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9월 2013-09-06   1822

[만남] 그를 만나고, 기록하고, 여기 공개하다 – 전진한 회원

그를 만나고, 기록하고, 여기 공개하다

전진한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사진 Nina Ahn

 

참여사회 9월호

 

2002년 참여연대 간사 공채 현장 

 

대구에서 막 상경한 그는 대학신문 한 장을 면접관들에게 내밀었다. 박원순 당시 참여연대 사무처장이 참석했던 강연 기사가 실린 지면. 그 안에는 치명적이고도 부정할 수 없는 증거가 활자로 기록되어 있었다. 

 “강의가 끝나고 아무도 질문을 하지 않자 박원순 사무처장이 말했어요, 지금 질문하면 참여연대 간사 채용 시 1차 시험은 무조건 통과시켜 주겠다고. 손을 번쩍 들고 참여연대는 왜 언론개혁운동은 안 합니까 했더니, 당신이 들어와서 직접 하라고 하더군요.”

 

그 한 마디 말을 가슴에 품고 그는 고향땅을 떠났다.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신세계를 향하여, 훗날 자신의 인생에서 르네상스로 기록될 시대를 향하여 그는 힘차게 전진했다. 

 

기록1 : 르네상스 시대

 

전진한 회원.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참여연대 간사가 되고 지금은 ‘투명사회를 위한 정보공개센터’에서 소장으로 일하는 그도 학창시절에는 진로에 대한 고민이 많았다. 

 “앞으로 뭘 해야 하나 막막했어요. 하도 할 게 없어서 고시공부를 하던 중에 그 강의를 듣게 되었는데 박원순 처장한테 엄청 감동받아서 나도 평생 저런 일을 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죠.”

 회원 인터뷰를 하다보면 유독 자주 듣는 이름, 박원순. 부드러운 인상과 나지막한 목소리로 전하는 그의 말은 사람들을 열정으로 달뜨게 하고 분노로 흔들리게 한다. 내부에 감춰져있던 에너지를 끓어오르게 만드는 힘, 부드러운 카리스마란 이런 것일 게다. 

 

 “졸업 후에 외국인노동자들을 돕는 일부터 시작했는데 덕분에 법이 얼마나 유용한지도 철저히 깨달을 수 있었죠. 제 전공이 법학인데 사실 고시 안 보면 별 필요가 없거든요. 근데 노동법이 사람의 생명을 살릴 수 있다는 걸 직접 경험하고 나니까 내 배움을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고 싶어졌어요. 참여연대도 그런 일을 하는 곳이라 생각했죠.”

 마지막 면접시험을 치르고 다시 대구로 내려가는 길에 받았던 합격통보. 그날의 흥분과 설레임….  

 “너무 좋아서, 행복했던 그 마음이 아직도 기억나네요.”

 그러나 그를 기다리고 있던 건 장밋빛 미래가 아니었다. 셋방은 걸핏하면 물이 샜고 곰팡이로 뒤덮였다. 집 때문에 당할 만한 일은 모두 당해봤다는 그에게 정작 타향살이에서 가장 문제가 되었던 건 아이러니하게도 바로 참여연대였다. 

 

 “당시 간사 월급이 70만원 정도였는데 하루 세끼 밥 먹고 일상생활을 하기엔 턱없는 액수였죠. 밥만 먹을 수 있다면 어디든 갔어요, 조계사에서 국수도 얻어먹고 임원들 경조사 자리에도 빠지지 않고 가고. 문제는 주말이었죠.”

 집과 여타 실생활에서 비롯되는 온갖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결혼’을 했다는 이 용의주도한 남자에게 참여연대는 어떤 곳이었을까?

 “활동가로서 갖추어야할 기초적인 능력을 모두 배운 곳이죠. 글은 어떻게 쓰는지 기자회견은 어떻게 하는지, 어떻게 시민들을 설득할 것인지 등 참여연대가 가지고 있던 노하우를 모두 전수받았죠. 그 점에 있어서는 지금도 무척 감사해요.”

 

보수색이 강한 대구와 달리 서울엔 다양한 정치관을 가진 사람들이 있었다. 참여연대에서 일하는 동안 만났던 많은 활동가들은 그가 살면서 한 번도 고민해보지 못한 문제들에 대해 이야기했다. 충격과 함께 과거의 시대는 깨져버렸고 그 빈자리는 한층 더 풍요로워진 생각들로 넘실거렸다. 

