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2월 2013-12-05   3533

[20년20장면] 압구정 아줌마의 방향 전환 – 1996~ 참여연대 아카데미

참여연대 20년 20장면 Scene #16

압구정 아줌마의 방향 전환 

1996~ 참여연대 아카데미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1996년 참여사회 아카데미가 처음 문을 열었을 때의 홍보물. 참여사회 아카데미의 첫 학기는 12개의 강좌로 이루어져 있었다. 내부에서 박원순과 손혁재가 하나씩 맡았고, 조광희를 비롯한 영화를 좋아하는 변호사들이 모여 영화 감상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홍순민에게는 서울의 궁궐이야기를, 한겨레21 편집장으로 있던 오귀환에게는 세계 동향을 부탁했다. 첫번째 강좌는 <갈등과 분쟁, 이렇게 해결합시다>였고, 강사는 현대그룹 임원을 지낸 조상행이었다. 

참여사회 아카데미는 학기를 지날수록 커리큘럼이 다양해지는 등 발전했지만, 1999년 제정된 평생교육법의 시행 이후 아카데미 붐이 일면서 참여사회 아카데미가 다른 아카데미의 물결 속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다는 판단에 따라 2002년 문을 닫았다. 이후 2009년 아카데미 느티나무라는 이름으로 다시 문을 열어 더욱 다양한 강좌를 펼쳐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다.

차병직 변호사

월간 『참여사회』는 참여연대 창립 20주년이 되는 2014년까지 참여연대가 이루어낸 의미 있는 성과들을 소개하는 <참여연대 20년, 20장면>을 연재합니다. 참여연대 창립 멤버인 차병직 전 집행위원장이 참여연대 활동 기록과 관련자들의 증언을 토대로 집필합니다. 이번 호에서는 1996년에 시작한 이후 한때 문을 닫는 등 부침을 겪는 가운데서도 지금까지 이어져 새로운 시민들이 참여연대와 시민운동을 접할 수 있는 문의 역할을 하고 있는 참여연대의 시민교육 활동의 역사를 봅니다. 

인류 역사에서 제도나 의식의 가장 큰 변화를 가져온 계기의 하나는 근대 혁명일 것이다. 국가나 그와 유사한 정치공동체를 통치하는 권한, 즉 주권은 애당초 거창하게 또는 당연하게 인간이 아닌 신에게 있는 것으로 여겼다. 영광스럽게도 그 주권을 신으로부터 수여받은 특별한 인물은 왕이었다. 신이나 신의 대리인에게 있던 주권이 어느 순간 각자에게 주어졌다는 사실은 깨닫기는커녕 이해하기도 쉽지 않았을 것이다. 주권의 이전,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인류의 혁명이었다. 그 관념 아래서 개별 국가의 혁명이 이루어졌다. 시민혁명, 독립혁명, 명예혁명이라고 이름 붙이지 않아도, 헌법을 가지게 된 모든 근대국가는 혁명을 거친 셈이다. 혁명에 성공하고 나면 그 이념과 취지를 담은 선언문을 공포하고, 내용을 구체화하는 헌법을 제정하였다. 그리고 그 진상을, 당신 자신이 바로 주권자라는 사실을 일깨워 주기 위한 홍보를 하여야 했다. 

참여연대가 기획한 것이 혁명은 아니었다. 창립선언문을 만들고 발표할 즈음의 분위기야 혁명 이상이었지만, 만방에 내건 목표는 너무나 현실적으로 개혁이었다. 사법 개혁, 의정 개혁, 행정 개혁을 통한 사회 개혁이었다. 그것이 참여민주주의 이념의 구체적 실행 과제였다. 혁명처럼 과격한 정도는 아니지만, 개선보다는 단호하고 철저한 것이 개혁이라고 믿었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것이고, 그 방식으로 국가기관을 감시하고 다그치는 한편 주권자로서 직접 나서자는 열혈의 제안이었다. 그러자면 참여연대의 이념과 정신을 알릴 필요도 있었다. 

참여사회 아카데미 문을 열다 

1996년 1월, 창설 멤버보다 1년 남짓 늦게 들어온 박영선은 맑은사회만들기 운동본부에서 출발하여 회원 및 시민 사업을 하는 조직부로 넘어가며 처음부터 몇몇 업무를 통할하는 간부 역할을 맡게 되었다. 용산 역전의 낡은 사무실에 들어선 느낌은 전문화된 시민운동 단체라기보다는 꾀죄죄한 대학 서클방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하지만 이층 출입문을 들어서면 바로 오른쪽에 자리 잡은 작은 방의 분위기는 조금 달랐다. 거기에는 참여연대 고유의 어휘와 내용으로 뭔가 재조직하려는 욕구가 조용히 흐르고 있었다. 그 시도가 제대로 완성만 된다면 시민운동이란 이런 것이다라며 제시할 수 있는 전문성이 느껴졌다. 흩어진 몇 장의 종이 위에 썼다가 지우고 그렸다가 뭉갠 고민은 참여사회 아카데미의 준비 작업이었으며, 그 일을 도맡은 간사는 안경주였다. 

