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사회복지 운동

일본의 사회복지 운동

『복지가 사람을 죽일 때』라는 책이 1988년도 출간되어 2년 사이에 23판이나 인쇄되었으며, 1년 후에 『국보(국민건강보험)가 사람을 죽일 때』도 출판되어 꽤 많이 판매될 정도로 사회복지에 대한 것이 일본 열도의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의료보장이든 연금이든 생활보호이든 사회복지 서비스제도이든 간에 이러한 사회복지는 인간다운 삶을 살 수 있는 권리의 실현을 위한 것이므로, 특히 사회보장의 문제는 인권적인 권리의 문제로 생각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일본의 사회복지의 역사를 권리의 시점에서 볼 때에 사회보장재판운동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운동의 역사에서 아사히소송(朝日訴訟), 호리끼소송(堀木訴訟) 등 빼놓을 수 없을 것인데, 여기서는 아사히소송을 중심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1. 아사히소송의 의의

“일본의 사회보장의 여명”, “권리로서의 사회보장의 이론”이라고 불릴 정도로 일본의 사회복지를 변화시키는데 중요한 계기가 되었던 이 소송은 물론 소송자의 사망으로 인하여 최고재판서 원고의 패소로 약 10년간의 논쟁의 막을 내리게 되었지만, 국민들에게 생존권의 의의를 인식시킨 것과 위정자들에게도 큰 반성을 촉구한 것 등 재판의 존재 그 자체가 사회에 미친 영향은 이루 말할 수없으며, 지금도 역사적 의의를 높게 평가하고 있다. 이 소송이 제기된 것은 인간성을 무시한 복지행정에 대한 아사히히게루(朝日茂)씨의 개인적인 비운에서 출발하였다. 따라서 소송 제기 당시에는 언론과 국민들도 별로 관심이 없을 정도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서 본인과 관련된 환자동맹의 도움과 노동조합, 지식인, 사회복지관련자 심지어 정당들의 참여로 인하여 범 국민적으로 발전되었다.

“아사히소송”에 의해 점화된 사회복지운동은 1960년대에 보다 급격히 활발하게 되었으며, 이는 1970년대 전반까지 계속되었으며, 사회보장재판도 이에 보조를 맞추어 1960년대 후반에서 1970년대 전반에 걸쳐서 사회복지 각 분야에 걸쳐서 전개되었다. 그 중에서도 1970년대에 제소된 “堀木訴訟”은 경제성장이 진행되고 있는 일본의 사회 속에서 또 정부가 풍부한 복지국가를 표방하고 있는 정황 속에서 전맹(全盲)의 여성이 생존권, 평등권을 주장한 사건인데, 사회보장재판의 계보 가운데에서도 “아사히소송”을 계승한 것으로 보고 사회복지운동의 기수적 역할을 한 것으로 이 두 사건들은 기억되고 있다.

2. 아사히소송의 개요

朝日茂(1913년 7월 18일-1964년 2월 14일)는 전쟁전 岡山縣의 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중앙대학야간부에 진학을 하였지만 중증의 폐결핵으로 인하여 현 요양소(후에 국립강산요양소)에 입소하였는데, 독신이고 소득이 없기 때문에 생활보호법의 수급요건에 충족되어 의료부조 및 생활부조(최고 600엔의 일용품비)를 받고 있었다. 그런데 1956년 7월 오랜 기간 동안(1차 판결에서는 35년간) 소식이 없었던 형님이 가족을 데리고 중국에서 宮崎縣으로 돌아온 것을 津山市의 복지사무소가 찾아낸 것이다.

