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들기름과 고춧가루 편
도시여자
들깨와 건고추를 차 한가득 싣고 방앗간에 갔어. 해보지 않은 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아봐서 농사에 대한 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 남자를 보니, 나도 덩달아 우울해졌어.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지. 농사는 남자가 짓고, 주문받고 포장하고 파는 나름의 마케팅 과정을 내가 담당하기로 한 나의 결정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말이야. 남자가 팔기까지 했어봐. 아마 쓰러졌을 거야. 다 내 덕이지. 암만, 그렇고말고.
유혹의 붉은 가루, 치유의 황금빛 액체
때가 때이니만큼 방앗간은 사람들로 붐볐어. 남자의 농산물을 내려놓자마자, 사람들은 좋다며 탄성을 질렀지. 방앗간 어르신은 남는 게 있으면 당신한테 팔라고 하셨지만, 주문이 완료되어 우리 먹을 것도 없다는 엄살을 피우며 난 기분 좋게 배짱을 튕겼어. 처음엔 고춧가루를 빻았어. 기계에 넣고 돌리는데 온갖 매운 내가 진동을 하는 거야. 눈물이 날 것 같은 매운 향기를 견디자니, 남자의 고생이 나에게 전달되는 거야. 올해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매운 내 핑계 삼아 엉엉 울고 싶었어. 하지만 사람들 눈이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었어. 나도 체면이 있잖아.
그 다음에는 들깨를 짰어. 고소한 내가 사방을 진동하는데,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호호 불어주는 따스한 엄마의 입김에 울음을 멈추는 아이가 되었지 모야. 난 잠시 시름을 잊고 천진난만한 눈이 되어 기름을 짜는 과정을 관찰했어. 들깨를 짜는 시간은 5시간이나 걸렸어. 아무려면 우리 것이랑 다른 사람 것이 바뀌기야 하겠냐마는 난 도끼눈을 하고 남자의 약도 안 친 농산물이 깨끗이 남김없이 잘 갈아지고 짜이는지 감시했어. 시간이 계속 흐르니까 말이야. 또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살면서 힘들고 상처 나고 멍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아팠던 적은 없었을까. 순간 나의 잘못을 깨달았지. 잘못의 씨앗은 내가 그토록 뿌듯해하던 분업에서 싹터왔다는 것을.
함께 일하고, 감동을 나누려고
올해 우리는 각각 반쪽 삶을 살았던 거야. 남자는 사람들의 칭찬, 감사한 마음을 직접 못 듣고 일만 하잖아. 또한 자신이 직접 빚어낸 깨가 기름으로 나오는 과정, 고추가 가루로 만들어지는 순간에도 밭에 나가 일을 하잖아. 동시에 난 이 생명들이 어떻게 피고 자라고 떨어지는지 모르잖아. 삶의 한 단면만을 아는 것이 좋은 것일까? 하나만 아는 것이 더 깊게 아는 것일까? 옹달샘에서 시작한 생각은 흐르고 흘러서 강과 바다를 만났어. 일의 과정을 자르고 잘라서 칸막이를 치고 각각 내 것만을 책임지는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행복이라는 가치는 얼마만큼 들어있는 것일까.
서로가 스미듯이 엉겨서 하나의 과정을 온전히 이해해야 그 안의 희로애락을 경험하여 또 다른 성격의 힘이 나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년에도 남자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말이야, 나도 밭에 나가려고. 근데 나는 손으로 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고 연약하기까지 한데. 땡볕에 일하다가 쓰러지기까지 하면 어쩌지? 그럼 남자를 더 고생시키겠지? 그래서 생각해냈어. 농사짓는 것은 눈으로 보면서 남자 옆에서 피리를 불어 주거나 책을 읽어 줄 거야. 그리고 남자도 방앗간에 데려올 거야. 그래서 건고추가 부서져 붉은 가루가 되는 과정, 들깨가 눌려 황금빛 액체로 빚어지는 과정을 다 보게 해서 오늘의 감동을 남자에게도 전해줄 거야. 사람들의 감사도 직접 받게 하고 말이야. 남자도 내 생각을 좋아할까? 내 원대한 계획을 빨리 말해주고 싶은데, 오늘도 남자는 일찍 곯아떨어졌군.
고마워, 고마워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네. 사실 처음엔 이야기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 내가 왜 글을 쓰기로 했을까 벽에 머리를 찧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의 글을 다들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들고. 근데 쓰다 보니 재미도 있고, 헤어지는 순간이 슬프기까지 해. 알게 모르게 이 공간에 정이 많이 들었나봐. 그동안 나의 산골 사는 투정을 들어줘서 너무 고맙고. 내게 너무 자랑스러운 참여연대, 참여연대의 든든한 회원들과 소통하는 소중한 이 공간에 잠시 머물 수 있어 좋았어. 건방지게 글 쓴 것도 용서해줄 거지?
서로 잘 모르지만 글로 맺은 것도 소중한 인연이지 않을까 하며 저의 모든 글을 마칩니다. 당신의 삶, 어디서나 유혹의 붉은 가루와 치유의 황금빛 액체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살림>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도시여자 춘천의 별빛산골교육센터에 산골유학 온 도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낸 지 벌써 4년. 마음만은 성격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전히 도시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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