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 2020-10-05   3368

[만남] 그녀의 가을은, 깊어간다 – 주은경 아카데미느티나무 원장

그녀의 가을은, 깊어간다

주은경 아카데미느티나무 원장

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호 (통권 279호)

그녀가 가방 속에서 거울을 꺼내 얼굴을 이리저리 살피며 말한다.

“나 파마 안 한 지 2년이 넘었어. 사진 지금 찍어요? 그럼 잠깐, 얼굴에 뭐 좀 발라야 하는데….”

파우더콤팩트를 두드리는 그녀를 바라보다 툭 하고 묻는다. “지금 ○○에 계신다면서요?” “응, 근데 그것도 쓰려고?” “쓰면 안 돼요?” 그러다, 추울까 봐 바지를 두 개나 껴입어서 덥다는 그녀를 위해 에어컨을 켰다. “난 그런 거에 좀 예민해서, 나 거기 있는 거 누가 알면.” “왜요? 알면 안 되는 이유라도?” “그런 건 아닌데 혹시나….” “그럼 그냥 시골에 있다고는 써도 돼요?” 십년지기가 만나서 인터뷰하는 풍경은 뭐, 이렇다.

‘교육’이라는 두 글자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원장 주은경. 참여연대에서 한 번이라도 강의를 들은 사람이라면 늘 앞에서 마이크를 들고 자신을 소개하던 그녀를 기억하지 않을까 싶다.

“참여연대와 첫 인연은 1995년 ‘참여사회아카데미 교육위원’을 하면서부터예요. 그 후 2008년 당시 참여연대 시민위원장이던 진영종 선생님이 연락을 했어요. 시민교육을 해보자고. 낙지볶음 한 접시 시켜주면서. 마침 15년 해온 방송 다큐멘터리 작가 일을 접고, 광우병 촛불시위를 계기로 시민교육에 대해 관심도 많았던 터라 오케이 했죠. 그리고 새롭게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를 오픈하고 부원장을 맡았어요. 그때 너무 싸게 넘어갔어요. 하하하.

인터뷰 전 그녀가 보내준 약력을 살펴보았다. 대학에서 교육학을 전공한 그녀의 삶은 ‘교육’이라는 단어로 꽉 채워져 있었다. 구로공단 야학, 인천민중교육연구소, 성공회대 사회교육원,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교육기획위원 등등…. 교육이란 두 글자를 화두로 잡고 인터뷰를 이어갔다.

“대학 진학할 때 작은오빠가 앞으로 교육학이 전망이 좋다고 해서 솔깃했죠. 교육학 교수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시대 상황 때문에 교수의 길은 접었지만 노동운동할 때도 교육학 공부가 영향을 미쳤어요. 사람들이 노동자교육을 ‘의식화’ 정도로만 생각할 때 나는 교육철학, 교육심리, 교육평가 이런 개념이 있었으니까요. 교육목표가 무엇인지, 어떤 교육철학을 바탕으로 해야 할지, 교육 방법은 무엇이 효과적인지 고민을 많이 했죠.”

부원장으로 5년, 원장으로 7년. 그녀가 느티나무에서 헌신한 기간만 장장 12년이다. 그 세월을 보내며 무수히 많은 일을 겪었겠지만 지면 관계상 ‘희비喜悲’만 정리해 달라 부탁했다.

“제가 늘 하는 말이 ‘모든 시민은 교사다, 예술가다, 정치가다.’예요. 근데 시민이 왜 교사고 예술가여야 하는지는 아무리 설명해도 공감을 잘 못하더라고요. 처음엔 참여연대에서 왜 인문학과 예술 프로그램을 하냐는 질문도 많이 받았어요. 참여연대 사업들을 교육 콘텐츠로 하는 데 더 집중해달라는 얘기도 많이 들었고요. 고민이 많았죠. 그것에 물론 동의하지만, 민주주의나 복지, 사회정치 이슈를 ‘강의’만 하는 방식으로는 한계가 있잖아요. 더 연구해서 통합적인 프로그램을 만들어 보고 싶었어요. 한 가지 주제로 강의도 하고, 책도 읽고, 토론하고, 에세이도 써 보고, 시민 액팅 프로그램까지 할 수 있는. 그런 걸 더 시도해 봤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이 있죠.”

