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09월 2020-08-28   562

[보자] 2020년에는 낡은 이야기

2020년에는
낡은 이야기

 

월간참여사회 2020년 9월호 (통권 278호)

늙은 부부이야기: 스테이지 무비 

The Story of an Old Couple : STAGE MOVIE

공연실황 | 99분 | 2020 | 한국 | 12세 관람가

감독      신태연

출연      김명곤, 차유경

 

이 코너 이름은 ‘보자’이지만, 이 작품을 보자고 자신 있게 권하지는 못하겠는 게 솔직한 심정이다. 공연영화 <늙은 부부이야기: 스테이지 무비> 얘기다. 이 영화는 예술의전당의 영상화 사업 ‘SAC on Screen’의 산물이다. 2003년 초연한 창작극 <늙은 부부이야기>를 영화 문법을 차용해 영상으로 옮겼다.

 

연극 <늙은 부부이야기>를 본 적은 없지만, 나 역시 일찍이 제목은 들어봤다. 드디어 이름난 작품을 보게 된 것이다! 작품에 대한 진입장벽을 낮추는 것. 영상화 프로젝트의 순기능이다. 예술의 전당에서 공연된 <늙은 부부이야기>의 티켓 가격은 4~6만 원이다. 이에 비하면 만 원 안팎의 영화티켓 값은 확실히 부담이 적다. 다양한 지역 사람들에게 작품에 대한 접근성을 높일 수도 있다. 잘 된 영상화 사업을 지지하는 이유다. 

 

다만 <늙은 부부이야기: 스테이지 무비>가 ‘잘 된 영상화’의 예가 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우선 2020년에 만난 이 연극은, 너무나 낡아 보였다. 이게 그동안 그렇게 인기가 많았다고? 비판의 목소리는? 내가 만약 프로젝트 심사 관련자였다면 이 작품을 선정할 때 반대했을 텐데.

 

‘박동만’의 구애에 눈살이 찌푸려지는 이유 

내용부터 살펴보자. 어느 봄날, 산동네에 위치한 툇마루가 있는 주택에 박동만김명곤 분이 찾아온다. 세입자가 되기 위해서다. 집주인은 욕쟁이 할머니 이점순차유경 분. 둘은 이미 알고 있는 사이로 보인다. 점순은 동만의 여성편력을 언급하며, 여자 혼자 사는 집에 남자가 들어오면 동네에 불순한 소문이 돌 수 있으니 위험부담 차원에서 공고 내용보다 비싸게 집세를 받겠다고 말한다. ‘이건… 갑질 아닌가?’ 

 

잠시 세입자에 설움에 이입하여 동공 지진이 일어났다. 그러나 동만이 점순에게 본격적인 성희롱을 시작하자 마음이 곧 차게 식었다. 극은 둘의 옥신각신 실랑이를 코믹하게 그리는데, 동만의 성희롱과 성차별적 언사는 내게 웃어넘기기 어려운 정도라서 문제였다. 점순의 뒷모습을 보며 엉덩이에 대해 ‘칭찬’하기, 집요하게 술 권하기, 성관계 암시하기 등의 ‘개수작’이 그것이다.

 

그리고 암전. <봄〉의 장이 닫히고 <여름> 장이 시작된다. 밝아진 무대에서 관객들이 보는 것은 꿀이 떨어지고 깨가 쏟아지는 신혼부부 두 사람이다. 동만과 점순이 연인이 된 것이다. 사사건건 벌어진 말다툼은 서로에 대한 관심과 애정 때문이었다고 작품은 말하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동만의 언행은 비판이나 풍자의 맥락으로 들어간 게 아니라, 오롯이 사랑 이야기를 하기 위함이었음을 깨달았다. 충격이었다.

 

<봄>에서 동만의 무례와 희롱은 이로써 정당화되는 걸까? 이런 식으로 사랑이 시작되는 것을 비판 없이 보여주고, 정당화하기까지 하는 작품은 유해하지 않은가? 나는 더 이상 작품에서 폭력적인 ‘들이댐’을 사랑으로 포장하는 꼴을 보고 싶지 않은데. 점잖고 품격 있는 구애로 시작된 사랑이 더 아름다울 것 같은데. 노인도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둘이 애정행각 벌이며 ‘하늘 같은 서방님’ 운운하는 것도 문제적이라고 느꼈다. 이 시대에 웬 구닥다리 같은 말? 각색이 이뤄져야 하는 부분 아니었을까? 혹시 이것이 지금 노인 세대에 대한 충실한 재현이라고 생각해서 내버려 둔 것인가?).

