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1999년 12월 1999-12-01   831

시민운동과 여성성

80년대 중반부터였을 것이다. 길림성 연길에 사는 조선족 여성 작가하고 편지를 교환하게 되었다. 그쪽에서 먼저 인편으로 편지를 보내왔는데 내 책을 보고 쓴 펜 레터 같은 것이었다. 그때까지만해도 연변에 사는 조선족이 어떻게 사는지 아는 게 전혀 없었다. 미국 시민권을 가진 교포가 연변에 가보고 찍은 사진이 모 월간지에 소개되어 그 땅에 사는 조선족들이 우리말과 글, 우리가 거의 잃어가고 있는 전통을 고스란히 지키면서 옛스럽게 살고 있다는 걸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시냇가에서 방망이질하며 빨래하는 여자들이나 뭔가를 머리에 이고 바삐 어디로 가는 여자들이 입고 있는 수수한 한복과 농촌 풍경이 나의 어릴적 고향 모습과 너무도 흡사해서 아련한 그리움을 불러일으켰지만 어딘지 비현실적이기도 했다.

연변으로부터의 편지 때문에 나는 비로소 그들이 우리와 한 핏줄의 동시대인이라는 현실감을 갖게 되었다. 내가 쓴 책이 어떤 손길이나 경로를 거쳐 거기까지 갔는 지는 모르지만 여행이 자유롭지 않은 땅까지 흘러가서 동포를 만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은 나로서는 사건이었고, 글쓰는 행위에 대한 엄혹한 책임감을 환기시켰다. 한문을 많이 섞은 그녀의 편지는 유려한 달필이어서 높은 교양을 짐작하게 했고, 답장을 쓸 때마다 나의 약필에 열등감을 느끼게 했다. 그녀는 열심히 글을 쓰는 작가인 동시에 연길 전시대(TV방송국)에 근무하는 언론인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녀는 연길에서 발행되는 여성지나 문예지에 실린 자신의 글을 오려 보내줘 그녀의 문학세계뿐 아니라 연변동포들의 생활상을 이해하는 데도 도움이 되었다. 90년대 초 별안간 중국과의 왕래가 자유스러워지면서 연변동포들이 물 밀 듯이 고국방문을 하게 되었고, 그들이 여비라도 뺄려고 가지고 들어온 청심환, 인삼, 녹용을 비롯한 각종 한약재를 팔려고 번화가와 지하도에 노점상을 벌리고 손님을 부르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연변 여류 작가와의 편지교류

그 무렵 그 작가도 한국을 방문해 우리는 비로소 상면을 할 수 있었다. 그녀가 서울에 왔다는 전화를 받았을 때, 나는 솔직히 말해서 반가운 마음보다는 부담스러운 생각이 앞섰다. 한약재를 팔아달랄까봐 겁이 났던 것이다. 그러나 만나본 그녀는 너무도 세련된 멋쟁이였고, 자기 일에 의욕이 넘치는 프로였다. 그녀는 직장에다 한국의 방송계를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휴가를 내고 왔다고 했다. 연변 전시대는 조선족 상대의 남한 방송국이고, 사회주의 체제가 확고하여 상업방송 같은 건 안할 때라 출장비를 주어가며 남한 방송국에 정식 시찰이나 연수를 보낼 처지가 못되어 그냥 알아서 수단껏 하라는 식의 파견이 아니었나 싶다. 그녀는 나에게 약을 팔아달란 부탁도 안했고, 우리 집에 와 있으라는 내 호의도 완곡하게 거절했다. 그 대신 방송국을 보고싶어했고, TV 극을 쓰는 작가를 만나고 싶어했다.

그녀로부터 들은 바에 의하면 아직 그쪽 방송국 사정이 영세하여 우리가 PD라고 부르는 일과 구성작가, 방송작가의 역할분담이 명확하지 않아 훗두루 함께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때 마침 인기가 대단한 연속극을 쓰고 있는 방송작가가 잘 아는 후배여서 도움을 청했더니 나 대신 연변작가를 데리고 다니면서 그녀가 원하는 것을 거의 다 만족시켜주었다. 나는 그녀가 묵고 있는 여관방으로 김치나 해서 날라다 주면 되었다. 그녀는 같이 온 두명의 사촌들과 한 방을 쓰고 있었는데 그들도 한국에서 팔 물건을 많이 가져온 것 같았다. 그러나 그녀는 내 눈에 그런 것들이 눈에 띌까봐 여간 조심을 하는 게 아니었다. 부랴부랴 감추고 사촌들이 나에게 혹시라도 아쉬운 소리를 할까봐 눈치 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녀와 서울에서 두달을 그렇게 지내는 동안 그렇게까지 서로 체면을 차리지 않아도 된다싶게 서로 정이 들게 되었다. 그녀가 귀국할 날을 앞두고 날씨가 별안간 영하로 내려갔고, 초가을에 입고 온 옷은 추위를 견디기에는 턱없이 부실해보였다. 나는 그녀를 과히 비싸지 않은 재래장으로 데리고 가서 겨울 옷을 사주면서 우리 집에 있는 안 입는 헌옷 중에도 임시로 입을만한 게 있을 지도 모른다고 조심스럽게 말했더니, 반색을 하며 있는대로 챙겨주면 고맙겠다고 했다. 그렇게 해서 한두가지 챙겨주기 시작한 게 그녀가 끝도 없이 욕심을 부리는 바람에 나는 친구들한테까지 입을만한 헌옷 좀 내놓으라고 부탁을 해야했다. 어려운 일은 아니었지만 절대로 약장사 티를 안내려고 그렇게까지 깔끔하게 굴던 그녀답지 않은 짓이 나를 혼란스럽게 했다. 헌옷 보따리가 이불보따리처럼 커지자 도대체 어떻게 가지고 가려고 저렇게 욕심을 부릴까 딱한 생각도 들었다. 예민한 그는 내가 자기에게 정 떨어지려고 한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았다. 이렇게 말했다.

