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10월 2013-10-07   1822

[만남]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법칙 – 이선미 회원

참여사회 2013-10월호 이미지

 

미궁에서 빠져나오는 법칙

이선미 회원

 

호모아줌마데스 / 사진 박영록

 

인터뷰 자리에 나온 회원들 중 열에 아홉은 똑같은 멘트로 말문을 연다. 이번에 만난 이선미 회원도 예외는 아니었다. 

“아니, 왜 하필 저를, 전 너무 평범한 사람인데…….”

대한민국 인구는 약 5천만 명. 그 중 참여연대 회원은 13,432명. 그런 고로 굳이 계산기를 두드려보지 않아도 참여연대 회원이라면 당신은 이미 특별한 소수다. 대다수의 시민들이 여전히 정치적 성격을 띠는 곳에 후원하는 걸 꺼리는 현실에서 참여연대 회원이 된다는 건 일정 정도 자신의 정치적 지향이 드러나는 걸 감수해야 하는, 특히나 요즘 같은 시국엔 ‘참여연대 회원이라고?’라는 질문 뒤에 숨겨진 의혹의 시선들도 묵묵히 감내해야 하는, 조금은 용기가 필요한 일이니까. 전업주부로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사는 나도 한 달에 한 번 ‘참여연대 회원’이라는 자격을 내걸고 세상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각자의 자리에서 용기 내어 살아가는 작은 영웅들을 만나 이야기를 듣는다. 하여 이 지면의 이름은 ‘만남’이다. 

 

타향살이 16년

 

인터뷰가 있던 날은 마침 19번째를 맞는 참여연대 창립기념일. 이선미 회원이 “오늘이 참여연대 생일이죠?”라 말하며 큼지막한 케이크를 내민다. 아, 이 진심 어린 애정 앞에 더 이상 무슨 자격이 필요하단 말인가. 

 

“남편은 대학교 졸업반 때 소개팅으로 만난 남자였어요. 유럽 여행을 간다기에 준비하는 걸 제가 도와주고 하면서 데이트를 했는데, 그게 너무 즐거운 거예요. 나중에 남편이 미국으로 어학연수를 갔는데 거기서 계속 학업을 이어가게 돼서 결혼하고 함께 미국으로 갔죠.”

사람들이 자신의 러브스토리 안에서 주인공이 되는 순간 난 객석의 관객이 된다. 그럴 때면 <시네마천국>의 한 장면처럼 끝나지 않고 계속 이어지는 키스 장면들을 보는 기분이다. 빛바랜 기억들이 주는 아련함과 평온함…….

 

“대학원을 과감히 그만두고 따라 나선 길이었죠. 한국에선 동양화를 전공하면서 학제상 전공에만 집중할 수밖에 없었는데, 미국에서는 제가 원하면 뭐든지 할 수 있었어요. 조각 수업도 듣고 사진, 판화, 섬유 등 하고 싶은 것들은 다 한 번씩 찔러봤죠. 그런 건 너무 좋았는데, 아기가 문제였어요. 결혼하고 1년 뒤쯤 가질 계획이었는데 뜻대로 되지 않았죠.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문제가 너무 큰 스트레스로 다가와서 어느 것에도 집중을 할 수가 없었어요.”

 

종갓집 맏며느리라는 말에 난 3초 정도, 숨을 멈췄던 것 같다. 결국 7년이란 시간이 흐른 뒤 시험관시술로 어여쁜 쌍둥이 두 딸을 갖게 되었다는 대목에서야 한껏 올라가있던 내 가슴도 제자리를 찾아 내려왔다. 그 아이들이 이제 초등학교 4학년이다. 

 

“미국에서 지내면서 성격이 많이 변했던 것 같아요. 예전엔 하고 싶은 일은 어떻게든 하고 마는 성격이었는데, 미국의 한인사회라는 것이 워낙 좁아서 작은 일도 금세 말들이 나고, 그래서인지 매사에 좀 더 신중해지고, 그러다보니 점점 더 소극적으로 변하고…….”

두 딸을 키우며 전업주부로서 사는 그 지난한 일상의 무게를, 그녀가 띄엄띄엄 내뱉는 말들 사이에 놓인 빈 공간들의 의미를 왠지 나는 알 것만 같았다. 나도 엄마니까.

