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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년 12월
  • 2013.12.05
  • 1913

한국의 시민운동, 잘 배워 갑니다

마웅저 버마 활동가

 

박유안

사진 박영록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 205호

 

1994년 88년 8월 8일에 시작했다는 버마 8888 민주항쟁에 참여하다 군부독재의 체포 위협을 피해 한국으로 몸을 피한 나이 스물셋의 한 청년이 있었다. 한국은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이룬 나라였고, 거기 가면 많은 걸 배울 수 있으리라 여기고 선택한 곳이었다. 딱 2년만 머물리라 다짐했던 한국 땅에서 그 청년은 어느새 중년의 사내가 되었다. 처음에는 이주 노동자로 일하다가, 그 후 난민 지위를 얻고 버마의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펼치다 ‘따비에’를 설립해 버마 청소년을 위해 일해 온 마웅저 상임대표는 버마로의 귀국을 앞두고 있다. 

 

얼마만의 귀국인가. 기분이 어떤가. 

 

한국에 머문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태국 국경 지대 메솟의 버마 난민촌만 방문했을 뿐, 버마로 돌아가는 건 처음이다. 그런데 돌아갈 준비 하느라, 또 돌아간 뒤에 따비에를 어떻게 유지할 건지 등을 생각하느라 설렐 겨를도 없다. 

 

시골에서 태어난 마웅저 씨는 수도 양곤에 있는 고등학교로 유학을 갔다. ‘돈을 많이 벌겠다’는 어릴 때부터의 목표를 이루리라 다짐하며 떠난 유학길이었다. 하지만 1988년 민주항쟁이 일어나면서 자유를 억압하는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분노가 일었고, 그리고 이른바 ‘선배를 잘못 만나’ 민주항쟁에 몸담게 된다. 그는 ‘딱 2년 열심히 하면’ 아웅산 수지 여사의 야당이 정권을 잡으리라 여겼으나, 군부의 선거 무효 선언과 더불어 수지 여사는 가택연금 되었고, 선출된 국회의원들은 체포당했고, 민주화 운동가들은 체포, 실종되기 시작했다. 그에 따라 운동가들은 무장투쟁으로 투신하거나 해외로 피신했다. 1994년 말, 양곤으로의 유학길을 이끌었던 누나가 이번에는 한국으로의 출국을 권했다. 

 

한국의 첫 인상이 어땠나. 

 

버마에서 본 한국이랑 내가 와서 본 한국이 아예 달랐다. 1994년에 한국에 오자마자 공장에서 일하기 시작했는데, 거기서는 정말 탄압만 당했다. 한국 사람들이 버마라는 나라를 전혀 몰랐다. 시장 아줌마 아저씨들은 군사정권이 붙인 이름인 ‘미얀마’라고 말해도 모르고, 아웅산 테러 사건으로 폭탄 터진 데 정도로만 겨우 알고 있었다. 버마에서는 그 사건 때문에 한국이 갑자기 유명해졌다. 그 전에는 북한만 알았는데, 그때부터 누구나 한국의 상황을 잘 알게 되었다. 외교 관계가 생기고, 한국 구두 공장이나 옷 공장도 진출했다. 민주화 운동을 하는 선배들도 한국 얘기를 자주 했다. 버마에서는 민주주의의 나라, 자유를 누리는 나라로 유럽, 일본, 한국이 다 똑같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한국에 와서 보니, 이주노동자에 대한 차별, 여성에 대한 차별이 아주 심했다. 공장에서 이주노동자로 일하며 부천 오정동에서 살았는데, 밤이면 맞아서 우는 여자들 소리가 자주 들리는 등 아주 낯설었다. 