이게 ‘비’라면 ‘희’는 정확히 반대 지점에 있다.

“참여연대 시민교육이 왜 ‘지성, 감성, 영성의 통합’을 추구해야 하는지를 결국엔 설득해 냈다고 생각해요. 나는 굉장히 직관적인 스타일이라 그걸 이론적으로, 언어로만 설득하는 게 어려웠거든요. 근데 느티나무에서 인문예술 프로그램들이 한 해 두 해 지속되면서 결국 그 과정을 통해 설득해 낸 거죠. 민주주의만 해도 정치, 사회, 문화, 예술, 일상의 민주주의까지 스펙트럼이 넓잖아요. 민주주의를 확장해내야 하는 것은 삶의 영역에서도 마찬가지예요. 많은 시민들이 인문학뿐 아니라 미술, 연극, 춤과 같은 예술적 작업을 통해 자신의 삶이 확장되는 새로운 경험을 얻었어요. 저는 이렇게 즐겁고 행복한 배움이 진짜라고 생각해요.”

‘참여연대 교육의 지평을 넓혀야 한다’는 당면과제가 있었다. 이 문제를 두고 많은 이들이 ‘참여연대’에서 출발해 ‘시민’을 향해 다가가고자 할 때 그녀는 ‘시민’들이 서 있는 곳으로 갔다. 그곳에서 ‘사람들이 자신의 삶에서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를 치열하게 고민했다. 그리고 거꾸로 거기서 출발해 참여연대를 향해 걸었다. 느티나무가 추구하는 시민교육의 지평은 그녀의 걸음을 따라 그렇게 조금씩 넓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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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이라는 두 글자

2011년부터 느티나무의 드로잉 강좌에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 그녀는 최근 개인전을 준비 중이다.

“다 합하면 30~40점 정도 될 거예요. 느티나무에서 하는 그림 수업은 ‘경험’이 목표예요. 남과 비교하지 않고, 내 그림은 이래, 내 선과 색은 이래, 이렇게 자신을 있는 그대로 표현하는 것, 그 해방감과 자유를 경험하는 것이 진짜 목표죠.”

‘잘해야 한다’는 생각에 억눌리거나 남과 비교하며 주눅 들지 말고, 자신의 선과 색을 즐기며, 삶이 확 피어났으면 하는 것, 그녀가 바라는 건 딱 그거 하나다.

“이게 말처럼 쉽진 않지만, 어쨌든 예술 작업을 통해 우리가 얻어야 할 건 훌륭한 결과물이 아니라 즐겁게 보낸 시간과 삶의 충만함이니까요.”

그 충만함은 대체 어떤 느낌인가요?

“그리는 대상이 풍경이든 뭐든, 그 대상하고 ‘확-’ 일치되는 느낌. 완전히 그 대상 안으로, 그 시간 안으로 빨려 들어가 버리거든요. 엄청난 몰입의 경험이죠. 그 행복은 뭐라 말로 할 수 없어요. 바람과 공기, 햇살과 꽃, 그림자…. 이것들이 시시각각 바뀌는 것을 온몸으로 감각해 내는 거죠.”

느티나무에서 그림 말고 춤도 추고 연극도 하시는데, 그중 뭐가 제일 적성에 맞나요?