 

“대학원 입학을 앞두고 있던 시점에 임신 사실을 알았어요. 왜 일은 한꺼번에 밀려오는지……. 아이가 너무 소중했기 때문에 입학을 미루었는데, 막연히 아이들이 어느 정도 크면 다시 내 공부를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땐 뭘 몰랐던 거죠.”  

등 뒤로 쾅 하고 문이 닫히며 암전이 되는 느낌, 나는 그랬다. 4년 터울의 두 아이를 키우며 집안에만 머물던 시기에 엄마와 아내가 아닌 ‘나’는 세상에 없었다. 그녀도 그랬던 것일까, 그렇게 길을 잃고 만 것일까.

 

나를 찾아가는 길

 

삶터를 송두리째 바꿔야 하는 일. 미국 생활만 해온 아이 둘을 데리고 이 지옥과 같은 경쟁 교육 속으로 뛰어드는 일은 쉽지 않았다. 아내와 며느리 그리고 딸로서의 역할을 동시에 제대로 해내는 일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녀는 다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졌고 그래서 또 잊을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나’를 말이다.

 

“돌아온 지는 한 3년 정도 돼요. 이것저것 적응이 힘들었죠. 또 다시 모든 문제들이 한꺼번에 몰려오는 느낌? 그런 스트레스 때문인지 몸이 많이 안 좋아졌어요.”

 

그즈음 친구가 참여연대 아카데미 강의 하나를 추천했다. <나를 찾아가는 스타일링 워크숍>.

“그렇게 인연이 시작되었어요. 그 강의를 벌써 네 번이나 들었네요. 처음엔 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게 너무 힘들었어요. 익숙해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렸죠. 이번 가을에도 신청했어요. 매번 다른 사람들을 만나는 게 너무 재밌고 기대되고, 무엇보다 강의를 통해서 저를 다시 만나게 된 것, 그게 가장 소중하고 뜻깊죠.”

 

그동안 생각하고 판단을 내리던 사람은 자신이 아니었다. 언제나 엄마의 입장에 혹은 아내나 며느리의 입장에 선 ‘이선미’였을 뿐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고 나자 질문 하나가 온몸을 아프게 찔러댔다.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가.

“길을 찾기 위한 작업이 시작되었어요. 강사인 제미란 선생님을 비롯해 함께 강의를 듣던 사람들과 같이 말이에요.”

 

그 새로운 길도 참여연대에서 시작되었다. 작년 겨울, 그녀는 그동안 틈틈이 작업했던 패브릭 작품들을 모아 카페통인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그곳에 우연히 참석했던 난, 자신의 작품들 앞에서 두 딸과 함께 환히 웃고 있던 그녀를 볼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젠 개인 작업실까지 갖춘 어엿한 작가가 돼서 내 앞에 앉아 있는 그녀. 

“예전 같으면 작업실을 내기까지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테죠. 돌봐야 할 아이들을 비롯한 이런저런 걱정과 핑계들로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근데 강의를 듣고 좋은 분들과 함께 작업하다 보니 작업실을 내고 싶다는 생각이 자연스럽게 들었어요. 한번 길이 뚫리니까 그리 어렵지 않더라구요.”

 

그녀의 작업실은 옥인동에 있다. 참여연대와 지척이다. 참여연대에서 안내데스크 자원활동을 하는 분이 소개해주셨단다. 이래저래 참여연대에 진 빚이 많다고 그녀는 말한다. 

“카페통인에서의 전시를 계기로 이 공간이 얼마나 좋고 소중한지 깨달았어요. 참여연대에 대해서 많이 알지도 못하고 또 용기가 많은 편도 아니지만, 나도 이 공간을 위해 무언가를 하고 싶다 생각했죠. 그게 제가 카페지기가 된 이유에요.”

 

매주 금요일 오전, 그녀는 커피향이 배어나는 카페통인을 지킨다. 어느 공간에 있을 때 가장 행복하냐는 질문에 서슴없이 “카페통인에 있을 때”라 답하는 그녀. 올 3월에 시작했으니 봄과 여름, 두 계절을 카페에서 지냈으리라. 혼자서 고요해질 수 있는 공간, 책에 적힌 문장 서너 줄에 마음을 전부 빼앗겨도 좋은 시간들. 그 속에서 그녀는 다가오는 세 번째 계절을 맞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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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12월 21일부터 31일까지 카페통인에서 열린 염색공예전 <천, 염색, 실>에 전시된 이선미 회원의 작품들.