1996년 10월 12일, 참여사회아카데미의 사회복지학교 4기 입학식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1999년 9월 14일, 참여사회 아카데미에서 연 ‘새로운 천년을 향한 준비(한국편)
20세기 한국사회 돌아보기’ 강의 현장 

아카데미의 목표는 회원 교육을 통한 시민교육으로 설정했다. 하지만 열악한 초기 여건 속에서도 가능한 최대의 성과를 노려야 했기에, 강좌를 통한 홍보 이외의 효과도 구상해야 했다. 회원을 모집하는 수단으로 이용해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활동가 재교육의 가능성도 타진할 수밖에 없었다. 그 과정의 바탕에 참여연대 시민운동의 이론이 정립돼야 했고, 결과를 반영해 논리의 확대재생산도 기대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어야 했다. 

그런 일을 혼자 맡아서 하려니 힘들었다. 처음부터 관심이 있었던 분야가 아니어서 특별히 아는 것도 없었다. 그래도 어떻게 꾸려 그해 9월 9일, 아카데미 제1기 강좌의 문을 시민종합학교라는 이름으로 열었다. 내부에서 박원순과 손혁재가 하나씩 맡았고, 조광희를 비롯한 영화를 좋아하는 변호사들이 모여 영화 감상 프로그램도 준비했다. 홍순민에게는 서울의 궁궐이야기를, 한겨레21 편집장으로 있던 오귀환에게는 세계 동향을 부탁했다. 첫번째 강좌는 <갈등과 분쟁, 이렇게 해결합시다>였고, 강사는 현대그룹 임원을 지낸 조상행이었다. 

교육으로 좋은 시민 되기

필요성 때문에 시작은 했지만, 아카데미 사업은 참여연대 내에서는 부수적이고 종속적이었다. 관심도 지원도 부족한 상황에서 간사 혼자 기획하고 준비하다 보니 내용보다는 성사 자체에 비중을 둘 수밖에 없었고, 따라서 프로그램은 아카데미 설립의 근본 취지에서 조금 멀었지만 대중성은 갖추었다. 따라서 수강생을 맞아들여 폐강하지 않고 진행하게 되었다. 

그나마 가능했던 것은 내부에서는 이대훈과 박영선의 도움을 받고 외부에서는 김미란의 조언을 얻었기 때문이다. 김미란은 90년대 초반 대학을 졸업하면서 가톨릭학생운동 선배로 만난 이성훈으로부터 인권이란 용어를 처음 들었다. 그리고 그의 권유로 참여연대 회원으로 가입했다. 대학원에 입학한 김미란은 평생교육을 공부의 주제로 삼았는데, 사회교육의 원류는 결국 멀리는 야학이며 가까이는 종교단체와 사회단체를 통한 시민교육이란 사실을 알게 됐다. 이어서 시민사회단체의 시민교육 현황 분석을 위한 실태 조사를 했고, 그러면서 흥사단, 경실련, 환경운동연합 같은 단체와 접촉하는 경험을 하였다. 바로 그때쯤 참여연대에서 연령별 회원 소모임이 있다고 참석하라는 연락을 받았다. 담당간사 김숙경의 진행에 따라 김미란은 자기소개를 하면서 앞으로 교육운동을 통해 우리 사회의 시민 자질 향상에 기여할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포부를 밝혔다. 

마침 안경주는 개인 사정으로 몇 개월 만에 그만두기로 결심했고, 참여연대에서는 아카데미를 본격적으로 운영할 수 있는 전문가를 찾기로 하고 있었다. 김숙경은 청년 회원 김미란을 추천했고, 이대훈이 적극 권유하여 김미란이 아카데미를 맡게 됐다. 김미란은 참여연대 운동보다 교육 프로그램에만 관심이 있었다. 따라서 시민단체 활동가가 아니라 ‘나는 교육활동가다’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미리 다졌다. 