“다 각각의 매력이 있어요. 특히 연극은, 사람들을 발견하는 재미가 너무 좋아요. 연극을 하다 보면 날이 갈수록 사람들이 ‘확, 확, 확’ 변해가는 모습을 볼 수 있는데 그것도 너무 신기하고. 또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모여 몰입하고 에너지를 만들어가고, 연출이라는 마법을 빌어 공연을 무대에 올리고 하는 이 과정이 너무 신나고 재밌거든요. 거기에 관객들의 호응까지 함께 곁들어지면, 한마디로 에너지가 ‘파바박!’ 그래서 연극을 종합예술이라고 하나 봐요.”

2011년인가? 그녀와 노래방에 간 적이 있다. 누군가 노래를 한창 부르고 있는데 그녀가 갑자기 일어나 춤을 추기 시작했다. 방은 비좁고 사람은 많았다. 딱히 몸을 흔들고 싶은 강렬한 음악도 아니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녀는 마음껏 춤을 췄다. 그녀의 행동이 너무 갑작스러워서 놀랐고, 그녀의 춤이 지극히 평범해서 더 놀랐으며, 사람들의 시선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그녀의 영혼 때문에 더욱더 놀랐다.

이후, 그녀는 직접 그린 그림으로 엽서를 만들었고, 세월호 집회에서 춤을 췄으며, 종강파티와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공연했다. 지난 10년간 그녀는 그렇게 꾸준히 나를 놀라게 했다. 그리고 나는 그런 그녀의 ‘예술혼’을 꾸준히 존경해 왔다.

‘정년퇴직’과 ‘은퇴’는 다르다

교육 전문가로서 앞으로 시민교육이 어떤 비전을 가져야 할지 말씀해 주세요.

“실무자나 전문가 중심이 아닌, 참가자들이 스스로 만드는 소규모 모임이나 서클이 더 많아지도록 해야겠죠. 참가자들의 에너지와 동력으로 끌고 나가는 교육과 배움이 중심이 되어야 할 거예요. 특히 요즘 같은 비대면 사회에서는 꼭 만나야 할 이유가 있는 모임이 삶에서 훨씬 더 중요해질 테니까요. 실무자들은 이런 상황에서 시민들이 가지고 있는 ‘연결, 표현, 만남’에 대한 욕구를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오는 10월 말 그녀는 정년퇴직을 앞두고 있다. 심경을 물으니 은퇴와 퇴직은 엄연히 다른 거 아니냐는 말이 되돌아왔다. 사전을 찾아보니 은퇴의 ‘은’자는 ‘숨다’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그녀는 그 어떤 의미로도 세상에서 숨을 사람이 아니란 걸, 그 가냘픈 몸매의 정수를 이루고 있는 건 ‘불타는 열정’이란 걸, 내가 누구보다 잘 안다. 그러니 그녀 말대로 ‘은퇴’는 틀리고 ‘퇴직’이 맞다.

“방송작가로 일할 때도 그렇고 느티나무에서도 그렇고, 나는 그곳이 어디든 늘 일하면서 성장하고 배우는 게 있었어요. 즐겁게 일했죠. 『가르칠 수 있는 용기』라는 책에 ‘직업은 자신의 진정한 기쁨과 세상의 깊은 허기가 만나는 장소’라는 프레데릭 뷔흐너의 말이 나와요. 좋아하는 일을 즐겁게 하면서, 그 과정에서 사람들이 변해가는 걸 바라보는 기쁨은, 자식을 키우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요. 이렇게 일했다는 건 굉장히 고마운 일이죠.”

최근 그녀는 어느 산마을에 머물며 글을 쓰고 있었다고 한다. 주제는 ‘나의 시민교육 이야기’다. 시민교육 현장 활동가가 자신의 경험을 정리한 책은 거의 없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토록 지성, 감성, 영성이 통합되는 교육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는지, 그 비전을 현장에서 풀어내며 내가 직접 경험한 것은 무엇인지, 그 과정에서 무엇을 느꼈는지 얘기해 주고 싶어요. 내 이야기가 시민들과 만나며 배움의 시간과 공간들을 직접 만들어내는 실무자들에게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다음은 퇴직을 앞두고 그녀가 느티나무를 통해 만난 모든 이들에게 남기는 인사다.