 

다시 꿈을 꾸며

 

“아이들한테 더 많은 신경을 쓰겠다고 내 일을 접었지만, 지난 이후 생각해보니 매일 같이 있어주고 더 많이 신경 써주고, 아이를 키운다는 게 그렇게만 한다고 다 되는 것도 아닌데, 그땐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아이들이 첫걸음마를 배우고 그렇게 한발 한발 세상을 향해 나갈 때쯤, 엄마들은 거꾸로 세상에서 뒷걸음치는 법을 배우는 것 같다. 

“아직 아이들은 엄마가 작업실에서 뭘 하는지보다 작업실 근처에 있는 벌레나 풀과 나무들에 더 관심이 많아요. 처음엔 엄마가 작업을 한다는 사실을 무작정 좋아하긴 했어요. 그런데 늘 집에서 자기를 기다려주던 엄마가 어느 날부터 자꾸 늦게 들어오고 그러다보니 불평들이 늘어가고 있어요.”

 

언젠가 그 아이들이 커서 엄마가 되면 오히려 자신들에게 좀 소홀했던 엄마를, 그러면서도 자신의 작업을 놓지 않았던 한 여성을 더 자랑스러워하지는 않을까.

“작가로서 꿈이 있다면, 버려지는 헌 옷이나 가구 같은 물건을 재활용하는 작업을 해보고 싶어요. 같은 꿈을 가진 사람들과 함께 일해보고도 싶고요.”

 

일주일에 한 번 카페에 자원활동을 하러 나오며, 또 작업실을 오가며 그녀는 세상을 바라보았다. 아니, 집과 동네를 벗어나니 그제야 세상의 모습이 하나둘 눈에 들어왔다. 그와 함께 세상에 대한 걱정도 늘어났고 자신의 삶도 좀 더 꼼꼼히 짚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수강료를 할인해 준다고 해서 아무 생각 없이 회원가입을 했어요. 지금은 주위 사람들에게 회원가입을 권유할 만큼 바뀌었어요. 카페에 앉아 『참여사회』를 읽다보면 마음에 와 닿는 것들도 많고, 그런 것들을 어떻게 내 삶에 적용할 것인가 하는 고민도 많죠.”  

기회가 될 때마다 아이들을 데리고 참여연대 행사에도 참석한다. 엄마가 아이들을 채워줄 수 있는 부분에는 한계가 있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예전의 저처럼 일상에 파묻혀 ‘나’를 잊고 사는 주부들이 많죠. 물론 집 근처에서 문화센터의 강의를 듣기도 하고 그러겠지만, 제 생각엔 일상의 공간을 잠시 떠나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 그게 제일 중요한 것 같아요. 그러다보면 아이들한테만이 아니라 자기 스스로에게도 ‘공부’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겠죠.”

 

미궁 속에서 

 

미궁迷宮, 들어가면 나올 길을 쉽게 찾을 수 없게 되어 있는 곳.

종이 위에 그려진 미로를 풀 때는 세 군데가 둘러싸인 부분을 지워 가면 필요한 통로가 남게 된다고 한다. 갈림길에서는 언제든지 왼쪽으로만 가면 제자리로 돌아오게 된다는 ‘왼손의 규칙’ 같은 것도 있다. 그러나 커다란 미궁에서 통로를 찾기 위해서는 시행착오를 몇 번이고 거듭해서 길들을 기억하는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강의를 소개해주며 친구가 말했어요. 생각해 봐라, 예전에 네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결혼하기 전, 두 아이의 엄마가 되기 전, 나는 어떤 사람이었는가. 그 기억을 되찾기 위해 노력해온 시간들. 

 

인생만큼 커다란 미궁이 또 있을까. 그 얽힌 길들을 풀어내기 위해 우린 얼마나 다른 길들을 향해 걸어봤던가. 영웅 테세우스조차 입구에 묶어두었던 실에 의지할 수밖에 없던 그 길에서, 이제 그녀가 자리를 털고 일어선다. 손을 들어 벽을 더듬고, 많이 두렵지만 가보지 않은 길을 향해 발걸음을 뗀다. 

“스스로를 많이 아꼈던 사람, 그런 엄마. 아이들이 그렇게 기억해주면 좋겠어요.”

작은 소망 하나 허리춤에 묶고 가는 길. 그거면 충분하다.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7년 참여연대 회원 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을 시작, 아카데미 느티나무에서 ‘백인보’라는 코너에 비정규적으로 인터뷰 글을 쓰고 있음.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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