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6월 2019-05-30   1621

[특집] ‘86세대’에 새겨진 굴절의 역사

특집_안녕, 86세대

‘86세대’에 새겨진
굴절의 역사

글. 박세길  새로운 사회를 여는 연구원 상임이사

 

 

‘86세대’는 액면 그대로 시대의 소산이었다. ‘86세대’는 1980년 5월에 발생한 5.18광주민주화운동과 운명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86세대’는 5.18광주민주화운동의 세례를 받고 민주화운동에 몸을 던진 ‘5.18세대’였다. 세계사에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만큼 폭발적 성장을 거듭한 학생운동은 민주화운동의 강력한 기관차 구실을 했다. ‘86세대’는 학생운동의 주역으로 출발하여 20대 초반부터 역사의 무대 중심에 섰다. ‘86세대’의 가슴 속은 긍지와 자부심으로 가득 차 있었고 세상 또한 그들을 향해 뜨거운 갈채를 보냈다. 

 

민주화운동은 위대한 승리를 거두었다. ‘86세대’는 단군 이래 진정한 의미의 첫 승리를 맛 본 세대가 되었다. 산업화 성공 덕분에 취직도 잘 되었다. 대학 졸업장만 있으면 학점에 관계없이 직장을 골라 갈 수 있었다. 식민지를 경험한 곳 중 민주화와 산업화에 동시에 성공한 유일한 나라에서 최대 수혜자로 등극한 것이다.

 

‘저항’에서 ‘점거’의 시대로

1990년대와 함께 30대에 접어든 ‘86세대’는 사회생활에 본격 진입했다. 한국 사회는 민주화운동 승리의 주역인 ‘86세대’가 매우 의미 있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강한 기대감을 내비쳤다. 이때 나온 ‘386세대’라는 용어는 그러한 기대감을 함축하고 있었다. ‘86세대’ 역시 승리의 주역답게 강한 자신감을 품고 있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386세대’는 1990년대 당시 새로운 시대를 이끌어갈 정치대안적 주체이자 경제력을 갖춘 이들로서 ‘386컴퓨터’에 빗대어 등장했으며 이후 수많은 ‘OO세대’의 점멸 속에서도 내포된 의미를 변모하며 한국 사회에서 지속적으로 호명되고 있다 

 

1990년대는 나라 안팎으로 거대한 지형 변화를 겪은 시기였다. 소련 붕괴와 함께 냉전 체제가 해체되었고, 디지털 문명이 본격적으로 꽃을 피우기 시작했다. 민주화는 정착 단계에 접어들었고, 경제 성장의 결과가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모든 점에서 새로운 가치와 비전을 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86세대’ 사이에서 새로운 미래를 탐색하기 위한 다양한 제스처가 줄을 이었다. 하지만 ‘86세대’의 사고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것은 승리로 빛나는 과거의 경험이었다. 그들은 권력과 돈에 자신의 능력만 결합시키면 능히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자신했다. 그들은 사회 상층부로 올라 서기 위해 줄달음쳤다. 너도 나도 저 고지를 점령하기만 하면 모든 게 잘 풀릴 것이라는 ‘고지론’에 이끌리었다.  

 

2000년대가 열리면서 ‘86세대’는 40대로 진입했다. 사회 중견의 위치에 서면서 무언가를 도모해 볼 수 있는 나이가 된 것이다. 그런 ‘86세대’ 앞에 운명의 순간이 다가 왔다. ‘86세대’를 정치적으로 결집시킬 적임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는 다름 아닌 노무현이었다. ‘86세대’는 노무현을 중심으로 세력화되었다. 그들은 노무현을 앞 세워 계파 중심의 기존 정치 지형을 통쾌하게 뒤엎었다. 인터넷이라는 신병기로 무장한 ‘86세대’는 여론을 유리하게 끌고 가면서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노무현 정부를 출범시키는 데 성공했다.

 

‘86세대’는 최고 권부인 청와대에 대거 진입했다. 2004년 노무현 탄핵 역풍을 등에 업고 국회 진출에도 성공했다. 액면 그대로 고지를 점령한 것이다. 이제 실력을 발휘해야할 차례가 되었다. 하지만 결과는 준비 부족을 드러냈을 뿐이었다. ‘86세대’는 국정 운영에도 미숙했고 새로운 시대를 열 좌표를 제시하지도 못했다. 심지어 한국 사회를 뒤틀리게 만든 신자유주의를 개혁 이데올로기로 착각하기까지 했다.

