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0월 2013-10-02   1267

[살림]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 아침편

도시여자의 산골 표류기

아침편

 

도시여자

 

 

가을이 오고 있어. 보여? 하늘의 파란 빛, 숲의 붉은 빛, 벼의 황금빛. 이 모든 빛깔들은 강과 호수에 담겼다가 다시 내뿜어져. 피어오르는 안개로 인해 주변 구석구석으로 다시 번지기도 해. 몽환적인 오색찬란한 물안개를 본다면 아무리 바쁜 걸음이라도 잠시 멈출 수밖에 없을 거야. 바람 소리 들려? 땀범벅이 된 심장도 씻겨주잖아. 새해 초 열심히 세운 계획들은 숱한 사건사고 속에 너덜너덜해지고, 급하게 돌아가는 세상사 따라잡기 숨 가쁘고, 억울하고, 속 터지는 일도 많고, 걱정되는 일도 많고, 올여름도 역시나 더웠지. 잠시 앉아 숨 고르기를 하는 거야. 유혹적인 팜므파탈인 동시에 풍성한 엄마같은 가을을 난 좋아해. 

 

다가올 겨울이 무서워

 

근데 올해는 낭만에 취할 틈도, 숨 고를 틈도 없어. 아침저녁으로 기온이 떨어지자마자 나를 덮친 것은 겨울에 대한 공포야. 작년 산골의 혹독한 겨울이 생각나. 올겨울은 또 어떻게 보내지? 눈으로 얼어붙은 고개를 넘을 때마다 논둑으로 미끄러져 박힐까봐 바들바들 떨면서 차를 몰아야 하고. 가장 큰 걱정은 난방이야. 나무를 구해야 하고, 때기 좋게 나무를 쪼개야하고, 그 나무를 아침저녁으로 때맞춰 때야 하고. 그래야 우선 죽을 것만 같은 추위를 막을 수 있어. 하지만 상관없어. 그건 내 일이 아니니까. 그건 같이 사는 남자가 할 일이지. 최근 남자의 가장 큰 고민은 땔감 구하는 거야. 겨울에 대한 공포가 없는 이들은 아이들밖에 없어. 계곡의 물놀이가 끝나자마자 눈썰매를 타겠다며 겨울을 손꼽아 기다리지 뭐야. 내가 가을가을봄봄가을가을봄봄이었으면 좋겠다고 하니까, 아이들은 여름여름겨울겨울여름여름겨울겨울 노래를 불러. 하나도 안 춥다나봐. 부러워 죽겠어. 

 

참여사회 2013-10월호 이미지

 

겨울의 공포는…… 아…… 잠시만. 우선 숨부터 가다듬고. 내가 세상에서 제일 싫어하는 게 세 가지야. 첫째, 아침 일찍 일어나는 것. 둘째, 밥하는 것. 셋째, 추운 것. 이 세 가지를 한 번에 하는 때가 바로 겨울이지. 생각만 해도 무서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야. 도시에서의 겨울도 추웠지만, 작은 일 하나에도 온몸을 움직여야 하는 산골의 겨울은 나같이 게으른 인간에겐 정말 치명적이야. 주변에 마트나 음식점 하나 없는 산골에서의 가사 노동이란…….

 

아침밥을 준비하며 공기를 데우며

 

상상을 잠시 해봐. 알람이 울려서 눈을 떴는데 세상이 깜깜해. 춥고 졸린 데도 이 악물고 일어나. 아무리 무서운 악몽을 꿨더라도 더 자고 싶어. 얼음 같은 공기로부터 온 몸을 감싸주는 이불을 걷어내기란 보통의 용기로는 어림없지. 싸움터에 나가는 전사의 용기가 필요하다니까. 하얀 입김이 나오기 시작해. 방문을 열고 나와 부엌 불을 켜. 저녁에 넣은 장작은 밤새 타서 없어졌기 때문에 부엌은 꽁꽁 언 상태야. 가스난로도 켜. 난로의 열기는 처음에는 도움이 안 되지만 내가 부엌에서 지지고 볶으며 만들어내는 아침밥의 열기와 합쳐지면, 서너 배의 효과를 내. 그렇게 산골의 겨울 공기를 데우는 거야. 그 다음에 난 남자와 아이들을 깨우지. 따스한 공간에서 오늘 하루 태어날 수 있게 말이지. 매일매일. 

 

에너지를 주는 아침밥상같은 공간

 

바로 이거야. 곧 먹을 밥이 칙폭칙폭 만들어지는 소리. 익숙한 음식이 갓 만들어지는 냄새. 아침 햇살 직전의 어둠을 내쫒는 부엌 불빛. 이 세 가지가 합쳐지면 말이야. 단순히 합이 아닌 제곱의 효과라고나 할까. 싸울 무기를 쥐어주는 것이 아니라 싸울 힘과 용기를 주는 밥상이 펼쳐지는 공간. 바로 내가 힘든 것을 무릅쓰고 최선을 다해서 만들어내는 우리들의 아침이야. 기계가 아닌 사람의 손길로 빚어내기 때문에 그때 그때 다른 빛을 지녀. 그래서 그 누구보다도 내 컨디션이 좋아야 한다고 난 항상 주장하지. 

 

그럼 나는 남을 위한 밥상만 차리며 사느냐고? 아니지. 나도 에너지를 받는 아침밥상 같은 공간이 있어. 그건 말이야. 비밀이야. 여기에 다 쓰면 어떡해. 나에게도 비밀이란 게 있어. 쉿! 그건 그렇고. 내가 아무리 겨울이 다가오는 것이 무섭다고 엄살을 떨어도 가을은 수확의 계절이잖아. 올겨울도 엄청 춥다나봐. 혹독한 추위에 대비하려면 특히 가을에 잘 먹어야 된대. 다들 끼니는 거르지 마. 알았지? 

 

 

도시여자 춘천의 별빛산골교육센터에 산골유학 온 도시 아이들을 돌보며 지낸 지 벌써 4년. 마음만은 성격만은 원하든 원치 않든 여전히 도시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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