 

공장에서 일하며 ‘부천 외국인 노동자의 집’을 통해 버마 친구들도 만나고 자연스럽게 이주노동자 인권 문제에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때 친구들과 여기서도 버마 민주화 운동을 계속 하자고 마음을 모았고, 1998년에 수지 여사가 이끄는 NLD의 한국지부를 만들게 되었다. 그때 도와주던 대학생들, 그리고 참여연대나 인권운동사랑방, 나와우리 등 시민단체들을 만나며 ‘다른 한국 사람’, ‘다른 한국의 모습’을 비로소 접하게 되었다. 한국말도 잘 못 하는 우리가 버마 인권 얘기를 하면, 한국의 활동가들이 잘 이해하고 응원해줬다. 그때 비로소 한국에 참 잘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국의 민주화 운동, 시민운동 현장의 선배들로부터 정말 많은 도움을 받았다. 미국이나 일본으로 간 동료들은 이런 소중한 경험을 누리지 못했으니, 내가 한국에 잘 오긴 잘 온 거였다.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 205호
‘버마 평화를 위한 따비에’라는 슬로건을 든 마웅저 씨. 

 

한국에 들어온 지 한참이 지나서 난민 신청을 하셨다.

 

1999년에 NLD 일을 함께하던 한 친구가 불법체류로 강제추방 당했다. 당시엔 한국에서 버마에 가는 직항이 없을 때라 태국에서 비행기를 갈아탈 때 빠져나가서 다행히 그 친구가 버마에서 체포되는 일은 면했다. 이후 한국에서 일하던 NLD 활동가 서른네 명이 난민 신청을 했다. 처음에 한 친구가 난민 신청 얘기를 꺼냈을 때는 “너 미쳤냐. 우린 난민이 아니다”라고 했다. 난민은 가난하고 깡마른 아프리카 여성이나 아이들에게나 적용되는 거지,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여겼다. 그러다 결국 다른 방법을 찾지 못해 난민 신청을 하게 됐다. 

 

2000년에 난민 신청을 했고 2003년에 NLD 한국지부 회장, 부회장, 총무, 세 명이 난민 인정을 받았다. 그런데 2005년에 법무부가 신청자 중 아홉 명의 신청을 거절하며 출국을 권고했다. 그로부터 3년 간의 소송 후 2008년에 난민 지위를 인정받았다. 그 사이 난민에 대해 많이 공부하고 난민으로서의 자각도 얻을 수 있었다. 난민이 꼭 경제적으로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게 아니라는 것, 정치적 종교적 난민도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김대중 선생, 홍세화 씨 등도 그 전에 난민이었다는 것도 알았다. 한국에서는 망명에 비해 난민의 어감이 좋지 않아 선입견이 컸다. 강제추방의 두려움이 사라지고 보호받게 되어 마음이 편해졌다. 

 

난민 인정 이후에는 어떤 활동을 했나. 

 

2003년 초 NLD를 그만두고 공장도 그만두었다. 그 무렵 시민단체 분들로부터 공부를 하라는 권유를 받아 성공회대학교 노동대학을 다니고 이어서 NGO대학원 수업을 청강했다. 그때 함께하는시민행동의 활동가를 만난 것을 계기로 함께하는시민행동의 반상근 인턴으로 일을 시작했다. 

인턴으로 일하는 중에 난민 지위를 얻었고, 난민 지위 획득으로 자유와 힘이 생기자마자 태국 국경 지대 메솟에 있는 메라우 난민촌으로 갔다. 그 전부터 펼치던 버마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하겠다고 함께하는시민행동에 제안했고, 그분들이 큰 힘이 돼서 오늘날까지 버마 아이들을 위한 활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 

한국에서 행복하게 자라는 아이들을 보면서 버마 아이들도 저렇게 자라면 좋겠다 싶었고, 그렇게 좋은 교육을 받고 자란 아이들이 훗날 민주화를 위한 기반이 된다고 여겼다. 나는 민주화나 소수민족 문제 등 버마의 모든 문제의 뿌리가 교육이라고 생각했다. 

 

따비에는 어떤 활동을 하고 있나. 

 

한국 고등학교 학생들의 동아리 활동, 한국 학교 세 군데와 버마 난민촌 사이의 교류 활동, 버마 난민촌 도서관 지원, 책 출판 등 주로 청소년 중심 활동을 한다. 난민촌과의 교류는 10년째 진행 중인데, 2008년 이전에는 간사 역할만 하다가, 난민 인정을 받은 뒤 직접 갈 수 있게 되어 인솔과 통역까지 하고 있다. 