1996년 9월에 결혼하고 12월에 참여연대 활동가가 된 그는 시어머니와 손아래 시누이가 신혼집에 함께 살았기에 사무실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어도 그다지 싫지가 않았는지 모른다. 짧은 시간에 전력을 다해 준비해 다음해 1월에 제2기 아카데미를 개강했다. 그리고 바로 봄, 여름, 가을로 이어가며 커리큘럼이 다양해졌고, 원래의 취지에 부합하는 내용도 갖추게 되었다. 사회운동 강좌, 인권과 평화 논쟁, 민주주의 워크숍, 시민운동과 국제법 그리고 참여연대 운동 소개가 이어졌다.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참여사회 아카데미에는 인기 강좌도 더러 있었고, 종종 강좌를 바탕으로 한 단행본이 발간되기도 했다.
사람답게 아름답게 – 차병직 변호사의 행복한 인권이야기, 차병직 지음, 바다출판사, 2003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 – 박원순 세기의 재판 이야기, 박원순 지음, 한겨레출판, 1999
법과 문학 사이 안경환 지음, 까치글방, 1995

안에서도 밖에서도 어려움

하지만 담당자는 여전히 어려웠다. 무엇보다 내부에서 아카데미 활동은 참여연대의 주류 운동에서 벗어난 부수적 활동으로만 여길 뿐이었다. 담당자 혼자 열심히 매달리면, 그럴수록 한가로운 일에 열을 올린다는 시선이 따가웠다. 그래도 강좌 수가 늘어나자 누추한 사무실 공간으로는 참여자들을 맞을 수 없어 옆 건물의 방을 빌리기도 했다. 강사가 박원순일 경우 듣는 사람은 좋을지 몰라도 김미란은 불행했다. 유달리 복잡하고 많은 텍스트와 참고 자료 때문에 구석기시대 물건 같은 복사기와 몇 시간씩 씨름하고, 거기서 겨우 벗어나면 산더미같은 종이 뭉치를 손수레에 싣고 엘리베이터 없는 건물을 오르내리며 뛰어야 했다. 

준비하면서 의외로 가장 쉬웠던 부분은 강좌 기획과 강사 섭외였다. 임원을 맡고 있는 교수, 법률가들을 통하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가끔 유명한 외부 강사를 초청할 때도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됐다. 참여연대라면 누구나 반가워하며 흔쾌히 응했기 때문이다. 그만큼 참여연대의 내적 자원의 바탕은 든든했고 외적 신뢰도 또한 높았다. 정작 걱정은 개강 광고를 신문에 낸 다음부터 시작됐다. 수강 신청자가 과연 얼마나 될까, 폐강하게 될 강좌는 몇 개나 될까, 노심초사하며 전화기만 쳐다보고 있어야 했다. 마감이 된 직후, 강사에게 전화로 “폐강되고 말았습니다”라고 알려줄 때가 가장 괴로운 순간이었다. 

그러다 정말 폐강하고 말았다. 한두 강좌가 아니라 아예 아카데미 문을 닫았다. 총선연대 이후 시민단체는 정치세력화 논쟁에 휩싸였다. 다른 한편 1982년의 사회교육법에 이어 1999년 제정된 평생교육법의 시행과 함께 지방자치단체에서 백화점에 이르기까지 아카데미 붐이 일었다. 특히 초기 참여사회 아카데미에서 제법 인기를 끌었던 강좌에서 힌트를 얻은 유사한 강좌가 광고 능력을 갖춘 언론사에 의해 개설되기 시작했다. 2001년 가을 김미란이 출산 휴가를 떠나고, 잠시 빈자리를 김창엽이 맡았다. 다음해 봄 학기 강좌를 마치면서 그는 참여사회 아카데미가 다른 아카데미의 물결 속에서 경쟁력을 유지할 수 없다며, 앞으로는 회원 교육에만 집중하겠다고 선언했다. 

조희연, 김동춘, 김호기, 김상조, 김동광, 신광영 등은 무보수의 단골 강사였다. 그래도 아카데미에 인기 강좌도 더러 있었고, 그것이 단행본으로 발간돼 10년 넘게 지금까지 팔리는 스테디셀러도 있다. 박원순의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나 『사람답게 아름답게』는 중고생들의 논술 대비 교재로도 활용된다. 반대로 안경환은 1995년에 『법과 문학 사이』를 먼저 내고, 앵콜의 환호에 응하듯 다음 해에 아카데미에서 강연을 했다. 