그리하여 그 형에게 당신은 적어도 민법상의 부양의 무자 즉 형제이므로 매월 3000엔을 동생에게 보내라고 명령하였다. 돌아 온 지도 얼마되지 않고 본인의 처자식들도 살아야 되기에 그만한 돈을 보내는 것은 어렸다고 하자 절반으로 깎아 줄 테니 1500엔을 송금하라고 하기에 어쩔 수 없이 그 돈을 보내자 이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식으로 이를 수입으로 인정하여 그해 8월부터 1500엔에서 입원 환자의 생활부조의 일용품비 월600엔을 공제하고, 지금까지 지급하여온 생활부조를 폐지함과 더불어 잔액 900엔을 의료부조비의 일부분으로 사용한다는 생활보호변경 결정처분을 내렸다. 아사히씨는 형으로부터 송금해온 돈은 아무것도 아닌 것이 되어버렸다. 이에 아사히씨는 이런 결정에 자기는 복종할 수 없다는 신청을 강산현지사에 제출하였다. 즉 일용품비 600엔 그것 자체의 문제점과 그리고 적어도 보식비(補食費)로서 400엔을 본인이 사용할 수 있도록 의료비 자기부담액을 500엔으로 감액하여 줄 것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지사는 ‘일용품비 600엔은 후생대신(우리 나라의 보건복지부 장관)이 정한 보호기준이므로 불복 신청은 받을 수 없다’는 이유로 그의 건의를 받아 들이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이사히씨는 후생대신에게 본인은 일반적 보호기준에 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 아니라 ‘보호의 변경 처분에 대하여 이의를 제기하는 것이므로 이 이의를 우선 받아들인 다음에 심의를 하여야 한다’라고 제기하였지만 후생대신도 1957년 2월15일에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더구나 후생성(우리나라의 보건복지부)은 월600엔은 충분하며 일상적인 용품은 이 돈으로 살 수 있다고 하였다.

또 ‘요양소의 식사로서는 영양을 섭취할 수 없으므로 보식을 취하지 않으면 안되며 이에 대한 비용도 필요하다’라는 의견에 대하여 ‘요양소의 급식은 완전급식이므로 보식을 할 필요 없다’라고 주장하므로 아사히씨는 이를 납득할 수 없었으므로 일본 헌법 제25조에 근거한 생활보호법에 위반되어 있다고 하여 1957년 8월 후생대신을 피고로 하여 동경지방재판소에 소송을 제기했다. 이것이 그 유명한 “아사히소송”의 시작이다.

일심에서 동경지방재판소는 1960년 10월 19일에 아사히씨의 소송이 의미가 있다는 판결을 내려 원고의 승리를 선언하였다. 그러나 피고(후생대신)가 이 판결에 불복하여 공소하자 동경고등재판소는 1963년 11월 제1심의 판결을 취소하고 아사히씨의 청구를 기각하였다. 이에 아사히씨는 공소심 판결파기를 요구하여 최고재판소에 상고를 하였다. 그러던 중 아사히씨의 1964년 2월14일 사망으로 인하여 그의 양자가 소송을 계승하였지만 최고재판소는 1967년 5월에 본인(원고)의 사망으로 본 소송이 종료된다는 판결을 내렸다. 이 소송은 제1심 소송 이후 약 10년이라는 세월이 경과하였다.

3. 아사히소송 일심 판결의 그 의의

1960년 10월19일 동경지방재판소는 일심판결을 내렸다. ‘현재의 보호기준은 생활보호법의 근본인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한의 생활을 보장한다는 헌법 제25조의 정신에 위반되는 것이다’라는 아사히씨의 전면승소판결이었다. 이 판결의 의의의 큰 하나는 무엇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최저생활인가를 과학적으로 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점은 노동과학연구소의 勝本武 박사의 연구와 그의 증언이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노동과학연구소는 ‘최저생활의 연구’를 勝本씨 중심으로 하였다. 이 연구는 극히 상식적인 가설을 설정하였다. 즉 생활을 위해 사용하는 돈이 적으면 충분한 영양을 취할 수 없다. 따라서 발육도 저해 받으며, 건강도 상실한다. 또 생활에 사용할 돈이 적다는 것은 빈곤에 처하여 있다는 것이므로 가정환경도 나쁘다. 따라서 어린이의 학습조건도 불리하게 되고 어린이의 발육도 저해되는 것은 틀림이 없는 것이다라고 생각하였다. 즉 생활비를 어느 정도 쓰는 경제적 상황과 신체적, 정신적인 발육의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지 않은가라는 상식적인 가설에 입각하여 동경도내 약 300가구를 선정하여 조사를 하였다. 이것은 후생성의 위탁조사이었으며, 1952년에서 1954년까지 3년에 걸쳐 시행하였다. 이 조사의 결과 400엔이 최저생존비이고, 700엔이 최저 건강, 체면, 쾌락을 유지할 수 있는 최저생활비로 분석되었다. 따라서 헌법에 의거한 생활보호법은 최저생활을 보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러나 당시의 보호기준은 최저생활비 뿐만 아니라 최저생존비에도 미치지 못하였다.