 

훗날 노무현 정부를 둘러싸고 긍정적 평가가 다수 이어졌지만 경제 분야에서 심각한 약점이 도사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사회적 양극화가 결정적으로 심화되었다. 이는 노무현 정부의 성격에 비추어 볼 때 완전 이율배반적인 결과였다. 정치적 위기가 도래했다. 그 모든 것은 여당이었던 열린우리당의 해체로 집약되었다. 민심은 ‘86세대’에게 냉소를 보냈다. 그 반대급부로 이명박 등 보수 정치인들이 선택을 받았다.

 

‘혁신’의 아이콘에서 ‘기득권’ 세력으로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86세대’는 50대에 진입하기 시작했다. 나이로 보나 문화로 보나 전형적인 기성세대가 된 것이다. 2030세대의 대척점에 서면서 오나가나 꼰대 소리를 들을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되었다.

 

촛불시민혁명의 힘으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하면서 ‘86세대’는 다시금 무대 한 복판에서 그 모습을 드러낼 수 있었다. 이미 이들은 정치권과 경제계, 시민사회운동 등 모든 영역에서 지도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잇달아 열린 청문회는 그동안 ‘86세대’가 어떤 삶의 궤적을 그려왔는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그것은 특권을 추구하고 부의 축적에 집착해 왔다는 점에서 다분히 기득권 세력으로 전락하는 과정이었다. ‘86세대’는 더 이상 변화와 혁신의 아이콘이 아니었다.

 

기득권에 집착하는 입장에서 현재의 한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미래를 상상하기는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그러한 ‘86세대’가 정치적 입지를 유지하기 위해 주로 기댄 것은 ‘적대적 공생’을 추구하는 진영 논리였다.

 

한 때 진영 대결은 역동적인 역사 발전을 이끌며 상당한 순기능을 했다. 민주 대 독재, 평화 대 냉전, 개혁 대 수구 구도가 바로 그러했다. ‘86세대’는 이 구도 속에서 민주, 평화, 개혁의 편에서 다수 국민의 지지를 받으며 독재, 냉전, 수구 세력에 대한 우위를 확보할 수 있었다. 그 과정에서 진영 대결의 노하우를 자연스럽게 축적했다. 하지만 박근혜 집단의 주도로 좌우 대결 구도가 작동하면서 진영 논리는 역사 발전을 가로막는 퇴행적 구도로 변질되었다. 촛불시민혁명을 거치며 진영 구도는 다소 변화된 양상을 보였지만 소모적 대결을 거듭했다는 점에서는 큰 변화가 없었다. 

 

의료 분야를 둘러싼 갈등은 소모적인 진영 대결이 어떤 기능을 하고 있는지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의료산업은 성장 잠재력이 가장 큰 분야의 하나로 꼽히고 있다. 하지만 산업화를 외면하는 의료 공공성 유지와 공공성을 포기하는 산업화 추진이라는 진보와 보수의 입장이 극단적으로 대립하면서 한 걸음도 못 나가고 있다. 한국 사회가 진영 논리에 갇혀 출구를 찾지 못하고 있는 형국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86세대’가 한국 사회의 질곡으로 작용하면서 역동적 발전을 가로막고 있다는 일각의 비판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 무엇보다도 자신보다 못한 조건을 자식 세대에게 물려준 첫 번째 세대라는 점에서 그러하다. 자칫하면 찬사와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세대가 집중적인 비난의 표적이 될 수도 있는 상황이다.

 

저명한 영국의 역사가 아놀드 토인비는 이렇게 말한 적 있다. “역사적 성공의 절반은 죽을 지도 모른다는 위기에서 비롯되었고, 실패의 반은 찬란했던 시절에 대한 기억에서 시작되었다.” ‘86세대’가 곱씹어 봐야할 구절이 아닌가 싶다. 찬란했던 과거에 갇혀 실패를 자초하고 있는 것은 아닌가? 과연 운명의 기로에 서 있는 ‘86세대’로 불리는 기득권 세력이 쥔 권력과 부를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세상은 거듭 질문을 던지고 있다.    

월간 참여사회 2019년 6월호 (통권 266호)

 

특집. 안녕, 86세대 2019년 6월호 월간참여사회 

1. ‘386세대’와 ‘86세대’의 차이 김선기

2. ‘86세대’에 새겨진 굴절의 역사 박세길

3. 386세대, ‘불안한 중산층’과 ‘세대불평등의 기득권자’ 사이에서 김형준

4. 투쟁에서 경쟁으로 달려온 86세대의 학형에게 조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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