“나도 왜 이러는지 모르겠네요. 사방군데 넘치는 게 좋은 물건이고, 멀쩡한 것도 아무렇지도 않게 버리는 걸 보니까 이 사람 저 사람 갖다주면 요긴하게 쓸 사람들의 얼굴이 어른거려 어떻게든지 더 뜯어가고 싶지 뭡니까. 북조선 다닐 때는 그 반대로 뭐든지 갖다주고 싶어 몸살이 났다면 믿으시겠어요. 그 추운 고장에서 덮을 것도 변변치 않게 사는 친척을 보고 와서는 밤에 잠이 안와 이따만한 이불 솜을 장만해서 목이 빠지게 이고 간 적도 있고, 어떤 때는 밑창이 닳고 닳아 없어지다시피한 신발을 신고 출근하는 친척을 보다못해 신고간 신발하고 바꿔 신고 온 적도 있다니까요. 아마 아주 못사는 자식과 아주 잘 사는 자식을 둔 에미 마음이 이런 게 아닐까 싶네요. 잘 사는 자식한테서는 어떻게든 뭘 좀 얻어가고 싶고, 못사는 자식한테는 보태주고 싶어 애가 닳는….”

에미 마음과 통일

그 말에 나는 깊은 충격을 받았다. 그녀의 가까운 친척들은 거의 다 북조선에 살고 있어 줄창 왕래하고 있다는 건 그전에 들은 바가 있었다.

내 속에서 낳은 자식들이 고루 잘 살지 못하고 서로 심한 차이가 날 때 마음이 편치 못하여 한쪽에서 덜아다 다른 한쪽에 배풀지 않고는 못배기는 에미 마음이 바로 시민운동의 기본정신 아닐까. 정치권력이 남성적인 힘이라면, 남성적인 힘이 주도한 경제발전과 정치적 폭력에 상처받고 소외된 계층을 치유하고 일으켜세우고 서로 나눔의 물고를 트는 것은 모성의 몫이 될 수밖에 없다. 여성성이란 부드럽고 약한 듯하면서도 물로 바위를 뚫는 힘이고 군림하는 힘이 아니라 스며드는 힘이다. 여성에게만 있는 힘이라기 보다는 인간성 속의 착하고 온유한 면, 그게 없으면 인간도 아닌 측은지심에 해당하는 면이기도 하다.

우린 정신없이 거의 폭력적이라 할만큼 약한 자들을 깔아뭉개면서 이만큼 잘 살게 되었으니 이제 부끄러움없이 잘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깔아뭉갠 것들을 일으켜세우고 돌봐야할 차례이다. 여성성의 활용, 즉 시민운동이야말로 이 천박한 부자노릇에서 우리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다. 여성성을 가볍게 봐서는 안된다.

거창한 과제인 통일에 대해서 생각해보자. 인민군으로 간 아들과 국군으로 간 아들을 둔 어머니가 있다고 치자. 있다고 치자는 가정법이지만 실제로 그런 어머니는 수없이 많았다. 몇십년을 서로 총칼을 겨누고 원수가 되어 싸운 두 아들을 어머니는 어떤 방법으로 화해를 시킬 수 있을까. 형제는 아직도 서로를 구제불능한 악의 화신으로 보겠지만 어머니 눈에는 둘다 똑같이 인간적 약점과 취할 장점을 고루 갖춘 내 새끼로 보일 것이다. 현명한 어머니라면 이 고집 센 두 아들을 놓고 어떻게든 내 생전에 너희 둘이 화해하는 걸 보지 않고는 눈을 못감는다는 식의 협박으로 거짓 화해를 시키지는 않을 것이다. 어머니 자신의 눈으로 확인한 형제간의 닮은 점과, 취할만한 장점을 그들도 서로 보고 인정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일부터 시작할 것이다. 어머니가 원수진 형제를 화해시킬 수 있는 가장 지름길인 것처럼 분단된 체제도 이제 모성에서 화해의 단서를 찾아야할 줄 안다.

연변 여류작가가 다녀간 이듬해 나도 연길을 방문해서 그녀의 신세를 많이 지고 왔다. 그때만해도 연길은 50년대의 우리 작은 시골 읍같은 고장이었다. 그리고 몇해후 나는 뜻하지 않게 그 여류작가의 부음을 듣게 되었다. 교통사고였다고 한다. 그 젊고 의욕이 넘치고 아직 어린 딸을 둔 그 여자가 죽다니, 그 한적한 시골에서 교통사고라니 더군다나 믿기지 않았다. 그녀가 죽은 후 작년에 그녀의 딸도 만나볼겸 연길에 다시 가보았는데 그곳은 몰라보게 근대적인 도시로 바뀌어 있었고, 교통도 혼잡했다. 나는 그녀가 차에 치인 게 아니라 질주하는 발전의 속도에 치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녀의 명복을 빈다.

박완서 소설가.참여연대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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