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19년 06월 2019-05-30   1379

[여는글] 상상과 질문 그리고 대화

여는글

상상과 질문 그리고 대화  

 

 

조금은 무료하게 느껴지던 어느 날, 큰절 대흥사에서 템플스테이를 담당하시는 행원화 보살님이 한 청년을 모시고 왔다. 보살님은 뭔가 의미 있는 차담(茶啖)을 원하는 사람들은 내게 모시고 온다. 청년은 대안학교에서 공부했고, 자발적으로 과를 선택해서 지금은 철학을 전공하고 있다고 자신을 소개했다. ‘요즘 세상에 밥이 안 된다는 철학을 하다니, 참 신통한 청년일세.’ 내심 반가워서 좋은 차를 내면서 이런저런 가벼운 얘기부터 꺼냈다. 청년의 관심 분야가 남달랐고, 사유와 성찰이 기본인 공부이니, 말이 통할 수 있는 바탕은 되겠다 싶어 먼저 돌발적 질문으로 수작을 건넸다.  

 

● 그대는 중국의 만리장성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를 가 본 적이 있는가?

○ 가보지는 못했으나 사진과 영상으로 많이 보았습니다.

 

● 그래, 그럼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볼 때 어떤 생각이 들었는가?

○ (한참 뜸 들이다가) 글쎄요, 별다른 생각을 해보지 않았습니다.

 

● 철학과 학생이니 지금이라도 ‘별다른’ 생각을 해야 하네. ‘엄청 크다, 위대한 문화유산이다, 관광객이 많이 가겠구나’ 같은 누구나 하는 상투적인 생각 말고 다른 생각을 해보게.

○ 별다른 생각이 쉽게 떠오르지 않습니다. 스님께서 가르쳐 주십시오.

 

● 이런! 이 사람아, 자네는 나의 이런 질문에 빠르게 답이 나와야 하네. 그리고 나에게 답을 가르쳐 달라고? 내가 말하면 자네는 내 말을 ‘정답’으로 생각할 셈인가? 지금 자네는 철학과 학생으로서 치명적인 실수를 한 걸세. 왜 그런가? 자네는 늘 누군가의 답을 기다리기 전에 먼저 자네가 먼저 ‘질문’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 알겠습니다. 그런데 스님이 말씀하시는 질문이라는 게 무엇입니까?

 

● 질문이란, 다른 사람들이 보는 대로 보지 않는 것이 아닐까 하네. 지금 눈을 감고 만리장성과 피라미드를 다시 상상해 보게. 완성된 ‘지금’의 건축물을 보지 말고 ‘당시’ 건축하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상상해 보게나. 뭐가 보이는가? 어떤 소리가 들리지 않는가? 

○ (얼굴 표정이 점점 심각하게 굳어진다) 아! 그렇군요. 그 공사장에서 일하고 있는 사람들은 막강한 권력자에게 강제로 징발을 당했고, 부실한 식사를 하면서 관리들에게 채찍을 맞아가며 힘들게 노역을 하고, 공사하는 과정에서 사고로 많이 죽기도 했겠네요.

 

● 그렇지. 그 희생자들을 사랑하는 가족의 품으로 돌려주지도 않고 대충 매장했다고 하네. 자, 노역한 사람들의 고통을 보았으니 이제 누구의 고통이 보이는가?

○ 네, 강제로 징발된 사람들의 아내와 자식들, 부모님들이 보입니다. 얼마나 그립고 슬펐을까요? 무엇 때문에 그 많은 죄 없는 사람들이 이렇게 끌려와서 희생되어야 했을까요? 사람들을 희생시키면서 왜 그런 건축물을 만들어야 했을까요? 진시황은 그곳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을 보며 어떤 마음이 들었을까요?  

 

● 그렇다네. 나는 거대한 성과 무덤을 볼 때마다 위대하고 아름답다는 생각이 들지 않네. 그 속에서 인간의 절규가 들리는 듯하네. 층층이 쌓아 올린 견고한 성벽에서 인간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을 본다네. 가슴에 한없는 슬픔과 분노가 솟구친다네.

○ 이제 조금은 알겠습니다. 인문학에서 말하는 ‘상상’과 ‘질문’이 무얼 말하는지 알겠습니다.

 

● 그런가? 잘 들어주고 말해주어 고맙네. 이제 만리장성과 피라미드가 다른 모습으로 보일 걸세. 모든 사물과 현상은 그것이 생성되기까지 숱한 연결망을 가지고 있네. 그 연결을 집요하고 치밀하게 추적하고 해석하는 작업이 철학공부가 아닐까 하네. 참 의미 있는 찻자리였네.

 

 


글. 법인스님 참여연대 전 공동대표, 「참여사회」 편집위원장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전남 땅끝 해남 일지암 암주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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