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 2020-10-05   1322

[여는글] 밥은 하늘이다

여는글

밥은 하늘이다 

 

 

햇님, 구름님, 바람님, 비님, 흙님과 어울려 곡식을 길러낸 착한 농부님, 그리고 음식을 만들어준 공양주님, 고맙습니다. 천천히 

꼭꼭 씹어 먹고 몸에 깃든 어머니 자연 품대로 뭇 생명과 더불어 살겠습니다.

 

실상사의 식사 기도문이다. 절에서는 식당을 공양간이라고 부른다. 지금은 음식을 올리는 일을 공양이라고 하지만, 본디 공양供養이란 존중과 헌신의 마음을 담아 부처님이나 수행자들에게 올리는 선물이다. 초기 불교 시대에는 음식과 의복, 침구류와 의약품을 주로 공양했다. 생존과 생활의 필수품을 주로 공양했던 것이다. 헌공 의식에는 여섯 가지 공양물을 올린다. 쌀과 향과 차, 꽃과 과일, 등불을 올린다. 공양물에는 저마다 상징과 의미가 담긴다. 향은 번뇌의 악취를 제거하고, 등불은 무명의 어둠을 소멸하고 밝힌다. 그리고 밥은 주린 사람의 배를 채우고 생명을 양육한다. 여러 공양 중에서도 음식이 가장 중요한 공양물이었다. 

 

지금도 동남아 불교권에서는 날마다 이른 새벽 6시에 수행자들이 절 근처 동네에서 불자들에게 음식을 얻는, 탁발托鉢 전통이 이어져 오고 있다. 밥을 주고받는 사이에는 공감과 교류가 흐르고 있음을 살펴야 한다. 세간의 이웃들은 수행자에게 믿음과 공경의 마음을 담아 밥을 드린다. 그리고 밥을 받은 수행자는 최소한의 소유로 살아가면서 함양한 지혜와 자비심을 세속의 벗들과 나눈다. 마음과 마음이 밥을 통해 상호 소통한다.

 

상호 공감하는 밥은 상호 협력으로 탄생한다. 위의 공양 기도문을 보자. 내게 한 그릇의 밥이 오기까지 해와 바람과 비와 흙이라는 자연과 농부의 정성이 쌀을 만든다. 나를 사랑하는 엄마의 마음이 밥을 통해서 내 마음으로 온다. 이런 협력과 정성으로 온 밥을 먹은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몸에 깃든 어머니’ 자연 품대로 뭇 생명들과 더불어 사이좋게 살아야 한다. 

 

이렇게 한 그릇의 밥은 우주의 섭리이고 자연의 법칙이며, 생명의 윤리적 질서다. 밥의 철학이 결코 가볍지 않다. 밥을 먹지 못하면 우리가 생명체를 유지할 수 없듯이, 밥의 철학을 이해하고 동의하지 않는다면 지구별 생명의 질서를 유지할 수 없다. 이러한 밥의 철학을 곳곳에서 확인한다. 놀랍게도 실상사와 거의 같은 기도문을 본다. 강원도 홍천의 기독교 정신을 바탕으로 살아가는 밝은누리 공동체와 박노해 시인의 나눔문화 등의 기도문은 대략 내용이 같다. 밥의 철학을 공유하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은혜와 협력, 나눔과 공존, 존중과 평등이라는 생명 질서의 밥이 지금 여러 이유로 무너지고 있다. 식량의 위기, 식량의 자원화, 식량의 무기화, 식량 전쟁, 이런 언어들이 국내외 사회의 수면에 올라와 있다. 밥에 대한 집단 무지이고 대단한 무례가 아닐 수 없다. 농자천대지대본農者天下之大本에서 식량자본지무기食糧資本之武器의 세상으로 변질될 위험이 곳곳에서 감지되고 있다.

 

밥이 탄생하고 존재하는 이유가 생명체의 건강한 보존과 양육에 있을 터이고, 밥이 철학으로 빛나는 이유가 서로의 주림을 막아주고 웃음과 사랑을 꽃피우는 것일 터인데, 어느 곳에서는 밥이 없어 굶어 죽어가고, 어느 곳에서는 물량 조절을 위해 밥을 집단으로 폐기하고 있다. 분명 밥의 변질이라 할 수 있다. 인간이 지독한 탐욕의 과보로 기후 위기가 오고, 이어 식량이 위기를 맞으며 밥의 정신이 위기를 맞고 있다. 탐욕을 채우기 위해 식량을 무기 삼아 다른 나라를 협박하고 협상한다. 이 또한 밥의 정신이 변질되고 있는 위기 징후이다. 

 

그래서 시인들은 말한다. 꽃과 나무가 돈으로 보이는 순간, 나무의 푸른 싱그러움도 보이지 않고 꽃의 향기도 맡을 수 없다고. 밥의 결핍을 걱정하는 세상, 밥의 이동을 조작하여 밥을 돈으로 환산하는 세상, 그런 세상에 ‘식구’라는 공동체는 무너진다. 제발 인간이 인간일 수 있게 하는, 최소한의 근본 존엄인, 집과 밥을 가지고 장난치지 말자. 밥을 조작하는 시대는 인간의 존엄성이 무너지는 미래를 부른다. 밥은 함께 나눠 먹고 살라는 하늘의 명령이다. 밥은 하늘이다. 

 


글. 법인 스님 월간참여사회 편집위원장, 전 참여연대 공동대표 

16세인 중학교 3학년 때 광주 향림사에서 천운 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으며, 대흥사 수련원장을 맡아 ‘새벽숲길’이라는 주말 수련회를 시작하면서 오늘날 템플스테이의 기반을 마련했다. 실상사 화엄학림 학장과 <불교신문> 주필, 조계종 교육부장을 지냈으며,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지리산 실상사에서 공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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