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1년 03월 2021-03-01   1669

[역사] 동우전문대 총학생회장 의문사와 지연된 정의

동우전문대 총학생회장 의문사와
지연된 정의

 

 

1990년 3월 28일 새벽 2시경 강원도 속초시 노학동 도로공사 근처에서 동우전문대학교 총학생회장 김용갑(당시 25세)이 승용차에 치여 사망했다. 사건이 있기 넉 달 전, 그가 압도적 표차로 총학생회장에 당선되자 학교 측은 조직폭력배 출신 두 사람을 교직원으로 채용하여 총학생회를 압박하고 총학생회장 사퇴 종용을 반복하고 있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김용갑은 겨울방학 동안 10여 개의 학내 복지 개선을 따냈을 뿐만 아니라 재단의 부동산 투기, 장학금 비리 등에 문제제기하는 등 거침없이 학교에 맞서 왔다. 

 

1990년 1월 22일 민자당 3당 합당선언이 있은 지 2개월 뒤, 학교가 주도해온 학내 폭력은 점점 집요하고 노골적이 되어갔다. 폭력배들은 총학생회가 개최하는 행사마다 들이닥쳐 학생회 간부들에게 위협과 폭력을 가했다. 3월 초 신입생 환영회가 있던 날, 학생처의 사주를 받은 폭력배 10여 명이 총학생회 간부를 유스호스텔에 가두고 마구잡이로 폭행한 일을 비롯해, 김용갑은 그해 3월에만 총 일곱 차례의 폭행을 당했다. 그중 한 교직원은 학생들이 보는 앞에서 “차로 갈아버리겠다. 갈아 버려봤자 6개월이면 풀려난다.”고 위협을 가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총학생회 발대식을 하루 앞두고 일어난 김용갑의 사망 사건은 단순 교통사고 건으로 처리됐다. 학교 측의 교사敎唆 혐의에 대해 학생들의 증언과 호소가 이어졌고 경찰은 최소한 협박죄로라도 그들을 조사하겠으니 이 사실을 밖으로 알리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리고 결국 두 교직원에 대한 조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간 운전자는 자수를 했고, 교직원의 말마따나 운전자는 2심에서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월간참여사회 2021년 3월호 (통권 283호)

故 김용갑의 생전 모습 ©민족민주열사 희생과 추모단체 연대회의

 

“김용갑의 사인을 규명하라!” 

1991년 3월 19일, 김용갑의 첫 번째 추모제가 열리기 일주일 전, 또다시 10여 명의 폭력배들이 추모제를 논의하던 동아리연합회를 급습했다. 당시 동아리연합회장이었던 정연석은 학교의 제적 처리에도 불구하고 학원의 폭력과 비리 척결을 목표로 하는 싸움을 손에 놓지 않고 있었다. 폭력배들은 추모제를 하지 말 것, 동아리 연합회장직을 자신들에게 넘길 것을 요구하며 위협을 가했다. 소란이 일자, 이제껏 머뭇거렸던 학생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달려와 폭력배들에게 몸을 날렸다. 불리함을 느낀 폭력배들은 ‘두고 보자’는 협박을 남긴 채 쫓기듯 돌아갔고, 피투성이가 된 학생들은 서로를 부둥켜안고 처음 얻은 작은 승리를 흐느꼈다.  

 

다음날, 폭력 사태에 항의하고자 1,500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학내 폭력 척결과 부패·비리 재단 퇴진을 위한 결의대회’를 개최했다. 그러자 교내에 머물러 있던 폭력배들은 다시 각목과 쇠파이프를 들고 학생들이 모인 집회장으로 난입했다. 곧이어 정연석 동아리연합회장이 그 아수라장 한복판으로 들어갔고, 또다시 집중적인 폭력이 그에게 가해졌다. 수많은 학생들이 각목에 맞아 쓰러지는 가운데, 몇몇 학생들이 그를 가까스로 대피시켰다. 