 

시대에 뒤떨어진 전개와 공적예산 투입의 아쉬움 

그 뒤 <가을>과 <겨울>은 관객들의 눈물을 짜내는 데 총력을 기울인다. 통속극에서 익히 보던 전개와 감성이다. 사랑하는 점순이 불치병에 걸렸다! 울고 짜고 통곡하는 기나긴 과정 끝에 동만은 신혼여행 대신 점순을 업고 마을을 돌기로 한다. 그리고 겨울. 혼자 남은 동만에게 스웨터가 배달된다. 점순이 스웨터를 완성하지 못하고 세상을 떠나자, 점순의 딸이 이를 가져가 마무리해 택배로 보낸 것이다. 스웨터에 동봉된 편지를 읽은 동만은 “역시 딸년이 최고”라는 말을 하며 오열한다.

 

여기서도 차게 식었다. “딸이 최고” 같은 말, 정말이지 싫어한다. 아들을 선호하던 시대에 딸을 낳으면 “살림밑천”이라며 ‘위로’하던 말에서 시작해, 여성들이 본격적인 경제 활동을 하게 된 뒤에는 딸들이 돈도 주고 (아들과 달리) 섬세한 돌봄까지 제공해 ‘정말 좋다’는 맥락이 형성됐다. 언뜻 칭찬처럼 보이는 말이지만 칭찬이 아니다. 이 말을 들으면 자식을 한 명의 독립된 인격체가 아닌 자신의 부속물이자 자산으로 보는 태도, 상대를 무언가를 위한 수단으로 대하며 휘두르는 사고방식, 한국의 딸들에게 씌워지는 억압과 강요되는 감정노동 및 돌봄노동을 떠올리게 된다. 

 

정말 노인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고, 노인의 사랑을 존중하는 작품이라면 더 깊은 고민과 새로운 상상력을 보여줘야 하지 않았을까? 외로움의 해결책이 정말 이성애 로맨스와 가족의 돌봄뿐인가? 노인의 외로움은 자신의 사회적 자리를 찾지 못하는 데서 올 텐데, 건강한 공동체 안에서의 상호 돌봄이 큰 위로가 될 텐데, 이에 대한 고민과 새로운 가능성의 제시가 우리 사회에 더욱 필요하지 않을까? 1억 2천만 원의 공적 예산이 투입돼 전국에 배포되는 작품이 낡은 이데올로기를 설파한다는 점이 너무나 애석하다.

 

기술적인 부분에도 아쉬운 점이 있다. 사운드 믹싱이 잘 됐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가뜩이나 마음 붙이기 어려운 인물인데, 목소리가 찢어질 듯 크게 귓가를 때리니 비호감이 더욱 커졌다. 영화 문법을 차용했다는 촬영과 편집도 좋은 선택이었는지 모르겠다. 전체 무대나 다른 캐릭터의 표정을 보고 싶은데 춤추는 동만의 발을 당겨 찍는다든지, 관객의 존재를 되도록 지우려고 한다든지 등 연출자의 강요에 반발심을 느낀 게 한두 번이 아니다. 팬데믹 사태로 공연예술가 대다수가 경제적 어려움을 겪고 있는데, ‘이 작품에 쓰인 1억 2천만 원을 이들에게 나눠주는 편이 낫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적지 않은 공공 예산이 쓰이는 공연을 선정하고 제작할 때, 관계자들이 달라진 시대에 적합한 관점을 갖추고 고민해주길 바란다. 이에 대한 시민들의 감시도 필요할 것이다. 이 코너가 ‘보자’임을 상기하며 말한다. 공공 지원 작품들을 감시하며 지켜보자. <늙은 부부이야기: 스테이지 무비>는 8월 19일 극장 개봉했다. 

 

❶  예술의전당 무대에서 공연된 우수 공연·전시 콘텐츠를 영상으로 제작해 대형 스크린으로 상영하는 사업. 코로나19로 다중시설 이용이 어려운 국민들을 위해 유튜브 스트리밍도 일부 진행 중이다.

 


글. 최서윤 작가 

<월간잉여> 편집장으로 많이들 기억해주시는데 휴간한 지 오래됐습니다. 가장 최근 활동은 단편영화 <망치>를 연출한 것입니다. 화가 나서 만든 영화입니다. 저는 화가 나면 창작물로 표출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인가 봅니다. 종종 칼럼이나 리뷰로 생각과 감정을 나누기도 합니다. 저서로 <불만의 품격>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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