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2월 2013-12-05   1158

[살림]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 들기름과 고춧가루 편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들기름과 고춧가루 편

 

도시여자

 

들깨와 건고추를 차 한가득 싣고 방앗간에 갔어. 해보지 않은 일 하는 것이 얼마나 힘든데. 어렸을 때 시골에 살아봐서 농사에 대한 감이 있는 것도 아니고. 피로가 회복되지 않는 남자를 보니, 나도 덩달아 우울해졌어. 그러면서 다시 한 번 생각했지. 농사는 남자가 짓고, 주문받고 포장하고 파는 나름의 마케팅 과정을 내가 담당하기로 한 나의 결정이 얼마나 현명한지를 말이야. 남자가 팔기까지 했어봐. 아마 쓰러졌을 거야. 다 내 덕이지. 암만, 그렇고말고.

 

유혹의 붉은 가루, 치유의 황금빛 액체 

 

때가 때이니만큼 방앗간은 사람들로 붐볐어. 남자의 농산물을 내려놓자마자, 사람들은 좋다며 탄성을 질렀지. 방앗간 어르신은 남는 게 있으면 당신한테 팔라고 하셨지만, 주문이 완료되어 우리 먹을 것도 없다는 엄살을 피우며 난 기분 좋게 배짱을 튕겼어. 처음엔 고춧가루를 빻았어. 기계에 넣고 돌리는데 온갖 매운 내가 진동을 하는 거야. 눈물이 날 것 같은 매운 향기를 견디자니, 남자의 고생이 나에게 전달되는 거야. 올해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고. 매운 내 핑계 삼아 엉엉 울고 싶었어. 하지만 사람들 눈이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앉아 있었어. 나도 체면이 있잖아. 

 

그 다음에는 들깨를 짰어. 고소한 내가 사방을 진동하는데, 참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상처에 연고를 바르며 호호 불어주는 따스한 엄마의 입김에 울음을 멈추는 아이가 되었지 모야. 난 잠시 시름을 잊고 천진난만한 눈이 되어 기름을 짜는 과정을 관찰했어. 들깨를 짜는 시간은 5시간이나 걸렸어. 아무려면 우리 것이랑 다른 사람 것이 바뀌기야 하겠냐마는 난 도끼눈을 하고 남자의 약도 안 친 농산물이 깨끗이 남김없이 잘 갈아지고 짜이는지 감시했어. 시간이 계속 흐르니까 말이야. 또 신기한 일이 벌어졌어. 살면서 힘들고 상처 나고 멍드는 것은 당연하지만, 필요 이상으로 아팠던 적은 없었을까. 순간 나의 잘못을 깨달았지. 잘못의 씨앗은 내가 그토록 뿌듯해하던 분업에서 싹터왔다는 것을.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

 

함께 일하고, 감동을 나누려고 

 

올해 우리는 각각 반쪽 삶을 살았던 거야. 남자는 사람들의 칭찬, 감사한 마음을 직접 못 듣고 일만 하잖아. 또한 자신이 직접 빚어낸 깨가 기름으로 나오는 과정, 고추가 가루로 만들어지는 순간에도 밭에 나가 일을 하잖아. 동시에 난 이 생명들이 어떻게 피고 자라고 떨어지는지 모르잖아. 삶의 한 단면만을 아는 것이 좋은 것일까? 하나만 아는 것이 더 깊게 아는 것일까? 옹달샘에서 시작한 생각은 흐르고 흘러서 강과 바다를 만났어. 일의 과정을 자르고 잘라서 칸막이를 치고 각각 내 것만을 책임지는 분업이라는 시스템에 행복이라는 가치는 얼마만큼 들어있는 것일까.  

 

서로가 스미듯이 엉겨서 하나의 과정을 온전히 이해해야 그 안의 희로애락을 경험하여 또 다른 성격의 힘이 나는 것 같아. 그래서 말인데 내년에도 남자가 농사를 짓는다고 하면 말이야, 나도 밭에 나가려고. 근데 나는 손으로 하는 일에는 영 소질이 없고 연약하기까지 한데. 땡볕에 일하다가 쓰러지기까지 하면 어쩌지? 그럼 남자를 더 고생시키겠지? 그래서 생각해냈어. 농사짓는 것은 눈으로 보면서 남자 옆에서 피리를 불어 주거나 책을 읽어 줄 거야. 그리고 남자도 방앗간에 데려올 거야. 그래서 건고추가 부서져 붉은 가루가 되는 과정, 들깨가 눌려 황금빛 액체로 빚어지는 과정을 다 보게 해서 오늘의 감동을 남자에게도 전해줄 거야. 사람들의 감사도 직접 받게 하고 말이야. 남자도 내 생각을 좋아할까? 내 원대한 계획을 빨리 말해주고 싶은데, 오늘도 남자는 일찍 곯아떨어졌군. 

 

고마워, 고마워 

 

오늘이 우리의 마지막 만남이네. 사실 처음엔 이야기하는 게 너무 부끄러웠어. 내가 왜 글을 쓰기로 했을까 벽에 머리를 찧고 싶었던 순간이 한두 번이 아니야. 나의 글을 다들 비웃으면 어쩌지 하는 불안감도 들고. 근데 쓰다 보니 재미도 있고, 헤어지는 순간이 슬프기까지 해. 알게 모르게 이 공간에 정이 많이 들었나봐. 그동안 나의 산골 사는 투정을 들어줘서 너무 고맙고. 내게 너무 자랑스러운 참여연대, 참여연대의 든든한 회원들과 소통하는 소중한 이 공간에 잠시 머물 수 있어 좋았어. 건방지게 글 쓴 것도 용서해줄 거지? 

서로 잘 모르지만 글로 맺은 것도 소중한 인연이지 않을까 하며 저의 모든 글을 마칩니다. 당신의 삶, 어디서나 유혹의 붉은 가루와 치유의 황금빛 액체가 함께 하기를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 <살림>은 이번호를 마지막으로 연재를 종료합니다.

 

 

도시여자 춘천의 별빛산골교육센터에 산골유학 온 도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낸 지 벌써 4년. 마음만은 성격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전히 도시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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