 

직접 난민촌을 다녀오면 만나는 양쪽 다 많이 달라질 것 같은데, 어떤가? 

 

난민촌 사람들은 UN이 세워놓은 펜스 너머로 못 나간다. 바깥과의 교류가 전혀 없는 거다. 호기심 넘치는 아이들인데, 늘 같은 사람을 만나고 같은 얘기만 하고 살아야 한다. 그런데 한국 친구들이 그 아이들을 만나러 간다. 한국 친구들을 통해서 버마 아이들은 세상을 만나는 거다. 한국 친구들도 TV나 책으로 간간이 접하던 난민을 직접 만나게 되고. 무엇보다 서로 친구가 되는 게 중요하다. 난민이 내 친구가 되고, 나아가 버마와 한국이 내 친구의 나라가 되는 거다. 버마를 시끄럽고 가난한 나라, 불법체류자의 나라, 관광이나 투자의 지역 정도로만 알고 있던 인식이 ‘우리 친구의 나라’로 바뀌는 게 참 중요하고 의미 있는 성과라고 생각한다.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 205호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 205호
따비에 사무실의 벽에는 난민에 대한 청소년들의 생각,
한국과 버마 양국의 청소년들의 꿈 등이 빼곡이 적혀 있다. 

 

버마에 돌아가면 무엇을 할 생각인가. 

 

대안학교, 청소년센터 등 청소년을 지원하는 일을 다양하게 해보고 싶다. ‘정치는 정치가들이나 정부가 하는 게 아니라 시민들이 하는 것’이라는 말을 난 믿는다. 청소년들은 바로 미래의 시민들이다. 130개 언어가 있는 버마에 교과서는 버마어 하나뿐이다. 다른 언어, 다른 문화가 싫어서 안 배우기도 하고, 경제적인 이유로 학교에 안 가기도 한다. 그래서 무상교육인데도 초등교육 대상자 40%가 졸업을 못하고 있다는 UN 보고서도 있다. 나라의 미래를 만들어갈 청소년들에 대한 교육, 특히 국가 중심의 교육이 아니라 대안교육, 그런 데 대한 관심이 아주 많고 청소년들과 함께 그런 걸 할 수 있는 여러 방법을 찾고 싶다. 

 

한국에 대한 불만도 많다지만, 그게 다 관심 어린 불만이라는, 반쯤은 한국사람 같은 마웅저 씨. 버마 민주화에 대한 고민에서 시작해 이후 평화, 인권으로의 관심의 확대를 겪으면서, 그는 한국의 시민사회와 시민단체들을 접하면서 느낀 게 참 많았다.

지난날들을 돌아보며 이제 곧 떠난다는 애틋한 인사말을 남기고 있는 ‘마웅저의 일기’ 블로그에서 그는 한국에서 만난 지난 인연들을 회고하며 그 고마운 인연들에게 굳센 각오 또한 전하고 있다. “저도 여러분들에게 배운 대로 편견 없이 사람들을 대하고, 대가 없이 선의와 호의를 베풀도록 하겠습니다. 쉽지는 않겠지만 보여주신 것들 잘 기억해서 그리 살도록 노력하도록 하겠습니다.” 

‘혼자가 아니니 힘내라’고 마웅저의 등을 다독여준 한국의 시민운동. 이제 희망을 품고 떠나는 마웅저 씨의 포부가 버마에서 어떤 싹을 틔울까. ‘마웅저’라는 이름으로부터 비롯될 두 나라 시민운동의 연대가 버마-한국 간 관계에 그치지 않고, 그간 소홀했던 아시아권 시민운동과의 폭넓은 연대로 자라가기를 희망해본다. 

 

 

박유안 ‘바람구두’라는 출판사도 하고 있지만, 요즘은 연애, 여행, 혁명, 참선 등 일 아닌 다른 온갖 것들을 읽고 쓰고 옮기는 일에 더 재미가 좋다. ‘까칠해도 친절하게’가 삶의 모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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