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0월 2013-10-02   2032

[놀자] 한 뼘의 땅도 없이 나만의 정원 만들기

한 뼘의 땅도 없이 나만의 정원 만들기

 

이명석 저술업자

 

 

집에서 도서관으로 가는 직선거리 중간에 대학교가 있다. 담벼락을 둘러 가면 족히 15분은 더 걸린다. 학교 안을 가로질러 가는 길도 있지만, 후문이 수시로 닫혀 있어 헛걸음을 하는 경우가 많다. 가끔 초등학생들이 교문을 기어 넘어가는 걸 보고 유혹이 생기긴 하지만, 이 나이에 그랬다간 정말 경찰서로 잡혀갈 수도 있겠다 싶어 관두었다. 그래, 돌아가자. 그리고 기왕 둘러 가는 거, 학교 뒷산을 타고 넘어가보자.  

 

나만의 비밀의 농원

 

수성동 계곡에서 옆으로 터진 계단을 타고 올라가다 보면 등산로를 만난다. 나는 슬그머니 옆으로 빠진다. 사람의 흔적이 거의 없는 숲길을 걷다보면 가파른 돌 비탈이 나오고 두 다리를 찢어야 건널 수 있는 계곡도 만난다. 어떤 곳은 <인디아나 존스>에 나오는 것 같은 외나무 다리가 걸쳐 있다. 한때는 사람들이 다니던 돌계단이 빌라가 생기면서 막혀버린 곳도 있는데, 이끼 낀 계단을 넘어가면 누군가 화분째 던져버린 철쭉이 번지고 번져 커다란 군락을 이룬 장관을 만나기도 한다.  

 

때론 인적이 전혀 없는 곳에 불쑥 나타나는 비밀의 농원에 깜짝 놀란다. 늦겨울에 보았을 때는 작은 고랑만 있어 누군가 버리고 간 밭인가 했다. 내가 몰래 씨앗이라도 뿌려볼까 싶었다. 그런데 봄과 여름이 무르익을수록 작은 싹들이 돋고, 토란 줄기가 자라나고, 고추가 탱글탱글 열려갔다. 몹시 가문 날에는 자그마한 물통들이 옹기종기 찾아와 있는 것도 본다. 한때는 군사 지역이었던 듯 철조망으로 막아놓은 곳도 있는데, 누군가 그 사이를 동그랗게 뚫어 문을 만들어 놓았다. 나는 그 옆 우거진 잡초 사이에서 돌 벤치를 찾아 잠시 쉬어간다. 남들이 여의도 벚꽃놀이에 몰려갈 때, 나는 그곳 그윽한 꽃그늘 아래서 노닐기도 했다. 

 

참여사회 2013-10월호 이미지

 

집에 나만의 정원 만들기 

 

내게 이 초록의 풍경은 지금은 잃어버린 어떤 놀이를 떠올리게 한다. 나도 한때 꽃과 풀에 빠진 적이 있다. 일주일에 두 번씩 종로 5가의 화초 시장을 오가며 제법 커다란 옥상을 화분으로 가득 채우기도 했다. 꽃과 정원에 관한 책을 사 모으다가 중세 시대 수도사들이 그려놓은 허브 그림에 매료되었다. 나 역시 색연필을 들고 화초들의 생김을 꼼꼼히 그려갔는데, 인간이 만들어낸 예술이 아무리 뛰어나도 자연의 완성도는 따라갈 수가 없구나 하며 자책하기도 했다.

 

새로운 품종을 만들고자 하는 원예사들의 열정에도 탄복했다. 언젠가 내가 이름 붙인 장미 한 송이를 피울 수는 없을까 고민하며, 옥상에 온실을 세워볼까도 생각했다. 여의도 공원의 연못에 반해 물의 정원을 만들어보려고 한 적도 있다. 골목길에서 주운 플라스틱 욕조를 끌고 와 물을 채우고 부레옥잠을 뿌려놓았다. 과연 세계 10대 문제 잡초라 불릴 만큼 왕성한 번식력을 확인시켜주었다. 한쪽 귀퉁이에는 진흙 화분을 띄워놓고 파피루스 씨앗도 심었다. 조물주의 기쁨이 이런 건가 싶었다. 그러다가 수중 모터를 사서 분수를 설치하다, 욕조의 바닥이 갈라져 옥상을 물바다로 만들기도 했다.  

 

이 재미를 혼자만 즐길 수는 없다며, 식물 커플 매니저를 자처하기도 했다. 반지하를 전전하는 언더그라운드 뮤지션에게는 아열대의 습한 정글에서 자라는 아스플레늄이나 아디안텀 같은 친구들을 소개해줬다.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야근을 밥 먹듯 하는 친구에겐 사막 같은 사무실에 어울리는 다육식물을 선물하기도 했다. 남의 집을 방문하면 다짜고짜 창을 열어보기도 했다. 화분을 걸칠 틈만 있다면 잘난 체하며 늘어놓았다. 여기는 햇빛이 몇 시부터 몇 시까지 들어오니 어떤 허브가 딱이겠다…….

 

그런데 그 재미를 서서히 잃어갔다. 배수 공사가 제대로 안 된 옥상에 화분을 잔뜩 들여놓았다가 물바다를 만났다. 식물 때문에 긴 여행을 하기 어렵다는 점도 괴로웠다. 물론 가장 큰 이유는 남의집살이다. 점점 늘어나는 화분을 2년마다 이사시키기엔 현실의 장벽이 컸다. 나는 결국 제 땅 없이 화분에만 키우는 정원의 한계를 느끼고, 식물과 노니는 즐거움을 먼 훗날로 미루었다. 

 

동네 식물 지도 만들기

 

하나 집에서 키우는 꽃과 나무만이 내 것은 아니다. 나는 뒷산의 식물 지도를 그리는 일로 예전의 즐거움을 되찾아보고자 한다. 그 지도엔 앵두나무 군락은 어떻게 퍼져 있는지, 청솔모는 어떤 열매를 좋아하는지 그려져 있다. 처음 보는 풀들은 이름을 찾아내 나의 식물도감에 기록해 둔다. 이런 뒷산이 없어도 가능한 일이다. 예전 성북동에서는 동네를 돌아다니며 집집마다 어떤 나무를 키우는지 기록해보곤 했다. 똑같은 살구나무라도 저마다 다른 때에 열매를 맺는 모습을 보는 것도 큰 재미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화, 여행, 커피, 지도 등 호기심이 닿는 갖가지 것들을 즐기고 탐구하며, 그 놀이의 과정을 글로 쓰는 일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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