 “참여연대에서 일했던 그 시기야말로 제 인생에서 르네상스였죠.”

 

기록2 : 독립, 그 이후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참여연대를 떠났다.

 “참여연대는, 활동가 각자의 개성이나 다양성을 표출할 수 있게 도와주는 곳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참여연대만의 운동방식으로 묶어내려는 경향이 강하죠. 당시엔 월급도 그렇고 수습기간도 무척 길었어요.”

노동자의 입장에서 바라보자면 거친 근로환경일 수밖에 없는 곳이 당시의 참여연대였다. 자신이 외국인노동자보다 더 어려웠다며 볼멘소리까지 한다. 그래도 그런 이유 때문에 그만 둔 건 아닐 것이다. 

 “‘정보공개사업단’이 없어진 게 가장 큰 계기가 되었죠. 제가 참여연대에 와서 제일 먼저 배치 받은 곳이었는데 그 일이 무척 재미있었거든요. 고민하다가 그렇다면 나가서 내가 한번 만들어야봐야겠다, 그렇게 된 거죠.”

 

당시 협동사무처장으로 있던 하승수 변호사를 만나 도움도 요청하고 명지대 기록관리대학원에 다니며 공부도 했다. 전국의 기록관리대학원 학생들을 조직하는 일에도 열정을 쏟았다. 흩어져있던 아키비스트(기록관리 전문가)들은 그렇게 모여들었고, 마침내 ‘정보공개’를 사회운동의 새로운 분야로 탄생시켰다.

 

 “아키비스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정보공개센터’를 창립하는 일은 불가능했을 거예요. 재정적인 도움도 많이 받았고 또 그들 자체가 훌륭한 인적자원이었죠. 창립회원 160여 명 중에 100명이 아키비스트들이었으니까요.” 

참여연대의 한쪽 공간을 빌려 시작한 초라한 첫걸음. 하지만 그의 시도는 우리나라 최초의 정보공개운동 단체의 출범을 알리는 서막이었다. 

 

 “투표, 집회, 시위 등은 민주주의의 일부일 뿐입니다. 일상생활에서 우리가 알고 싶은 자료들을 자유롭게 볼 수 있는 것, 그것이 가능하다면 굉장한 민주주의인 거죠. 아직도 일반 시민들은 검찰이나 경찰에 필요한 정보를 요구하는 일을 두려워하거든요.”

 더는 이런 두려움 없이, 14살 이상이면 그곳이 청와대든 국정원이든 당당하게 정보를 요구할 수 있는 사회, 그것이 그가 생각하는 민주주의다.

 “참여연대처럼 논평, 보도자료, 기자회견, 집회 등은 하지 않아요. 그럴 여건도 안 되구요. 단지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그 결과를 저희 단체 블로그에 올릴 뿐이죠. 정보공개를 하지 않으면 거부한 사실을 올립니다. 거부하는 것 자체만으로도 의혹을 불러일으키니까요.”

 인터넷 검색창에 ‘정보공개센터’를 쳤다. 어렵고 무거운 정보들만이 가득할 것이란 예상과 달리, ‘책과 사서가 없는 서울시구립공공도서관’이나 ‘공공도서관의 장애인 대출자료 우편서비스 현황’ 등 일상생활과 밀접한 정보들도 많았다. 그러나 그 많은 정보들 앞에서도 난 본능적으로 운영여건에 대한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말 그대로 비영리민간단체니 말이다.

 “정부지원은 받지 않습니다. 참여연대에서 배운 거죠. 920명의 회원이 내는 회비와 투명한 운영을 통해 쌓은 신뢰 덕에 여러 공익재단으로부터 받는 후원금으로 운영해요. 때로 언론사들과 협력 사업을 하기도 하는데 이번에도 뉴스타파의 정보공개청구 서비스를 대행해주었죠. 그런 과정에서 들어오는 후원금도 있구요.”

그러면서 힘주어 덧붙인다, 활동가들 월급도 참여연대만큼은 준다고…. 장하세요! 

