서 수염도 만들고, 나팔도 만들고, 안경도 만들고……. 그걸 얼굴에 착용하고 찍은 인증샷은 필수다.

인터넷으로 물건을 구입하다 보면 집에 택배 상자들이 넘쳐난다. 이걸 가지고 뚝딱거려서 뭔가를 만드는 일도 재미있다. 한번은 칼로 상자를 자르고 포갠 뒤, 잡지의 멋진 컬러 페이지를 붙여 마법의 성 같은 걸 만들었다. 그런데 집에 있는 고양이들이 그 구멍 사이를 돌아다니더니 자기들의 놀이터로 만드는 게 아닌가? 이렇게 되니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온갖 상자들을 이어 붙여 거대한 미로 도시를 만드는 것이다. 커튼 봉을 싸고 있던 2미터 길이의 긴 상자로 거실과 침실을 오가는 터널을 만들기도 했다. 고양이는 무서워하며 안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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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놀이 덕분에 고양이만 즐거워했던 것은 아니다. 반대로 고양이 덕분에 내가 놀이 도구를 얻기도 했다. 고양이 사료를 담은 상자들은 화려한 원색의 귀여운 디자인으로 치장한 경우가 많다. 나는 이 상자들을 오려 ‘고양이 카탄’이라는 보드 게임을 만들기로 했다. 기하학적인 문양을 모아서 게임 판을 만들고, 핑크빛 문양을 오려서 게임용 화폐를 만들었다. 게임 아이템용 도구 중에는 같은 모양이 여러 개 필요한 경우들이 있는데, 이건 상자에서 고양이, 생선, 닭 모양 같은 걸 찾아낸 뒤 오려서 장만했다. 각 게이머별로 게임 화폐와 말을 보관하는 도구로는 고양이용 캔을 사용했다.

이런 종이 공작을 좋아하는 게 나만은 아니었다. 인터넷을 뒤지면 온갖 종류의 종이 공작 사이트들이 나온다. 거기에는 아주 정교한 공작용 본이 올라와 있다. 컬러 프린터가 있는 친구에게 아부를 해서 몇 장 뽑아낸다. 요즘 프린터는 20년 전 문방구에서 팔던 종이 인형보다 훨씬 깔끔한 색을 찍어낸다. 나는 그 본을 두꺼운 종이에 붙인 뒤에 본격적인 작품 제작에 나선다. 제일 재미있었던 것 중의 하나는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만들거나 구상했던 여러 발명품을 축소해서 만들어놓은 종이 공작물이었다. 종이 글라이더 본을 여러 개 만들어 서로 다른 모양의 그림을 그린 뒤 천장에 매달아 놓을 계획을 갖고 있는데 아직 실행은 못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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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시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서나 이런 공작 놀이는 혼자보다는 여럿이 하는 게 즐겁다. 서로 만든 걸 칭찬도 해주고, 기차를 하나씩 만들어 길게 연결하기도 하고. 입체적인 형체를 만들기를 좋아하는 친구, 아크릴 물감이나 마카로 정교하게 색칠하기를 좋아하는 친구, 거기에 이야기를 붙여 가지고 노는 데 특별한 재능을 발휘하는 친구……. 각자의 역할이 모이면 즐거움은 증폭된다.

예전 도쿄 시부야에 갔을 때, 종이로 만든 프로레슬러 인형만 수십 년간 만들어온 마니아가 멋진 전시회를 하는 걸 보았다. 그렇게 거창하지 않아도 좋다. 가족들끼리 손을 모아 종이 공작물 박람회를 개최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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