“내가 참여연대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준 분들, 강사비는 턱없이 적은데 요구하는 것은 하늘을 찌르는 느티나무에서 애정과 열정을 쏟아 준 강사들, 특히 지난 11년 동안 같이 동고동락했던 간사들에게 고맙다고, 행복했다고 전하고 싶어요. 간사들이 고생을 많이 하는데… 느티나무 실무자들이 성취감과 자기가 발전하고 있다는 걸 더 강하게 느끼면서 일하는 분위기를 만들었으면 좋았을 텐데 많이 아쉽네요. 어쨌든 이곳에서 여한 없이 일했고, 이런 마음으로 그만둘 수 있게 되어 참 감사합니다.”

인터뷰를 마칠 때쯤 그녀는 자신이 참여연대에서 정년퇴직 1호라고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지지 않고 나 또한 느티나무 1호 자원활동가이며 1호 시민기자라고 대꾸했다. 십년지기가 만나 인터뷰하는 풍경은 뭐, 이렇다.

그녀의 가을

월간참여사회 2020년 10월호 (통권 279호)

그녀가 맨 처음 느티나무 원장으로 취임하던 때 그린 그림 한 장을 들여다본다. 막 봄꽃이 피어나기 시작한 산사의 풍경이다. 그림 오른쪽엔 문이 활짝 열린 전각 한 채가 비스듬히 보인다. 그러나 이 그림의 주인공은 봄꽃도 고색창연한 전각도 아니다. 댓돌 앞에 콧등을 맞대고 옹기종기 모여 있는, 족히 30~40켤레 돼 보이는 신발들이다.

“느티나무에서 공부하며 만났던 사람들, 그 모든 인연에 대해 감사해요. 사람이 사랑을 주고받으면 그게 자신을 지탱해 나가는 큰 힘이 되잖아요. 퇴직 이후 새로운 삶을 눈앞에 둔 지금, 제 안의 두려움을 없애주는 그 힘을 여러분께 받았어요. 그 에너지가 제 안을 꽉 채우고 있죠. 앞으로 어디 가서 무얼 해도 그게 저한테 정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십여 년간 일하던 곳을 나이 육십이 되어 떠나는 순간, 이제 새롭게 무언가를 다시 시작하는 자의 두려움을 떨쳐내게 해주는 그 힘은 바로 그 신발들로부터 왔다. 옹기종기 모여 서로의 마음과 마음을 나누는 그 빛나는 순간들로부터 왔다. 그리고, 내가 지금 인터뷰를 쓰고 있는 이 힘은 그녀에게서 왔다. 두 아이의 엄마로만 살던 시절, 내게 세상 밖으로 한 발 더 용기 있게 나오라고, 겁먹지 말고 시도해 보라고 이끈 이가 바로 그녀다. 메마른 땅에 물 한 바가지를 붓고 씨앗 하나를 떨구어 주었던 그녀에게 나도 감사하다고, 인사를 전하고 싶다.

댓돌 앞, 그 많은 신발들 속에 내 것도 슬쩍 끼워 넣는다. 우리는 그렇게 서로의 뒷배가 되어, 멈추지 않고 우리들의 이야기를 이어갈 것이다.

[주은경 첫 그림전] 나의 다순구미 마을   

일시 2020년 10월 17일~30일

장소 참여연대 1층 카페통인 및 느티나무홀

✽전시회 수익금은 참여연대 아카데미느티나무 교육기금으로 기부합니다.

✽문의 아카데미느티나무 02-723-0580


글. 호모아줌마데스 

두 딸을 키우고 있는 애 엄마. 2009년 참여연대 회원가입과 동시에 자원활동을 시작해, 2012년부터 7년간 「참여사회」 ‘만남’ 코너를 맡았다. 지금은 「참여사회」 편집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특기사항 : 합기도 빨간띠

사진. 미디어홍보팀 이한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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