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2월 2013-12-05   2384

[역사] 도청의 추억

도청의 추억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너도 하고 나도 하는?

 

세계가 도청 소동으로 들끓고 있다. 미국 국가안보국(NSA)이란 기관이 있다. 1952년에 설립된 국방부 산하의 정보수집기관으로 중앙정보국(CIA)과 함께 첩보공작의 양대 축을 이루고 있다. 전 CIA 요원인 스노든의 폭로로 7월에는 NSA가 미국 주재 각국 대사관을 도청한 사실이, 10월에는 35개국 정상들을 도청한 사실이 드러났다. 메르켈 독일 총리를 포함하여 각국 정상들이 거세게 항의하면서 도청이 외교 문제로 비화하자, 미국 정부는 “현재는 하고 있지 않으며 앞으로도 하지 않을 것”이라는 모호한 답변을 내놓았다. NSA는 ‘외국 정상에 대한 감시는 정보활동의 일부분으로 전혀 새로운 것이 아니며 미국 동맹국들도 미국을 상대로 첩보활동을 하고 있다’고 항변했다. 

 

청와대도 ‘세계의 귀’ NSA의 감시망 안에 있었다. 11월 초 뉴욕타임스는 NSA가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을 폭로했다. 노무현 정권 말기부터 이명박 정권 초기에 해당하는 시기였다.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6자회담, 전시작전권 문제 등으로 한미관계가 퍽이나 민감했던 시절이었다. NSA의 정보대상수집국 기준에 따르면, 한국이 중국, 러시아, 쿠바, 이스라엘, 이란, 파키스탄, 북한, 프랑스, 베네수엘라 등과 함께 미국에 절대적으로 중요한 초점 지역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명백한 주권침해 사안임에도 박근혜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을 통해 미국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고 밝힐 뿐, 그 이상의 대응을 하지 않고 있다. 심지어 ‘우리도 외국 정상이나 고위 인사가 오면 도청을 시도한다’며 2011년 인도네시아 특사단이 묵던 호텔에 국정원 요원이 침투했던 사건을 상기시키는 정부 관계자도 있었다. 너도 하지만 나도 하니, 서로 따지지 말자는 건가?     

 

참여사회 2013-12월 통권205호@atopy

 

청와대 도청, 새삼스럽지 않은 사건

 

박정희 정부에서도 청와대 도청 소동이 있었다. 1976년 10월 워싱턴포스트지는 ‘1970년 미 정보기관이 전자도청 녹음기 등을 이용하여 청와대에서 미국 의회를 상대로 한 로비 활동 관련 회의를 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고 보도했다. 이에 국무총리와 외무부 장관은 주한 미국대사를 불러 조속한 공개 해명을 촉구했다. 미국 정부는 정보기관의 활동에 대해서는 공개적으로 논평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며 버티다 결국 두 달 만에 비공식적으로 도청 사실을 부정하며 진화에 나섰다. 이듬해 6월 또다시 뉴욕타임스가 청와대 도청이 1970년이 아닌 1975년에 일어난 사건이라고 폭로했다. 정부는 미국 정부가 도청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문서로 밝힐 것을 요구하는 항의각서를 전달했다. 이번에는 두 달 뒤 터너 CIA국장이 직접 청와대 도청에 관한 보도들은 사실이 아니라고 공식 해명했다.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1978년 4월 3일 전 주한 미국대사였던 포터가 CBS방송에 출연하여 1967년 이전에는 도청했으나, 자신이 그만두도록 명령했다고 밝혔다. 그의 발언은 1967년 이전부터 도청했고 1970년에도, 1975년에도 도청한 것으로밖에 볼 수 없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미국 정부에 도청이 사실이라면 이는 주권을 침해하는 중대한 문제라며 진상을 해명하라고 촉구했다. 일단 미국 정부는 이미 터너 국장이 공식 해명한 일이라며 무마하려 했다.   

 

미국은 사과하라

 

놀랍게도 유신 치하에서 반미 시위가 일어났다. 대한상이군경회부터 나섰다. 목발을 짚거나 휠체어를 타고 나온 상이군경들이 “민주 자유 수호를 위해 함께 싸운 맹방으로서 국가원수 집무실에 대한 도청 행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며 궐기했다. 대한반공청년회와 대한전몰군경유족회도 뒤를 따랐다. 5만에 가까운 대학생과 고등학생도 규탄대회를 열었다. 종교단체와 여성단체들도 나섰는데, 전국주부교실중앙회 간부들은 아예 미국 대사관 안에 들어가 침묵시위를 펼치기도 했다. 반미시위는 대개 자주국방의 결의를 다지며 방위 성금을 내는 행사로 마무리되었다. 국회도 동참했다. 국회 외무위원회는 도청사건은 주권을 침해한 중대사건이라며 미국 정부의 해명과 재발 방지를 요구하는 성명을 채택했다. 

 

마침내 포터의 폭로 이후 보름 만인 4월 18일에 미국 카터 대통령은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서한을 보내와 청와대를 도청한 사실이 없음을 거듭 해명하고 전직 공직자의 발언으로 대한민국 정부에 누를 끼친 데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 정부는 이 서한을 성의 있는 해명으로 받아들였다. 약속한 듯 반미시위는 일제히 막을 내렸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미국 정부와 여러모로 껄끄러운 관계에 있었다. 청와대 도청 사건은 그런 미국 정부를 궁지로 몰 수 있는 호재였다. 그것이 관제성 반미시위로까지 이어졌던 것이다. 반면 박근혜 정부는 청와대 도청 사건과 관련하여 조용한 외교를 시도하고 있다. 보수우익은 소위 종북 척결 시위에만 몰두할 뿐이다. 지금 미국과 대한민국은 어떤 관계인가? 미국의 주권 침해에 마땅히 항의해야 할 주체는 누구인가? 자꾸만 곱씹게 된다. 

 

 

김정인 춘천교육대학교 사회과교육과 교수

참여연대 창립 멤버, 현 참여연대 운영위원회 부위원장. 한국근현대사를 전공하였다. 한국 민주주의와 시민사회의 궤적을 좇는 작업과 함께 동아시아사 연구와 교육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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