 

잠시 후, 정연석은 구호를 외치며 다시 집회 현장에 나타났다. 자신의 몸에 시너를 부은 채였다. “학원폭력 근절하고 이사장을 처벌하라!”, “김용갑의 사인을 규명하라!” 어떻게 해도 나아지지 않는다는 무력감과 학교의 무차별적 폭력에 그의 분노는 삽시간에 불길로 타올랐다. 다급히 정연석의 몸에 붙은 불을 끈 학생들은 충격적인 그 현장을 일주일 넘도록 지키며 학교의 폭력 사태에 항의했지만, 학교 측은 휴교 조치로 입막음을 했다. 

 

3월 28일 새벽, 학교 측은 이번에도 폭력배들을 동원해 현장을 지키고 있던 학생들을 쫓아냈다. 이후 시위를 주도한 6명의 학생을 구속하고, 20여 명을 수배했다. 1991년 3월, 동부전문대에서 벌어진 그 일은 3당 합당 이후의 정권이 공안 몰이의 명분으로 내세웠던 ‘범죄와의 전쟁’이 무엇이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것이었다. 

 

죽음이 이 현실보다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  

필자가 제작한 영화 〈1991, 봄〉의 역사적 상처들이 새겨진 지 올해로 30년째가 된다. 많은 이들이 그 기억의 시작을 명지대 신입생 강경대가 공권력의 쇠파이프에 맞아 사망했던 날을 꼽지만, 필자는 강경대의 희생이 있기 직전, 속초에서 벌어진 그 일들에 대한 기억 또한 덧대어져야 한다고 믿는다. 이 이야기는 30년이 지나도록 가시지 않는 시대적 통증이 어떻게 비롯되었고 또 남아있는지에 대한 선명한 징후이자, 지난 세월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공백으로 남겨진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생존자 정연석은 1991년이 자신이 다시 태어난 해였다고 회상한다. 당시 왜 분신을 택했냐는 우문에 그는 “죽음이 이 현실보다 힘들어 보이지 않았다”고 답했다. 분신 후 원주 기독병원으로 이송된 그는 한 달 반이 넘는 시간을 병상에서 보냈다.

 

그는 훗날 자신이 병상에서 일어나 다시 삶을 살아갈 수 있었던 것은 “당시 전국 각지에서 자신을 지켜준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자신을 두 번씩이나 찾아왔던 특별한 두 사람을 기억하고 있었다. 한 사람은 수배 중에도 찾아와준 당시 전대협 의장이었고, 또 한 사람은 훗날 서강대에서 몸을 던진 전민련 간부 김기설이었다. 

 

지연된 정의는 30년이 지난 현실의 윤곽을 여전히 두르고 있다. 김용갑의 의문사에 대해, 대통령 직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가 당시 학내폭력이 존재했으며, 학교의 개입이 있었다는 것, 장학금, 학점 등으로 회유 조종하려 했다는 사실까지 규명했으나, CCTV가 없었던 당시 김용갑의 사망 직전 한 시간여의 행적을 밝힐 수 없다는 이유로 사인 규명 불능으로 처리됐다.

 

동우전문대는 동우대학교로 이름이 바뀐 뒤, 2002년 재단 설립자 기숙사 수익금을 횡령한 사실이 드러나기도 했다. 2013년 동우대학교는 다시 경동대학교로 통합되는데, 경동대학교의 재단 설립자가 곧 동우전문대의 재단설립자이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수차례의 학원비리 의혹과 사법적 판단에도 불구하고 재단설립자는 여전히 건재하다. 현 정권에서 국회의장을 역임한 문희상 씨를 포함해, 박재갑, 전재욱 세 사람이 명예총장을 맡고 있다.

 

 

➊ 의문사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이 2000년 1월 15일 제정됨에 따라 2000년 10월 17일 출범하였다. 대통령 소속의 한시적 기구로서 민주화 운동과 관련한 의문사 진정의 조사·처리 등 진실을 규명할 목적으로 설치되었으며, 2004년 12월 31일 폐지되었다.


글. 권경원

다큐멘터리 영화 〈1991, 봄〉을 연출했다. 〈1991, 봄〉은 국가의 불의에 저항한 11명의 청춘들과 유서대필, 자살방조라는 사법사상 유일무이의 죄명으로 낙인찍힌 스물일곱 청년 강기훈의 이야기를 다룬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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