압구정 아줌마가 새롭게 만난 세계 

1997년 가을이었을 것이다. 박원순이 맡은 제5기 아카데미 <세기의 재판> 교실에 눈에 띄는 수강자가 있었다. 범상하지 않은 화장에 멋진 스카프까지 두른 30대로 보이는 여성의 차림새는 거부감을 줄 정도는 아니었지만 단연 이채로웠다. 그의 이름은 이옥숙이었는데, 얼마 지나지 않아 참여연대 안에서는 압구정 아줌마로 통했다. 당시에는 참여연대와 너무 먼 거리에 있는 것처럼 보였던 압구정동의 최고급 아파트에 사는 부유한 가정의 부인이었기 때문이다.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그는 어느 날 한겨레에서 무심코 참여사회 아카데미 광고를 보았다. 딱히 읽으려고 든 것은 아니지만, 제목 하나가 눈에 들었다. 바로 <세기의 재판>이었는데, 소제목에 그만 빨려들고 말았다. 목이 짧아 단두대에서 수염까지 잘릴까봐 우려했던 토머스 모어뿐만 아니라 소크라테스, 예수에 잔다르크까지 있었다. 화려한 피고인들에 매료된 나머지 압구정 아줌마는 안국동으로 찾아왔고, 급기야 강사의 인품에 감복하여 박원순의 열혈 팬이 되고 말았다. 그 뒤로 즉시 회원가입을 하고, 다른 아카데미 강좌 수강은 물론 회원모임에도 나타났다. 회비에 후원금을 보태고, 가끔 주변 사람들을 회원으로 끌어들이기도 했다. 그가 스스로 고백한 바에 따르면, 우연히 들른 아카데미 강좌를 통해 참여연대를 알게 됐고, 참여연대를 통해 시민사회를 이해할 수 있었으며, 이해의 과정에서 생전 처음 다른 세계를 만날 수 있었다. 문득 다른 세계를 느끼는 자기 자신도 새로워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언젠가 해외로 이주하고 지금 우리 곁에 없다. 하지만 시민교육을 통해 참여연대의 모범 회원이 된 압구정 아줌마의 이미지는 당시 참여연대 사람들의 뇌리에 선명히 남아 있다. 아카데미가 의도한 성과를 상징하듯이. 한 명의 이옥숙이 있으면, 열 명 백 명도 가능하지 않을까 하는 것이 시민운동의 희망이다. 

2009년에 참여연대 시민교육 기구는 아카데미 느티나무라는 새로운 이름을 달고 문을 다시 열었다. 기존의 임원 진영종이 원장, 새로 결합한 주은경이 부원장을 맡았다. 더욱 다양한 강좌를 펼쳐 비교적 성공적으로 운영하고 있는데, 내부에는 언제나 일정한 정도의 논란이 있다. 

참여연대 아카데미라면 참여연대만 할 수 있는 내용을 교육해야 하는 것이 아닌가라는 원론적 의문과 시민교육에 제한이 있을 수 없으며 우선 시민이 모여야 다음 단계를 도모할 수 있다는 현실적 항변이 가끔 부딪힌다. 

회원이건 일반 시민이건, 참여사회 아카데미의 교육 목적은 무엇인가? 참여연대의 이념이나 참여연대가 표방하는 개혁 목표에 의기투합하여 그에 방해가 되는 적을 물리칠 수 있는 투사를 기르는 것인가? 넓은 의미의 사회통합을 향한 소통과 이해의 덕목을 갖춘 달인을 양성하는 것인가? 아니면 모두 겸비한 모범시민을 만드는 것인가? 만드는 것인가, 함께 되려는 것인가? 어쩌면 그것은 아카데미 이전에 참여연대의 목적과 목표부터 재점검해야 해결될 수 있을지 모른다. 

연재 순서

#01 봄은 주총의 계절이었던 시절 – 1997 소액주주운동
#02 법원 하나를 날려버린 고발장 – 1998 의정부 법조비리 사건
#03 거리의 신화, 시민불복종 – 2000 낙천낙선운동
#04 호루라기를 나눠 드립니다 – 1994~공익제보자 지원 운동
#05 “비가 싫어질 수도 있겠구나”- 2004, 2010 최저생계비로 한달나기 희망UP 캠페인
#06  어느 문패에 대한 20년의 명상 – 1994 참여연대 창립선언문
#07 ‘올리브’가 서쪽으로 가서는 안 되는 까닭 – 2003~2008 이라크 파병 반대 운동
#08  깃발의 상상력 – 1인시위
#09  작은 것도 치열하다 – 1997~ 작은권리찾기운동
#10  만리장성으로도 광장을 막지는 못한다 – 2009 서울광장조례개정운동
#11  종이에 새긴 희망, 열정 그리고 고뇌 – 참여사회
#12  햇빛은 어디에 필요한가 – 1998년~ 선샤인 프로젝트
#13  은유의 전사들 지리산 방황기 ? 2000년 여름 고난의 행군
#14  천안함은 가라앉고 의혹은 뜨고 – 2010 천안함 침몰 사건 대응
#15  옥은 보이지 않고 티만 보이는구나 – 1994~ 인사청문회
#16  압구정 아줌마의 방향 전환 – 1996~ 참여연대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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