 

참여사회 9월호

 

기록3 : 기록이 없는 나라

 

“한번은 회원 한명이 한 지방자치단체에 정보공개를 요청했는데 공무원의 실수로 촌지 내역을 보내 온 적도 있어요. 하하하, 그때 난리가 났었죠. 또 오세훈 전 서울시장을 상대로 정보공개 요청을 많이 했는데, 그때 오 전 시장이 디자인사업이란 명목으로 예산을 펑펑 써대고 있었거든요. 근데 선거 중이라 정보를 공개할 수 없다는 거예요. 행정소송을 하기엔 시간이 없고, 생각 끝에 ‘정신적 손해배상청구소송’을 했죠. 국민들의 알 권리를 침해했으니 그에 따른 정신적 손해를 배상하라구요.”

 

 이 또한 우리나라 최초였다. 결국 승소했고 배상금으로 받은 100만원은 평소 정보공개 청구에 열심인 분들을 초대하여 조촐한 막걸리 파티를 벌이는 데 쓰였다.  

 “요즘은 원자력발전과 핵문제에 대한 정보공개 청구를 집중적으로 하고 있어요. 그렇게 얻은 정보와 해외에서 나오는 정보들을 한곳에 모아 한국어로 번역도 하고 해서 누구라도 원전과 관련된 내용들을 알기 쉽게 하려는 거죠.”

 

 이런 그가 제발 정보를 공개하지 말라달라는 정신 나간 소리를 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번에 NLL사건과 관련해서 국정원이 2007년 남북정상회담 회의록을 공개했어요. 그것도 100장이 넘는 양을, 국익을 지켜야할 국정원이 직접… 대통령지정기록물 제도가 있는 것은 퇴임 후 15년을 보호할 테니 당신이 대통령으로 있을 때의 기록을 제대로 남겨달라는 건데, 이런 사태가 반복되면 어떤 대통령이 기록을 남기겠어요? 자기가 남긴 기록 때문에 죽은 후에도 부관참시 당할 게 뻔한데. 이 법을 만들 때 동참했던 정문헌 한나라당 의원은 비공개 기간을 퇴임 후 100년으로 하자는 말까지 했었어요. 근데 법이 제정된 지 6년밖에 안된 시점에서 이런 일이 터진 겁니다.”

 

 2007년 노무현 대통령 시절 만들어진 ‘대통령기록물관리에 관한 법률.’ 실제로 이 제도를 통해 그는 제대로 된 기록을 남긴 최초의 대통령이 되었다. 그럼 그전에는? 기록이 없단다.  

 “노태우 대통령 때 대북 특사를 42번 파견했어요. 근데 남아있는 기록은 아무것도 없어요. 남북이 마흔두 번이나 만나서 무슨 이야기들을 했는지 영영 알 수가 없는 거죠.” 

 1945년부터 2007년까지, 대한민국은 기록이 없다. 유구히 이어져 내려오던 기록의 역사는 그렇게 50년 동안 멈춰 서 있어야했다. ‘정보공개’라는 무기를 가지고 세상에 맞서 싸우는 그에겐 이 시기야말로 진정한 암흑기였다. 

 

기만이 난무하는 시대

 

올 여름, 역사책을 읽고 싶다던 딸아이에게 단순무식한 나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20권을 사다 받쳤다. 조선왕조실록, 무려 472년이란 세월이 기록된 이천칠십칠 권의 책, 그리고 사관을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에게도 열람이 허용되지 않았던 역사. 그 앞에 서서 ‘정보공개라는 것은 애초에 기록이 없으면 존재할 수도 없는 것’이라는 그의 말을 천천히 곱씹는다. 

 

 조지 오웰은 말했다. ‘기만이 난무하는 시대엔 진리를 말하는 것이야말로 혁명적 행위이다’라고. 기록과 정보와 공개라는 말로 차고 넘치는 전진한 회원과의 인터뷰를 정리하며, 어쩌면 혁명이란, 너무 멀리서 반짝여서, 그래서 아름다운 별처럼, 그런 게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힘을 지닌 자들이 자꾸만 감추려 하는 것들을 세상 밖으로 끄집어내는 일, 진리를 말하기 이전에 어느 것이 진리인지를 살펴보고 가늠해낼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 그가 하는 일은 바로 그런 것이라고…, 2013년 여름 그와의 만남을 여기, 이렇게 기록으로 남긴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을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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