그리고 재판소는 아사히씨가 있는 강산형의 요양소까지 와서 현지검증, 현지공판을 하였다. 검증은 아사히씨가 적용 받고 있는 일용품비 월600엔의 기준이 정상인가를 조사하기 위하여 취사장에까지 와서 어떤 요리가 몇시에 어떤 경로로 환자의 머리맡까지 이르는 것까지 조사를 하였다. 그리고 아사히씨의 머리맡에서도 임상 질문을 하였다. ‘일용품비 월 600엔으로서는 도저히 건강하고 문화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라는 판결은 이러한 일련의 조사로서 표명된 것이다. 무엇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인가를 검토하는 데 3가지 중요한 것을 본 판결에서 늘낄 수 있다고 한다. 즉 첫째로 저소득층이 많다고 하여 보호기준이 낮아도 된다는 것은 성립될 수 없다. 이것은 정부측의 ‘현재의 보호기준으로 충분하다’라는 증언과 관계가 있다. 후생성 측의 증인으로 와세다 대학의 末高信교수가 ‘보호수준이 낮다고는 하나 일본의 티벳이라고 하는 岩手의 산 속이나 외로운 섬이나 농촌지대에서는 단벌신사들이고, 버선이나 맨발로 다니고 있다. 변을 본후 종이로 뒤를 딱지 못하고 짚으로 닦고 있다. 이러한 것을 생각한다면, 생활보호에서는 휴지 값도 생각하고 있으며, 신문도 그 신문 값이 한 사람은 어렵다고 할지라도 두명이라면 살 수 있는 등 여러가지를 생각할 때 건강하고 문화적이라고 할 수 있다’라는 취지의 증언을 하였다. 이때 방청한 사람들은 이 이야기를 듣고 모두 웃었다고 한다. 일심 판결에서 이 대학교수의 증언에 따라 많은 낮은 소득의 사람들이 있으므로 보호수준도 낮아야 한다는 논리는 인정받지 못하였다.

두번째는 예산을 먼저 정하고 보호기준을 그것에 맞추는 것은 대단히 잘못되었다는 것이다. 우선 건강하고 최저한도의 생활을 보장한다고 하는 국가의 책임을 다할 수 있는 예산을 수립하여야 한다고 하고 잇다. 현재에도 무엇을 하려고 할 경우에 돈타령을 하는데 본 판결의 지적은 대단히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할 수 있다.

셋째로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수준’은 국민 모두에게 전적으로 보장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으로 생각하여야 한다는 것을 지적한 것이다. 아사히씨는 물품을 살 돈의 부족과 요양소의 급식 실태에서는 보식의 필요함(본인은 중증의 결핵환자라는 사실, 요양소의 빈약한 식사와 아울러 이 당시의 시설과 병원과 요양소에서는 직원들의 5시 퇴근을 위해 오우 4시에 저녁식사를 하는 곳이 많다고 하며, 따라서 환자와 시설의 당사자들을 아침까지 공복의 상태로 지내야 했다)을 주장하였다. 이에 대하여 정부측은 입원의 경우 식사는 치료를 위해 하는 것으로서 식비는 의료비에 포함된다. 그러나 일용품비는 생활부조의 문제로서 의료비의 문제는 아니라는 논리이기에 아사히씨의 요구는 잘못되어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것에 대하여 판결은 ‘환자가 되어 본다면 생활부조이든 의료부조이든 요점적으로 전체적으로 환자가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확보할 수 있는 구조가 되지 않으면 안되다’는 것이었다.

4. 아사히소송의 결과

이 일심의 판결은 일본의 사회복지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우선 일심 판결이 내린 다음해 1961년 4월에 보호기준의 획기적인 상승이 있었다. 생활부조 기준은 실제적으로 18%의 상승을 보였다. 최근 1% 정도의 상승을 생각할 때 거의 획기적인 것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입원환자의 일용품비에 있어서도 실질적으로 47%로서 지금으로서는 상상도 못할 정도의 상승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일심 판결후 약 10년간의 싸움에 격려 받아서인지 이후에도 계속하여 사회복지재판이 진행되었다. 무엇보다도 제일 큰 성과는 국민들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삶의 중요성과 이를 위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국가를 형성하는 것은 우리 국민들입니다. 국민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야말로 국가의 일차적인 사명이며 의무입니다. 그러므로 이 국민이 건강하고 문화적인 생활을 지킬 수 잇는 것이야말로 우선 적으로 시행되어야 합니다. 따라서 국가의 예산이라는 것도 우선적으로 국민의 생활의 향상을 위해 짜여지지 않으면 안됩니다.” (일심 때 淺沼裁判長의 판결문 중에서)

전광현(서울신학대학 사회사업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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