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3년 09월 2013-09-06   911

[생활] 철없는 세상

철없는 세상

 

 

 아흔이 넘도록 건강하게 살다 돌아가신 외조부께서 생전에 자주 하시던 말씀이 있다. 제철음식이 사라지면 아픈 사람들이 많이 생기게 된다. 제철마저 사라지면 세상이 망조가 든 것이다. 성인이 되어서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잘 몰랐다. 

 봄과 가을이 짧아지고 긴 여름을 겪는 요즘, 외조부의 말씀이 자주 떠오른다. 올 여름, 지독한 더위를 겪으며 더욱 그랬다. 2013년 여름은 찜통더위, 가마솥더위라는 표현이 더 이상 비유가 아님을 보여줬다. 낮 기온이 40도에 이르렀고, 밤 기온도 열대야 기준인 25도를 훨씬 넘는 30도를 기록한 날이 적지 않았다. 10~20년 전만 하더라도 30~31도는 여름 한낮의 기온이었다. 한밤중의 수은주가 30도를 넘자 언론은 이를 초열대야라고 부르고 있다.

 

 폭염의 이유에 대해 기상관계자들은 북태평양 고기압의 세력 확장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북태평양 고기압이 왜 그렇게 강력해졌는지에 대한 설명은 없다. 예전에는 엘니뇨니 라니냐니 설명을 덧붙이기도 했었다. 물론 그 때도 엘니뇨 현상의 원인에 대한 설명은 없었다. 

“날씨가 왜 덥냐고요? 더운 공기가 몰려와서 그렇습니다.” “아, 그렇군요.” 여기까지다.

예년보다 길고 추워진 겨울 날씨에 대해서도 “찬 기압이 확장을 해서 그렇다.”고 설명하면 많은 사람들은 “아, 그렇군요.”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넘어간다.

 하지만 그렇게 넘어갈 일이 아니다. 최근 몇 년 사이 날씨가 정말 이상해졌다. 변화 속도도 너무 빠르다. 소한, 입춘 등 절기를 지칭하는 용어는 도리어 혼란을 주기 시작했다. 외조부 말씀처럼 제철이 사라지고 있다.

 

참여사회 2013-09월호 이미지

 

 그럼에도 걱정하는 사람은 적다. 무엇보다 이 문제를 걱정하는 나라나 정부가 없다. 지구촌은 지금 끓어오르는 가마솥이다. 물이 끓어오르면 그 안에 든 개구리는 모두 죽을 수밖에 없다. 한때 지구촌 지도자들이 모여 온난화를 막기 위한 대책을 논의했고, 교토의정서를 만들었다. 하지만 지구의 미래에 작은 희망이라도 줄 수 있었던 이 귀한 문서는 미국이 인준을 거부하면서 휴지 조각이 됐다. 지금 지구촌의 화두는 오로지 돈이다. 

 

 지도자들만 탓할 일도 아니다. 개별 인간들의 어리석음도 그에 못지않다. 외조부의 말씀처럼 제철 음식이 줄어들면서 사람들의 건강에 문제가 생기기 시작한 듯 보인다. 단적인 예가 과일이다. 더울 때 나는 과일은 체온을 식혀준다. 겨울에 수박을 먹고 열대 과일을 먹으면 체온이 떨어지고 따라서 면역력도 떨어진다. 병에 취약해진다. 

 

 우리 몸은 수백만 년 동안 제철음식에 적응해왔다. 따라서 우리가 “철없이” 먹는 음식이 병의 원인 가운데 하나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의학계의 연구거리조차 되지 않는다. 제철음식을 먹으라는 권고는 산업적으로 의미가 거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지구온난화를 가속화하고, 기상이변의 주요 원인이 된다는 보고서도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는 지구온난화를 부추기는 배출가스의 20%가 축산업에서 나온다고 발표했다. 축산업에서 나오는 메탄가스가 전 세계에서 운행되는 자동차, 비행기, 트럭, 배, 기차 등이 배출하는 가스의 23배가 넘는다는 것이다. 이런 경고에도 육식에 대한 요구는 빠르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공기청정기 광고를 보면서 인간의 어리석음이 어디까지 갈 수 있는지를 본다. 바깥의 공기는 썩어 가는데 방 안에서 공기청정기를 틀어 놓고 산 속의 맑은 공기를 마신다는 발상은 너무 어이가 없다. 평생 방 안에서만 살 수 있는가? 이런 어리석음이 가져올 결과를 예측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지구에 뭔가 큰 문제가 생겼고, 그로 인해 기후라는 절대불변의 생활환경이 인간이 살기 부적합한 쪽으로 급격하게 바뀌고 있다는 점이다. 

 

 조만간 올해처럼 추석이 빠른 해에는 추석 연휴에 에어컨을 켜게 될 날도 머지않은 것 같다. 호모사피엔스, 지혜 있는 사람. 현생 인류를 가리키는 말이다. 하지만 호모사피엔스들은 그 호칭에 어울리지 않게 어리석다. 호모사피엔스보다는 “철없다”는 표현이 어울린다. 외조부의 우려가 기우이길 바라지만,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가 자꾸 걱정된다.

 

 

권복기 <한겨레> 기자 참여사회 편집위원. ‘심플 & 소울’로 살려다가 느닷없이 디지털 분야에서 일하게 돼 여전히 ‘멘붕’을 겪고 있지만 하늘의 뜻이 있을 것으로 굳게 믿고 있음. 청년과 지역공동체를 화두로 남은 생을 살며 맘씨 좋은 할아버지로 늙는 게 꿈인 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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